49화 신붓감을 찾아준다고?
“형님, 요즘은 끌리는 계집 없으십니까?”
경우레저 이사 민병호의 말에 지성학원 이사 유준혁이 말했다.
“우리 준성이 형님, 요즘 만나는 여자 있잖아. 모르고 있었어?”
“준성이 형님, 현영이랑 아직도 만나고 계십니까?”
“무슨 소리야. 그년이랑 끝난 지가 언젠데!”
“헐, 진작 말씀하시지. 근데 현영이 정도면 얼굴로는 적수가 없는데 그새 질리셨어요?”
“목석같아서 재미없더라. 맨날 뭐 사달라고 아양 떠는 것도 지겹고.”
재벌 부부는 보통 쇼윈도 부부인 경우가 많았다.
정략결혼으로 이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준성의 경우, 도가 지나칠 정도로 방탕 생활을 즐겼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가면 많이 들어갔다고 할 정도였다.
“김미혜라고, 요즘 연속극에 나오고 있는 애 알아? 조금 예뻐 보이던데, 기회 되면 데려와 봐.”
“크으, 김미혜! 예쁘죠. 특히 몸매가 아주 죽이던데.”
“준성이 형님, 제가 한번 데려와 보겠습니다. 그 여자 소속사 사장을 좀 아는데, 돈 조금만 주면 깔끔하게 될 겁니다.”
“좋아! 역시 우리 병호, 능력이 있어!”
그렇게 세 사람은 여자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몇 잔을 주고받으니, 유준혁이 불쑥 이 같은 말을 꺼냈다.
“형님, 그 서자 놈. 이제 슬슬 정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야 인마. 술맛 떨어지게 그 새끼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진짜 형님이 안타까워서 그래요. 안타까워서! 서자 따위가 감히 형님의 자리를 넘보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거예요?”
“빌어먹을! 아버지가 노망나지만 않았으면 그딴 일도 없을 텐데.”
이준성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이한철 회장이 노망났다고 생각했다.
노망나지 않았다면 서자 따위를 후계자에 앉힐 일은 없었을 테니까.
“형님, 그렇게 회장님께 짜증을 내봐야 형님만 손해예요. 어차피 회장님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으실 거 같은데, 형님도 다른 선택을 하셔야죠.”
“뭔 선택? 임원들이랑 친해지는 거? 내가 해봤는데, 그놈들 존나게 튕기고 있어. 내 쪽으로 붙는 척하면서 박쥐처럼 뒤로 뺀다니까?”
“고림 그룹이랑은 어떻게 됐는데요? 거기 후계자랑 무슨 이야기 나누셨다면서요.”
“몰라. 그 새끼도 확답을 안 주니까, 짜증만 난다. 그냥 노인회 회장(대통령 장인)에게 몇 마디만 찔러주면 되는 건데, 그게 뭐 어렵다고.”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형님, 과감하게 저질러 보죠?”
“뭘 저지르자는 거야?”
“깡패를 동원해서 그놈을 처리하자는 겁니다.”
유준혁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준성이 코웃음 쳤다.
“내가 안 된다고 했지? 아버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깡패는 무슨! 그리고 그놈, 이제 경호원도 데리고 다녀!”
“어중이떠중이 경호원 몇 명 있다고 뭐 문제 될 게 있겠어요? 칼 잘 쓰는 주먹들을 동원하면 되죠!”
“아버지는?”
“이한성, 그놈만 정리한다면 회장님도 어차피 형님 말고 다른 대안은 없지 않습니까. 형님 동생도 독립했다면서요.”
“흠.”
이준성의 눈빛에 살기가 떠올랐다.
원래도 자제력이 부족했던 그지만, 요즘 들어 특히 자제력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준혁의 제안이 솔깃하게 느껴졌다.
“서용석 알죠? 야망파 두목?”
“알지, 서 사장. 우리에게 물건을 구해 주는 것도 서 사장이잖아.”
서용석은 강남 일대에서 활동하는 조직 폭력배였다.
휘하에 있는 부하만 백 명이 넘었고, 마약까지 다루면서 전국구 조폭이 되어가고 있었다.
“야망파가 꽤 잘 나가잖아요. 주먹 잘 쓰는 놈들도 많고. 그러니, 그쪽에다 의뢰해 보죠?”
“서 사장을 믿을 수 있겠어? 나중에 뒤통수치면 어쩌려고?”
“무려 혜성 그룹의 수장이 되실 형님에게 설마 수작을 부리려고요. 정 뭐하면 나중에 일 끝내고 토사구팽해도 되고요.”
이준성은 세상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그러자 옆에서 민병호가 부추겼다.
“형님, 형님이 잘 돼야 우리도 잘 됩니다. 일이 잘못돼도 함께하고, 잘 돼도 함께하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크으. 이 자식, 말도 예쁘게 하는군.”
민병호의 말을 들으니 이준성의 고민도 깊어졌다.
쾅!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경찰 제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이준성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네, 네놈들 뭐야?”
이준성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경찰 따위가 감히 이렇게 강압적으로 대하다니.
“이 자식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그가 소리쳤지만, 경찰들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준성의 소지품을 뒤지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 주사기를 발견했습니다!”
“앰풀도 있습니다. 딱 봐도 마약인 게 확실해 보입니다!”
‘마약’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이준성은 눈을 부릅떴다.
‘저걸 어떻게 찾았지? 아니, 그보다 경찰이 내 히로뽕을 발견했는데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또 입건되는 건가?’
빼도 박도 못하게 현행범으로 걸려버렸다.
이제 경찰서로 끌려가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빌어먹을! 하필 지금 단속에 걸릴 게 뭐냔 말이다!’
* * *
<기업인, 재벌 2세, 폭력배 ‘히로뽕 파티’.>
<‘놀고먹다 지쳐서 마약까지…….’ 재벌 2세들의 일탈.>
1983년 7월 15일.
혜성 그룹의 장남, 이준성이 청담동 룸살롱 하이츠에서 히로뽕을 투약하다 적발되었다.
언론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혜성 그룹은 경제계 사이에서 뜨거운 소재가 되었다.
‘형님도 이제 끝이군.’
이재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악하게 발악하더니,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물론 재벌 2세인 이준성이 겨우 마약 복용으로 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주 정도 조사받고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겠지.
하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한성이 그룹 부회장이란 직함을 달고서 혜성 건설 본사로 출근할 날이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사흘 뒤에 한성은 공식적으로 혜성 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순간에 이준성은 향정신성 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는 신세다.
어떻게 보면 한성에게 대항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놓치게 된 셈이었다.
‘그나저나 이게 과연 우연일까?’
이재성은 턱 끝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이준성이 막 나가는 사람이라지만, 대놓고 마약을 투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잘 감춘 채로 몰래몰래 투약했겠지.
‘애초에 하이츠라면 고객의 비밀을 잘 보호해주기로 유명한 곳인데.’
괜히 상류층이 자주 찾는 곳이 아니었다.
연예인을 불러와서 술판을 벌이든, 아니면 단체로 마약 파티를 하든, 비밀을 잘 지켜줘서 상류층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런데 경찰들의 갑작스러운 단속을 막지 못했다고?
‘설마 이한성이 손을 쓴 건가.’
이재성은 섬뜩함을 느꼈다.
허무맹랑한 추측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이 추측이 사실일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가 알고 있는 한성이라면 이 정도의 공작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재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서운 놈이었군. 일찍이 항복한 게 잘한 선택이었어.’
만약 그가 이준성처럼 끝까지 저항했다면?
이준성이야 위협이 안 돼서 이 정도지, 이재성은 절대 이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처가와 외가가 모두 한성에 의해 몰락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도 그놈 앞에서는 계속 넙죽 엎드리는 게 좋겠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요즘 한성의 활약을 보면 자존심 상해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한성은 이한철 회장의 젊은 시절보다 훨씬 더 대단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 * *
1983년 7월 18일.
마침내 후계자란 신분을 달고서 혜성 건설 본사에 입성했다.
찰칵! 찰칵!
차에서 내리니 어디선가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기자가 와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진 소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진보다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부회장쯤 되니 의전의 규모가 확 달라지네.’
심지어 임원들도 보였다.
전무까지는 아니어도 상무와 이사 정도는 마중을 나와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 의전도 이제는 당연한 건가.’
나는 단순한 부회장이 아니었다.
후계자도 후계자지만, 정책본부장으로서 그룹의 정책을 총괄하는 직무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정책본부장은 산하 계열사의 인사와 경영, 정책 모두에 관여하는 게 가능했다.
회장이 직접 관리하는 혜성 건설을 제외하면, 계열사 전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상 그룹의 이인자라는 의미이니, 의전 등급도 그에 걸맞게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부회장님이 집무를 보실 집무실입니다.”
“회장님이 쓰시는 집무실보다 더 화려한 거 같은데요?”
“회장님께서 직접 신경 써서 인테리어 하셨습니다.”
부회장실도 내가 쓰던 부대표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 과장하면 이곳에서 축구 경기를 해도 될 거 같았다.
‘심지어 층 전체가 내 직속이네.’
감사실부터 경영지원실, 인사 총무실, 비서실 등등.
완전히 내 영역이었다.
집무실 위치부터가 후계자에 걸맞았다.
“겨우 1년 만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역시 부회장님을 따르길 잘한 거 같습니다. 물론 제가 원해서 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예. 동기들보다 훨씬 상전이 돼서 왔으니, 왕의 귀환을 한 기분입니다.”
“저는 뭐, 그룹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부회장님의 비서가 된 거라 별다른 느낌은 없습니다.”
신은규와 유동연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의 비서가 된 지 어언 1년.
그동안 나는 상무에서 전무로, 전무에서 부대표, 그리고 마침내 그룹의 부회장으로까지 올랐다.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사장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거면 애초에 혜성 그룹에 입사하지도 않았겠지.’
이십 대의 나이로 재벌 그룹의 이인자 자리에 올랐으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만족했을 것이다.
설령 나와 같은 재벌 2세의 신분이라 해도 만세 삼창을 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혜성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 대기업을 일구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겨우 부회장이 되었다고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이소희 과장님. 인사 총무실에 연락해서 3분기 승진 계획 사전 보고하라고 하세요.”
“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유동연 과장님은 감사실에 혜성 유통과 혜성 모직, 혜성 개발의 감사 내역을 전부 가져오라고 전하세요.”
“예.”
“신은규 과장님은 면담 스케줄 좀 짜주세요. 혜성 유통의 임원 전부와 하루에 한 명씩 면담할 겁니다.”
“대표이사도 부릅니까?”
“가장 마지막 날에 부르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회장이 되자마자 나는 빠르게 업무에 적응해갔다.
1년 동안 몇 번의 승진을 거듭해서 그런지,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속도였다.
‘이재 전기와도 이야기가 잘 통하고 있으니, 컴퓨터 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문제 될 게 없겠어.’
나는 그동안 세웠던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혜성 유통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가 하면, 전자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컴퓨터 제작 회사에 대한 인수 절차를 밟기도 했다.
‘이준성이 없어서 그런가? 모든 일이 순조롭군.’
모든 사업이 이제 막 발을 뗐을 뿐이지만, 그래도 상황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칭찬에 인색한 노사조차도 순조로운 출발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 * *
“부회장이 되었으니 풀어질 법도 한데, 어째 너는 더 지독해진 거 같구나.”
“제가 겨우 부회장이 되었다고 풀어질 놈이었다면, 회장님께서 저를 이 자리에 앉히지도 않았겠지요.”
한창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이한철 회장이 불쑥 찾아왔다.
같은 빌딩에서 일하니 이게 또 단점인 거 같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룹의 핵심부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재계 인사들이 너를 많이 궁금해하는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얼굴을 끄덕였다.
재벌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현듯 나타나 혜성의 후계자 자리를 꿰찬 인물일 테니 말이다.
“해서, 자리를 마련해볼까 한다. 그 사람들에게도 네가 혜성의 후계자란 사실도 알릴 필요도 있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자리였다.
나를 서자라고 무시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혜성 가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이준성 때문에 혜성 그룹이 화제의 중심이 된 만큼, 지금 얼굴을 공개하면 얻을 게 많을 거 같았다.
“그리고 이건 절대 강요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데, 혹시 결혼에 관심이 있으면 언제든 말을 하거라. 내가 적당한 신붓감을 찾아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