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우선 백화점부터
“너도 알고 하는 말이겠지만, 미래 그룹까지 전자 산업에 진출한 상황이다. 그 말은 즉, 재계 1위부터 재계 4위까지의 기업 전부가 전자 산업에 진출해있다는 의미지. 그런데도 전자 산업에 진출하겠다는 거냐?”
그의 말처럼, 올해 미래 전자까지 합류해서 빅4의 대기업들이 모두 전자 시장에 진출하였다.
전자는커녕 제대로 된 제조 회사도 갖추지 못한 혜성 그룹이 전자 제품으로 파고들 여지는 없어 보였다.
‘노사도 말리셨지. 지금 시점에 전자 회사를 차릴 필요가 뭐 있냐면서 말이야.’
물론 노사도 언젠가 전자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갖고 있었다.
전자는 21세기에 핵심이 되는 산업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노사는 회사를 직접 차릴 필요 없이, 나중에 IMF가 오면 정우 전자나 미래 전자 둘 중 하나를 인수하라고 하였다.
그동안은 투자에 주력하고 1989년쯤부터 해운과 조선소 쪽으로만 진출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노사의 계획이 옳을 순 있겠지. 그런데 나비효과가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자 산업을 포기한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수도 있어.’
역사가 예상치 못하게 바뀐다면?
1998년에 있을 빅딜 정책에서 미래 전자가 역으로 합병당한다면 어떨까.
십몇 년 기다린 게 헛것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전자 산업에 진출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물론 저도 진출 시기가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냉장고나 TV 쪽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 왜 전자로 가야 한다는 거냐?”
“전자 쪽에 아직 어떤 기업도 주류가 되지 못한 시장이 있지 않습니까?”
이한철 회장은 내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
“반도체입니다.”
“반도체라. 일성 회장이 도쿄에서 선언했던 초고밀도집적회로를 말하는 건가.”
“예. 일성 전자 말고는 아직 본격적으로 진출한 기업이 없죠. 그야말로 신생 산업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물론 미래 그룹도 진출했지만, 그들도 아직 반도체 시장에서는 혜성 그룹과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시장의 주류가 될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일성 전자를 꺾으려면 엄청난 자본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지.’
이미 한참을 앞서나가고 있는 일성 전자였다.
올해 말에는 64K D램을 개발해내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세계가 놀랄 업적을 이루어낸 셈이었다.
이런 일성 전자가 경쟁자였으니, 천문학적인 자본 투자가 이루어져야만 했다.
“다른 기업들은 일성 회장의 도전을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난하던데, 너는 생각이 다른가 보구나.”
“예.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길이길이 남을 업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업적이라. 그 정도란 말이냐.”
이한철 회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일성 전자의 반도체 개발을 내가 높이 평가하니 놀랍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컴퓨터도 만들어야 합니다.”
“컴퓨터? 우리가 만들기에는 너무 첨단 제품 아닌가? 미국에서도 컴퓨터를 만들 줄 아는 회사가 몇 없을 텐데.”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렵다는 거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세운상가라고 아십니까? 종로3가동에 위치한 상가인데, 미국의 실리콘밸리나 도쿄의 아키하바라의 한국판이라고 불리는 컴퓨터 시장입니다.”
“들어는 봤다. 작년에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다지?”
“그곳에 인재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흔히들, 공학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이곳에서 컴퓨터 사업을 하고 있지요. 기술이 부족하다면 이들을 영입하면 될 거 같습니다.”
실제로 세운상가에는 ㅁㅁ전자라는 이름을 달고서 컴퓨터를 만드는 중소기업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만드는 컴퓨터는 여기저기서 부품을 모아 만든 조립식 컴퓨터였지만, 우리도 시작은 간단하게 조립식 컴퓨터로 해도 된다.
그나마 개발이 쉬운 모니터만 우리 기술력으로 만들고 말이다.
그러다가 자본이 계속 투입되면 컴퓨터 본체도 척척 개발할 터.
‘그렇게 기술을 발전시키다 보면 언젠가 휴대폰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내 최종 목표가 휴대폰, 그중에서 노사가 말씀하신 스마트폰이란 것이기에 지금부터 준비해야만 했다.
“컴퓨터와 반도체라. 참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구나. 솔직히 나는 네가 말한 것들에 대해 확신이 안 선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보여줄 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네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는 않으마.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부회장이 되면 그때 한번 시작해 봐라.”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다만,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는 없을 겁니다.”
일성 전자처럼 기반 기술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맨주먹에서 시작해야 했는데, 성과를 내려면 1~2년으로도 부족할 게 분명했다.
아무리 못해도 5년 정도는 필요할 거 같았다.
흑자 전환을 하려면 그보다 한참은 더 있어야 할 것이고 말이다.
“나도 안다. 아무렴 첨단 산업인데, 하루 이틀 만에 결과가 나올 리는 없겠지. 몇 년이고 기다려 줄 테니 너는 걱정하지 말고 네가 뜻하는 대로 해봐.”
“감사합니다.”
“대신, 다른 사업에서 성과를 냈으면 좋겠다.”
“다른 사업이라면?”
“모직이든, 개발이든, 아니면 유통이든 간에. 내가 건설을 맡을 테니, 너는 다른 계열사들을 관리해서 성과를 내봐. 그렇게 성과를 내야 건설의 임원들도 너를 지지하게 될 거다.”
혜성 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관리하라는 뜻인가?
‘나쁘지 않군.’
안 그래도 부회장이 되고서 권한이 어정쩡하면 어쩔지 걱정을 많이 했었다.
후계자가 됐으니 위상은 더 커졌어도, 막상 권한이란 게 없으면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열사들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많은 것을 시도해봄 직했다.
‘유통이 신경 쓰였는데 마침 잘 됐어. 혜성 개발과 연계해서 백화점을 세우고 그 안에 혜성 모직의 브랜드 상품으로 채우면 되겠는데?’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한철 회장이 누군가를 호출하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인상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중년 사내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게, 안 사장. 여기는 내 아들이네.”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얼떨결에 인사하니, 그가 탐색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 인사를 받았다.
“혜성 건설의 안지호 사장입니다.”
“안 사장이 누군지는 알고 있지? 내가 처음 혜성 건설을 세웠을 때, 미래 건설에서 어렵게 모셔온 인재야.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르는 게 없어. 그 외에도 정말 대단한 능력들을 갖추고 있지.”
“저도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서로 친해졌으면 하고 안 사장을 불렀네. 앞으로 그룹을 발전시키려면 두 사람의 화합은 필수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썩 나쁜 상황인 것은 아니었다.
혜성 건설의 임원, 그것도 사장쯤 되는 인사와 친분이 생긴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안 사장. 자네는 우리 한성이를 어떻게 평가하나?”
“아직 아는 것이 없어서 뭐라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가?”
“물론 다른 계열사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직접 본 것만 믿는 사람입니다. 실질적인 능력이 어떤지는 두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말하는 투가 이훈 대표보다 까다롭게 느껴졌다.
‘뭐가 됐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건 확실하군.’
눈빛부터가 그랬다.
적개심까지는 아니어도, 눈빛이 차갑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친해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았다.
철컥!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저 더러운 서자 놈을 왜 회사에 데려온 겁니까!”
사내는 다름 아닌, 이준성이었다.
“이놈의 자식이 진짜! 여기가 어디라고! 썩 꺼지지 못해?”
“안지호 사장이랑은 왜 인사시키는 겁니까? 회사가 무슨 맞선 장소입니까!”
“나가라는 말 안 들려?”
“저는 절대 저놈을 후계자로 인정 못 합니다! 혜성 그룹의 후계자는 저의 자리란 말입니다!”
이준성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실소를 지었다.
이재성에게 대충 듣기는 했지만, 설마 회사에서도 이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다.
‘저런 놈을 아직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할 때, 진봉현이 나타나 이준성의 팔을 붙잡았다.
“전무님.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진 실장은 빠져 있어!”
“죄송하지만, 따라오셔야겠습니다.”
“이익! 비키라니까!”
결국 이준성은 진봉현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게 됐다.
“한심한 놈 같으니.”
이한철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안지호에게 불쑥 물었다.
“안 사장! 저놈과 비교하면 어떤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성이, 저놈과 비교하면 어떠냐고.”
“……능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연히 여기 계신 이한성 부대표님이 훨씬 나으신 거 같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별로 기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예의상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였다.
“자네 생각도 그렇지? 그러면 안 사장, 우리 한성이를 잘 부탁하네.”
“…….”
뜬금없이 잘 부탁한다고 하니, 안지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이한철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내 결정에 불만을 품고 있는 건가?”
“불만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물론 자네의 심정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네. 한성이가 못 미덥겠지. 나이도 어리고, 건설 쪽으로는 아예 경험이 없으니 말일세.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아두게. 우리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준성이 저놈을 후계자로 세울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이한철 회장의 말에 안지호의 눈빛도 조금은 달라진 느낌이었다.
이준성의 만행을 바로 눈앞에서 봤으니, 더 비교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한철 회장은 안지호 말고 다른 임원들도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반응은 안지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째 분위기가, 저를 적대하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거 같습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후계자로 확정 났고, 언젠가 회장이 될 게 분명한데도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혜성 개발의 임원들이 보여주었던 반응과는 전혀 달라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원래 혜성 건설 사람들의 자존심은 센 편이야. 임원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이래서야 제가 회장이 되고도 말을 잘 따라줄지가 의문입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저를 후계자로 인정하기는 할까요?”
(인정하게 만들어야지.)
“어떻게 말입니까?”
(전에도 말했듯, 이준성 그놈을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낙오시키면 돼. 다른 대안이랄 게 아예 존재하지 않게 만들면 된다는 거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거 같았다.
‘빨리 기회가 왔으면 좋겠군. 이준성 그놈을 약쟁이로 만들 기회가 말이야.’
아까 이준성이 하던 행동을 보면 기회가 곧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이미 약에 손을 댔을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후계자로서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된다.)
그야 그렇다.
절대적인 지지.
회장이 되고서 수많은 사업을 하려면, 그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하였다.
지금 상태로 회장이 된다면 그야말로 도장 찍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우선 백화점과 슈퍼마켓을 비롯한 유통 사업부터 성공시켜야겠군.’
그냥 성공시키는 거로 만족해선 안 된다.
크나큰 성공을 거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