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라면 전자 산업에 진출할 거다
이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뜸을 들였다.
지분을 내주기가 싫은 것이리라.
‘어디서 수작을 부리려고.’
독립할 테니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혜성 그룹의 지분을 포기하지 않는다니.
나는 결코 호구가 아니었다.
이재성이 뒤에서 수작을 부리게 나둘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10억. 현금으로 10억을 줄게.”
“……!”
내 말에 이재성이 눈을 부릅떴다.
10억이란 말에 놀란 모양이었다.
“계약만 하면 그 즉시 완납해 주지.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정말 10억을 준다고? 그것도 한 번에? 황인범 회장한테 빌리는 건가?”
“지창훈 대표에게 들었으면 내 자금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을 텐데? 설마 내가 10억도 없어서 돈을 빌릴 거라고 생각해?”
“자산이 백억이란 소문, 진짜였나 보군.”
이재성은 혀를 내둘렀다.
현금 자산이라고는 1억에 불과한 이재성이었으니, 내 자금력이 그저 놀랍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쩔 거야?”
“10억을 준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좋아.”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10억이 큰돈이긴 해도, 이재성을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만 있다면 그리 비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준성이 형님은 어떻게 할 거야?”
“최후의 통첩을 거절했으니, 철저하게 짓밟아줘야겠지.”
이준성에게도 이재성에게 했던 제안과 똑같은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준성은 아예 욕지거리를 날리며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 뒤로도 계속 연락이 없는 걸 보면 후계 경쟁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였다.
“사실 준성이 형님이 나보고 힘을 합치자는 말도 했었어.”
“그래?”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었는데, 뭔가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는 거 같긴 하더라고.”
“본격적으로? 이준성이 지금 상황에서 할 만한 게 뭐가 있나?”
“건설의 임원들과 교류를 많이 하고 있어. 건설의 임원 중에서 너를 지지하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편 가르기를 하는 중이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이게 의외로 잘 먹히고 있어. 안 그래도 혜성 건설의 임원들은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후계자를 결정한 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거든. 네 나이가 너무 어린 것도 이유이고 말이야.”
회장이 결정했으면 그냥 잠자코 따를 것이지…….
물론 속으로만 하는 생각이었다.
건설의 임원들이라면 불만을 가질 법도 했다.
그룹 중역인데도 후계자 결정이라는, 가장 중요한 결정에서 배제된 셈이니까.
“그리고 다른 재벌가와도 자주 만나고 다니는 모양이야. 우리와 같은 재벌 2세들과 말이지.”
“거기서도 내 뒷담을 깠겠네?”
“어. 네 출신 성분과 나이 같은 것을 거론하면서 뒷담 하더라고. 어린놈이 성격까지 더럽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하는 행동이, 다른 재벌가를 끌어들이려는 거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될 거 같으면 포기할 줄 알아야지, 추잡하게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가만둬서는 안 되겠어.’
원래도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준성이 하는 행동을 보니, 더욱더 철저하게 짓밟아줘야 할 거 같았다.
“다른 재벌들은 이준성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어?”
“시큰둥했지. 근데, 고림 그룹에서 관심 있어 하던데?”
“고림 그룹?”
“너도 알다시피 고림이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잖아. 그래서 그런지, 준성이 형님을 이용해서 뭔가 수를 쓰려는 거 같기도 해.”
(결국 이번에도 고림 그룹이 우리 그룹에 마수를 뻗치려는 모양이구나.)
노사는 은은한 노기를 드러내며 그 같이 말했다.
노사의 응징 대상 1순위가 바로 고림 그룹이었다. 혜성 그룹의 몰락에 일조한 그룹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 고림 그룹과 혜성 그룹은 끈끈한 동업 관계였다.
하지만 한번 사이가 틀어지고서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원수 관계가 되었는데, 고림 그룹은 정당하게 사업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닌, 권력자를 등에 업고서 혜성 그룹을 무너뜨렸다.
‘그룹이 자금난에 흔들리는 상태도 아닌데, 우리 그룹을 노리다니. 나를 어지간히 우습게 보고 있는 모양이군.’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이재성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 사실을 알려줬지?”
“준성이 형님이 무슨 짓을 해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알거든. 그러니 이준성 형님을 편드느니, 차기 회장에게 잘 보이는 게 낫지 않겠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악한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듯한 판단이었다.
“앞으로도 좋은 정보 있으면 가져와 줘.”
“노력해 볼게.”
물러나는 이재성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처세술 하나는 쓸 만해 보인다고 말이다.
(고림 그룹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알아보마.)
“만약 고림 그룹이 진짜 우리 그룹을 노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당연히 피의 응징을 해야지. 그룹 전체를 해체하는 수준으로 만들고 말 거다.)
“그렇군요.”
모처럼 노사가 감정을 드러냈다.
역시 냉철한 성격의 노사도 ‘복수’에 대해서는 민감한 구석이 있는 거 같았다.
(설마 너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고림 그룹이 우리를 먼저 공격하려고 하는데, 어찌 다른 생각을 품겠습니까? 당연히 응징해야죠.”
대통령이나 다른 권력자들에게 복수하는 건 조금 꺼림칙하긴 했다.
하지만 고림 그룹은 노사의 원수이기 이전에 나의 원수, 그리고 혜성의 원수였다.
고림 그룹에 복수하는 것은 나 역시 찬성이었다.
“그런데 이준성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놈을 약쟁이로 만드는 거다.)
“약쟁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원래도 그룹이 무너지고 그놈은 히로뽕 중독자가 돼. 그래서 몰락한 재벌 2세라고 언론에 자주 보도됐었지.)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다를 게 뭐가 있나. 후계자 자리를 빼앗겼으니, 그놈의 상실감은 그룹이 무너졌을 때만큼 클 거야. 기회만 마련해준다면 언제든 마약에 손을 델 거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저희가 마련해 주자고요?”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내가 그놈이 자주 노는 장소를 알아 올 테니, 너는 그 정보를 다른 사람 시켜서 히로뽕 밀매 조직에 전달해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그 조직이 알아서 이준성은 약쟁이로 만들 거다. 대량으로 밀매할 수 없는 환경에서 상류층만큼 귀중한 소비자는 없으니 말이야.)
상대를 약쟁이로 만들자니.
조금 섬뜩하게 느껴지는 모략이었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확실하게 후계 경쟁에서 배제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약쟁이로 만든 다음에 진영석 지검장에게 알려주면, 이준성의 인생도 그날로 끝이겠어.’
나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은 방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나락으로 만든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아닙니다.”
(나약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접어둬라. 어차피 네가 아니더라도 약쟁이가 될 놈이야. 그리고 그놈은 기회만 있으면 너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해. 네가 만만치 않으니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거뿐이야.)
맞는 말이다.
이준성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말의 관용도 사치에 불과했다.
‘그래. 철저하게 부숴버리자.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 없던 놈이잖아?’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부술 거면 확실하게 부수자고 말이다.
* * *
회사에 출근하니 이한철 회장이 호출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심지어 혜성 건설 본사로 호출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분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어쩌면, 후계자가 되었으니 혜성 건설의 임직원들을 소개해주기 위해 부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건 서둘러 움직였다.
“참 크고 웅장하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일할 맛이 나겠어.”
전에 창업 기념일 날 왔을 때도 봤었지만, 혜성 건설 본사는 정말 컸다.
혜성 건설이 괜히 혜성 그룹의 얼굴이라 불리는 게 아닌 거 같았다.
복도를 지나치는 직원들의 얼굴에도 자부심이 엿보였다.
‘작년 매출이 6천억이었나.’
연 매출도 엄청났다.
모든 계열사의 매출을 합해도 혜성 건설 하나만 못할 정도였다.
이러니 혜성 모직에서 아무리 성과를 내도 주목을 못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 된다니. 생각만 해도 황홀하군.’
몇 년 전에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공장주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재계 10대 대기업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한철 회장의 건강을 생각하면 이곳의 주인이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으리라.
“어서 오십시오. 이한성 부대표님.”
“비서실장님께서 직접 마중을 나와 주셨습니까.”
“후계자가 되실 분인데, 제가 영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봉현의 말에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진봉현이 싱긋 웃고는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회장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회사로 부르셨답니까?”
“혜성 건설의 임원진 분들을 소개해 주려고 부르신 거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하기야, 혜성 건설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임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혜성 건설의 임원들은 단순한 사내이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회사의 지분을 가진 주주도 있었다.
창업 공신들도 대부분 혜성 건설에 적을 두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후계자가 되려면 이들에게서 최소한의 인정은 받아내야만 했다.
‘뭐 이준성만 후계 경쟁에서 배제하면 자연히 나를 지지할 수밖에 없겠지만.’
사실 그래서 조금 소홀히 하기도 했다.
이재성은 이미 낙오됐고 이준성도 곧 낙오시킬 예정이었으니.
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왔는데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똑똑!
“회장님, 도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회장실은 의외로 깔끔했다.
값비싼 기구들로 도배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꼭 필요한 기구들만 차분하게 정리된 느낌이었다.
“어서 오거라.”
“예.”
“비서실장은 이만 일 보시게.”
진봉현이 물러나자, 이한철 회장이 물었다.
“재성이의 지분을 매입했다고?”
“후환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래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려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저 재성이의 지분이 너에게 갔다는 사실밖에 모르거든.”
“혜성 건설과 혜성 개발의 지분 전체를 10억에 샀습니다. 덤으로 그 사람이 회사를 차리면 외장 공사를 3년간 독점적으로 공급해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회장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이밖에 문제가 생길 시에 재시공 또는 추가 보완 시공한다는 세부적인 조건도 있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약조했다면 허락 못 해줄 것도 없지. 어차피 너는 회장이 될 몸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사람이라…… 재성이를 너무 남처럼 부르는 거 아닌가?”
“형이라 부르기는 어색한 사이이지 않습니까.”
“흠…….”
이한철 회장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형제가 서로를 남처럼 대하는데 아버지로서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넘어갔다.
“재성이는 거래에 만족하던가?”
“글쎄요. 그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최선의 선택이라…….”
“최악의 선택이 뭔지는 곧 알게 될 겁니다.”
“설마 준성이를 말하는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러자 이한철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좋은데 피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기업인이지, 깡패는 아니니 말이야.”
“저도 피를 볼 생각은 없습니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잔혹한 성정으로 보이나?
뭐 지창훈이라던가, 강성호라던가 내가 적들에 한해서 단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몇 가지 이야기할 게 있어서 불렀다. 덤으로 혜성 건설의 임원들도 소개해 주고 말이다.”
“이야기라면?”
“다음 달에 너를 부회장으로 임명할 생각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무덤덤하게 반응하였다.
하지만 속으론 꽤 놀랐다.
생각보다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한철 회장은 나의 무덤덤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차기 회장인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너는 혜성 그룹의 새로운 사업으로 무엇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뜬금없이 차세대 먹거리 사업에 관해 물으니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내 안목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검증했을 텐데,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장희자 어음 사기 사건도 예측했고, 목동의 땅값이 올라갈 것도 예측했다.
사업가로서의 안목은 오히려 내가 이한철 회장보다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나는 정말 순수하게 너의 생각이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저라면 전자 산업에 진출할 겁니다.”
“전자 산업?”
이한철 회장이 의외라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