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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44화 (44/300)

44화 얼마면 돼?

“오셨습니까. 대표님.”

이훈은 자신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한성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뭔가 트집을 잡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한성은 한결같이 예의가 발랐다.

더군다나 워낙에 일을 잘해서 업무적인 부분도 트집을 잡을 게 거의 없었다.

결국 이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성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모두, 앉지.”

“예.”

그가 자리에 앉으며 그리 말하자 한성이 즉각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다른 임원들은 한성의 눈치를 살피며 멀뚱히 서 있었다.

한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자리에 앉는 임원들이었다.

‘쯧.’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대표이사인 그보다, 부대표인 한성의 눈치를 살핀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성은 무려 그룹의 후계자가 될 몸인데 말이다.

“시작하지.”

불편한 표정을 짓고서 회의를 시작하려는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자네는 또 왜 이렇게 늦었나?”

“하하,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뒤늦게 회의실에 도착한 사내는 다름 아닌, 혜성 개발의 새로운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차진만이었다.

이훈은 차진만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죄송하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애초에 죄송했으면, 저렇게 자주 지각하지도 않았겠지.’

한두 번 늦은 것이 아니었다.

실세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 난 듯, 항상 5분씩 늦게 도착했다.

심할 때는 10분 이상 늦는 경우도 허다했다.

‘시대가 달라지긴 했어.’

예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했을 것이다.

이훈은 원칙주의자로서 시간에도 엄격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질책을 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굳이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다.

“차진만 상무님.”

“예, 부대표님.”

“요즘 태도가 많이 불성실하십니다.”

이훈이 화를 삭이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하게 한성이 차진만을 질책하였다.

“예, 예?”

“지각도 자주 하시고 근무 시간 때도 직원들에게 사적인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가령, 주식 시세를 보고 오라던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이훈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설마 한성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측근인 차진만을 질책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저한테 사과하지 마시고, 여기 계신 대표님께 사과하세요.”

“예,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진만의 사과를 받아주고는 한성의 옆모습을 다시 바라봤다.

‘확실히 이놈이 범상치 않기는 하단 말이지.’

얼굴만 보면 애송이가 분명했다.

40대와 50대의 임원들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더 어려 보였다.

그런데 하는 행동은 누구보다 노련하게 느껴졌다.

후계자로 확정 났고, 모두가 자신을 떠받드는데도 겸손하게 구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거 같았다.

‘이재성 그놈이었으면, 콧대를 세우며 오만방자하게 행동했을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범상치 않게 보였다.

인격과 능력 그리고 리더십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쩜 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 * *

나는 혜성 개발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달 안에 부회장으로 승진할 것이기에,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야 했다.

“조규원 이사. 여기는 회사 아닙니까?”

“회사 맞습니다.”

“그런데 왜 회사 업무에 집중하지 않고 주식 이야기만 그렇게 하는 겁니까? 우리가 증권 회사도 아닌데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회사를 떠나기 전에 가장 신경 쓴 것은 임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혜성 개발의 임원들, 그중에서 처음부터 내 라인을 탔던 차진만, 김태규, 조규원 이렇게 세 사람의 근무 태도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사실상 후계자로 확정되자, 뒷짐만 지고 다니면서 업무도 건성건성 처리했다.

강성호에게 나쁜 점만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날 잡고 훈계 타임을 가졌다.

다행히도 이들에게 내 말은 절대적인 위력을 가졌기에, 훈계 타임을 가진 다음 날부터는 기합이 바짝 들었다.

이훈 대표에게도 깍듯하게 대했고 말이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많이 좋아진 거 같아요. 뭐랄까. 정돈된 느낌?”

“아,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확실히, 부대표님께서 임원들의 기강을 잡으니, 조직 전체의 기강이 바로 잡히는 거 같습니다.”

“이훈 대표님도 뭔가 바뀌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깐깐하기만 했는데, 요즘은 웃는 일도 많아지신 거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부대표님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온화해지셨습니다.”

비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회사 분위기도 그렇고 이훈 대표도 그렇고 모든 게 긍정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았다.

‘내가 당장 이곳을 떠나도 문제 생길 일은 없겠어.’

그렇게 흡족한 마음을 하고서 퇴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오랜만에 종태 형과 술자리를 가졌다.

“네 소식은 들을 때마다 놀란다. 무슨 벌써 부대표야?”

종태 형은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운이 좋았지, 뭐.”

“혜성 모직에 소문 짝 퍼졌어. 너 이미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고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러자 종태 형이 깜짝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그 소문 진짜였어?”

“알고 있으면서 뭘 그래?”

“이렇게 삐까뻔쩍한 곳에서 술 마시자고 할 때,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 근데 와! 내 동생이 혜성 회장이 된다고?”

“내가 말 했잖아. 나만 따라오라고 말이야.”

“이 자식, 믿고 있었다고!”

종태 형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형은 어때? 사실상 형이 혜성 모직을 이끌고 있는데, 어려움은 없어?”

혜성 모직에는 사장도 있고 부사장도 있지만, 둘 다 회사 업무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장은 맨날 술만 마시고 다녔고, 부사장은 고위 공무원 출신으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알 생각도 없어 보였고.

그러니 현재의 혜성 모직은 사실상 종태 형이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로 온 부사장이 기강을 잡겠다며 잠시 나댄 적도 있는데, 네 소식이 들려오고 나서 그런 것도 없어졌어. 지금은 예전처럼 쥐 죽은 듯이 지내는 중이야.”

“그래?”

“직원들도 다행히 나를 잘 따라주고 있어. 너랑 나 사이를 아니까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부사장이나, 누가 엉뚱한 일 벌이면 나에게 알려줘. 내가 따끔하게 혼내줄 테니.”

“크으. 역시 후계자답네. 멋있다, 한성이.”

종태 형은 과장되게 말하며 술을 따라주었다.

“매출은 어때?”

“전에 보고했었던 거랑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네가 있을 때보다 평균 재고율이 높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백억은 돼. 남은 여름 시즌이나 가을 시즌을 생각하면 올해 3백억은 충분히 가능할걸?”

“잘 되고 있구나.”

“혜성 개발에서 직영점 싸게 해준 게 조금 영향이 있기도 했지.”

“그거야 혜성 개발에도 도움 되는 일이니까. 요즘은 쁘띠엘르나 원더우더가 입점하면 땅값이 올라간다는 말도 있잖아.”

실제로 최근 들어 건물주들이 자신의 빌딩에 쁘띠엘르나 원더우더를 입점하려고 혈안이었다.

쁘띠엘르의 경우 워낙 선호도가 높아서 보증금을 안 받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혜성 개발이 쁘띠엘르나 원더우더에게 임대료를 적게 받는 것도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아, 그리고 네가 이야기했던 일본 진출은 꽤 잘 되고 있어.”

“내가 전에 보고받았을 때는 매출이 별로라던데?”

“유행까지는 아니고 조금 관심을 끌고 있나 봐. 원더우더 디자인은 고급스러워서 그런지 유럽의 명품으로 생각하는 거 같기도 해.”

“가격은 얼마랬지?”

“우리 돈으로 3만 원이 넘어. 몇 배 비싸게 파는데도 잘 팔리더라고.”

“역시 돈이 많은 나라답네.”

노사에게 듣기로 1980년대가 일본의 마지막 전성기라고 한다.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는 시대라던가.

‘혜성 모직뿐만이 아니라, 혜성 개발도 일본에 진출하면 좋을 거 같기는 해. 내후년부터 일본 부동산이 미친 듯이 올라갈 거라고 하니 말이야.’

대출받기가 어렵고, 노사도 일본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문제이긴 했지만, 언젠가 일본에 진출할 생각이었다.

한국도 87년부터 경제가 크게 성장하니, 그때까지 2년 정도만 이익을 보고 빠진다면 거품이 꺼질 때 손해 입을 일도 없을 거 같았다.

* * *

평소처럼 업무를 보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내 외삼촌에게 했던 제안, 아직도 유효한가?”

“참 일찍도 찾아오셨네.”

이재성.

그는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아닌, 어딘가 위축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성 주택이란 곳에서 동성 기업의 지분을 매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을 들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

피식 웃었다.

역시 동성 기업을 압박한 게 정답이었던 듯싶다.

뭐 그래 봤자, 주식을 조금 매수한 게 전부였지만.

“그래서 결론은?”

“한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바로 후계 경쟁을 포기하지.”

“조건?”

그가 조건을 들먹이자, 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건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있다면, 감히 조건을 걸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일단 들어는 볼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너그럽게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

터무니없는 조건을 걸 경우, 분노의 응징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혜성을 나가면 회사를 하나 차릴 생각이다. 내가 아는 게 건설 쪽밖에 없어서, 건설로 갈 생각인데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혜성 아파트나 혜성 관련 빌딩의 외장과 도색 공사를 독점적으로 공급해 줘. 그게 내 조건이야.”

“외장 공사를 독점으로 공급해 달라? 지나친 요구를 하는 거 같은데.”

“그래 봤자, 전국에 있는 모든 공사를 다 합해도 몇억짜리에 불과해. 혜성 그룹 전체에 비하면 규모가 아주 작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건물 전체를 공사하는 것에 비하면 외장 공사는 푼돈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외장 공사는 건물 전체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공사였다.

그 상징성이 남다르다는 뜻.

‘아무나’에게 함부로 줄 공사는 아니었다.

“실력을 못 믿겠는데?”

“광영 기업에서 도와줄 거야. 혜성 개발에서 내 사람들을 몇 명 데려갈 거고.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어?”

나는 그 말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처가와는 화해했나 보네?”

“……장인어른이 나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단 사실을 알았거든.”

“그렇단 말이지?”

의외였다.

아무리 지창훈의 사정을 알았다 해도 이재성의 성격상 화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노사가 평가한 이재성은 꾀가 많은 인간이었다.

지금 내 앞에서 기죽은 얼굴을 하는 것도 연기일지 몰랐다.

그룹을 떠나겠다는 것도 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수작이 아닐까.

‘근데 솔직히 상관없지 않나? 이재성이 어떤 수작을 부리든, 나에겐 조금도 위협이 안 갈 거 같은데.’

나는 그 생각을 했지만,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좋아. 내 조건도 받아준다면, 그 정도 요구는 들어줄게.”

“네 조건이 뭔데?”

“돈을 투자해 줄 테니, 지분을 나눠줘.”

“……내가 세우려는 회사의 지분을 갖겠다는 거야?”

“어. 대략 20% 정도만 주면 돼. 그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나도 안심할 수 있지 않겠어?”

“…….”

이재성이 어떤 수작을 부리든, 그의 약점만 손에 넣고 있으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영 기업을 공격했을 때 깨달았던 것처럼, 지분만큼 확실한 약점은 또 없었다.

물론 이 정도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혜성 개발이랑 혜성 건설에 가지고 있는 지분도 모두 나한테 넘겨.”

“지분? 전에 외삼촌에게 이야기했을 때는 지분만큼은 지켜준다고 했을 텐데?”

“건설업에 온다는데 견제를 안 할 수는 없잖아? 물론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야. 혜성 개발의 지분이 4%고 혜성 건설이 1%지? 얼마 줄까? 회사 세우려면 돈 많이 필요하잖아.”

얼마면 돼?

나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이재성의 지분을 뺏어올 수만 있다면 몇억 정도야 아깝지도 않았다.

덤으로 그룹 내의 장악력도 더 높아질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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