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설마 그러려고
이준성은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재성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놈도 참 꼴이 우습게 됐어.”
“……왜 갑자기 시비야?”
“그렇게 자신감 넘치더니, 이한성 그놈에게 아주 된통 당했더라?”
“내 일은 신경 쓰지 말고 형은 형 일이나 잘해.”
“지창훈도 배신했다며? 어떻게 장인이 배신하냐?”
으드득!
이준성의 계속된 도발에 이재성은 이를 갈았다.
“형은 뭐 얼마나 잘 났다고 지랄이야? 형도 그놈한테 당한 건 똑같잖아.”
“크큭. 냉철한 척하더니, 몇 마디 했다고 욕까지 하네. 당한 게 크긴 큰가 봐?”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로 그 같이 도발했다.
한성이든, 이재성이든 그에게는 똑같은 경쟁자였으니, 둘이 피를 볼수록 그는 그저 즐겁게만 느껴졌다.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나를 도발하는 거야?”
“뭔 상황? 아, 설마 이한성 그놈이 치고 올라오는 게 무서워서 그러는 거냐?”
“됐다. 형이랑 뭔 이야기를 하겠어. 더 할 말 없으면 꺼져.”
“꺼지긴 뭘 꺼져. 아버지가 너만 부른 줄 알아? 근데, 아버지가 우릴 왜 불렀을 거 같아?”
“내가 어떻게 알아?”
“까칠하기는. 뭐, 아무튼 잘됐네. 이한성 그놈이 부대표가 된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는데, 아버지한테 한소리 좀 해야겠어.”
“그러던가.”
두 사람이 그렇게 형제애를 나누고 있을 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한철 회장이었다.
“너희를 부른 이유는 중히 할 말이 있어서다.”
“뭡니까? 그 할 말이라는 게?”
“내가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은 너희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정정하신데 왜 맨날 그러십니까?”
“맞습니다. 아버지는 천년만년 오래오래 사실 겁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 할 필요 없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내가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은 후계자를 논하기 위함이다.”
“……!”
“후계자요? 이렇게 갑자기?”
이한철 회장의 말에 두 사람 모두 크게 당황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극과 극이었다.
이재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불안해하였고 이준성은 기대감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룹에 큰 혼란이 올 거야.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후계자는 미리 정해 놓을 필요가 있다.”
“혹시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후계자가 접니까? 흐흐?”
“아니, 너는 아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이준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재성이, 너도 아니야.”
“……설마 그놈입니까? 이한성?”
“그래. 한성이는 그동안 좋은 성과를 만들어 냈고, 우리 그룹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희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쾅!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그놈은 서자입니다. 서자!”
“이준성! 내가 서자라고 부르지 말라 했거늘,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서자를 서자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이준성은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후계자 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하니, 그로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준성의 모습에 이한철 회장이 딱 잘라 말했다.
“됐다. 어차피 네가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후계자로 점찍었으면 그걸로 끝인 거다.”
“아버지! 다시 생각해 주세요! 그놈, 겨우 1년밖에 안 봤잖아요. 1년 가지고 후계자 자질이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내 나름대로 충분한 검증을 거쳤다. 한성이는 단순히 사업 감각만 좋을 뿐 아니라, 제왕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혜성 개발의 임원들이 이십 대에 불과한 한성이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네놈이 한성이보다 무엇을 더 잘하느냐! 장남으로 태어난 것 말고는 지금까지 이룬 게 뭐가 있느냔 말이다!”
“장남으로 태어났으면 된 거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멍청한 놈! 네가 그러니 안 되는 거야.”
이준성의 두 눈에 핏발이 서렸다.
입술도 바르르 떨고 있었는데, 그만큼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한철 회장은 그런 이준성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고서 말했다.
“올해 안에 부회장으로 임명해서 그룹의 후계자로 삼을 것이니, 너희들은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자중해라.”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못 한다? 정녕 나에게 반기를 들겠다는 거냐?”
“후계자 자리는 장남인 내 것이어야 합니다. 재성이도 아니고 서자에 불과한 이한성이라니! 임원들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쯧. 지금 너의 모습을 보니, 한성이를 후계자로 삼길 잘했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지는구나.”
이한철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해 줄 이야기는 끝났다. 너희들이 앞으로 한성이를 어떻게 대할지는 더 관여하지 않겠다. 그것도 너희의 몫이니까. 단, 내가 점찍은 후계자가 녹록한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가 떠나자 이준성은 분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이게 말이 돼? 노망나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서자 따위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냐는 말이다!”
“나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뭐?”
“감사실에서 왜 강성호 전무를 쳤겠어? 다 아버지의 지시가 있어서 그런 거지.”
“이 병신아. 그럼 알고도 조용히 있었던 거냐?”
“그러면? 아버지가 이미 후계자를 결정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이재성의 반응에 이준성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쳤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서자 놈에게 후계자 자리를 뺏길 거냐고!”
“나도 답답해. 근데 방법이 없잖아?”
“빌어먹을!”
“솔직히 무력을 써 볼까도 생각했었어. 내가 아는 주먹들 몇 동원해서 그놈을 협박하든 아니면 진짜 묻어 버리든! 둘 중 하나를 해보려고 했었지. 근데 그놈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 명동의 황 회장이 있어. 알잖아, 형도. 그 사람이 누군지?”
“황 회장? 그 노괴가 이한성의 뒤에 있다고?”
“그래. 혜성 개발에 돈을 빌려준 것도 황 회장이 이한성을 도운 거였어.”
경악스러운 이야기였다.
대기업 회장들도 어려워한다는 황인범 회장이 일개 재벌 2세를 비호하고 있다니.
그것도 서자에 불과한 한성을 말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이한성의 뒤에 황 회장이 있는 한, 조폭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이대로 포기하자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
이재성은 암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준성이 혀를 찼다.
“겁쟁이 같은 새끼. 나가 죽어라, 병신아.”
거칠게 말하는 이준성이었지만, 그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룹 전체에 절대적인 장악력을 행사하는 이한철 회장이 한성을 지지하는 한,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외부의 조력을 받는 수밖에 없겠군.’
그나마 외부, 다른 재벌이나 정부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실력이 꽤 늘었어. 끌끌!”
“그래도 여전히 황 회장님의 상대는 안 됩니다.”
“내가 바둑만 몇 년을 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나. 자네가 날 이기려면 백 년은 이르네.”
황 노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그 같이 말했다.
“언젠가 한 번은 이겨 보겠습니다.”
“날 이기려면 일단 나를 자주 찾아와야 하지 않겠어?”
“그건, 노력해 보겠습니다.”
“후계자가 되었으니, 바쁘다는 핑계로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혜성 그룹에 얼마를 빌려줬는데, 후계자도 모를까 봐? 끌끌! 그래도 자네가 혜성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앞으로 돈 떼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
‘지금 혜성 그룹의 부채액이 얼마였더라?’
황 노인에게 빌린 금액만 6백억이었다.
은행권에서 빌린 금액은 아마 수천억은 족히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혜성 건설의 부채액만 1조가 넘었으니까.
그룹의 전체 부채를 다 합치면 2조 이상일 수도 있었다.
‘회장이 되면 부채부터 없애야 할 텐데,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군.’
기업을 경영하면서 부채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정부에서는 부채를 최소화해야만 했다.
만약에 부채가 있는 상태로 정부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산업합리화’ 조치를 당해서 강제로 그룹이 해체될 것이니 말이다.
“왜 갑자기 말이 없나? 설마 내 돈을 떼먹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 좀 했습니다.”
“끌끌! 그나저나 자네도 참 대단하네. 이 회장, 내가 알기로 굉장히 깐깐한 거로 아는데 어떻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겐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하긴, 혜성 모직에서건, 혜성 개발에서건 자네의 활약이 눈부시긴 했지.”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이 회장이 여자 소개는 안 하던가?”
“예?”
“자네,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 이 회장이라면 당연히 자네의 혼사에 관여했을 거 같은데…….”
“결혼 상대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정하기로 했습니다.”
“호오? 이 회장이 그걸 용인했다고? 신기하군.”
황 노인은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결혼 상대를 내가 직접 정한다는 사실이 그에겐 놀랍게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언제쯤 혼인을 할 생각인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회장이 된 이후에 하는 게 좋을 걸세.”
“왜 그렇습니까?”
“후계자 나부랭이보다는 회장의 몸값이 훨씬 비싸지 않겠는가?”
몸값 운운하니 인륜의 중대사인 결혼이 마치 하나의 사업처럼 느껴졌다.
‘상류층에게는 결혼이 사업의 연장 선상이긴 하지. 가문의 이익이냐, 아니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니 말이야.’
쓴웃음이 나왔다.
나도 이익을 따져 가며 결혼 상대를 정해야 하는 것일까?
“회장님의 충고, 잘 새겨듣겠습니다.”
“아, 맞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군.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저를 부르신 이유가 따로 있으셨습니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네. 자네가 정부를 상대하는 일에 신경 쓰라고 조언하지 않았었나? 확실히 자네 말처럼 정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군.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해.”
“예. 장희자 사건도 그렇고, 지하경제가 계속 문제를 일으키니 한 번쯤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자네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꼼짝 없이 당하고 말았을 거야. 자네에게는 늘 감사한 마음뿐이네.”
“별거 아닙니다. 황 회장님께 도움이 되었다면 오히려 저도 기쁩니다.”
“그런데 자네도 조심해야 할 걸세.”
갑작스러운 황 노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자네의 주식 실력 때문인지, 아니면 자네가 혜성 개발의 부대표가 되어서인지는 나도 모르겠네만, 윗분들이 자네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네.”
“……!”
황 노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였다.
재계 10대 기업 중의 하나인 혜성 그룹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권력자들이 무관심하게 넘어갈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내가 자네에게 도움받은 것도 있고 해서, 어지간한 인사들의 외압은 다 막아 주겠네. 하지만, 대통령의 측근들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으니 자네가 잘 대비하게나.”
“……감사합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 노인이 도와준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았다.
‘설마 대통령의 측근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겠어?’
아직은 회장도 뭣도 아닌 나다.
내 자산도 개인으로선 많아 보여도 2백억에 불과한 만큼, 장·차관 급의 인사가 나에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