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지분에 부회장까지?
“차명계좌로 3억을 받았다며?”
“3억? 와, 많이도 해 먹었네.”
“그나저나 놀랐어. 아무리 비리가 밝혀졌다 해도 강성호 전무가 저런 꼴이 될 줄이야. 윗사람들이 비리 저지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말이지.”
“들어보니까, 이한성 전무가 감사실을 동원했다던데?”
“에이 설마?”
“그분이 아니면 누가 강성호 전무를 저런 꼴로 만들겠어?”
“하긴, 그건 그래. 실제로 혜성 모직에서도 최진수인지 누군지 날렸다고 들었어.”
“쉿, 쉿! 저기 이한성 전무님 오신다.”
복도를 지나니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성호의 실각에 대해 떠드는 것이다.
실세로 불렸던 강성호의 몰락은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임원들뿐만이 아니라 직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도 이러한데, 당사자가 받은 충격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군.’
나는 강성호의 최후를 구경하고자 경영 관리부로 왔다.
예상했던 대로 경영 관리부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전쟁이라도 터진 분위기였다.
‘얼굴색이 하나같이 어둡군. 뭐, 당연한 결과인가.’
경영 관리부 직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울상이었다.
비리에 연루되었거나,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자신들이 모시던 상관이 징계해고 당할 상황이니 울상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며 전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전무실은 훨씬 더 난장판이었다.
조사원들이 집중적으로 조사한 곳이라 그런 거 같았다.
“여긴 왜 왔지? 나를 놀리러 왔나?”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강성호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10년은 늙어 버린 모습이었다.
“마지막 경고를 하려고 왔습니다.”
“경고? 권력도 잃고 명예도 잃은 나에게 경고라고? 하!”
“당신이 모든 걸 잃었어도, 이재성의 외삼촌이란 사실은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즉, 너의 경고를 재성이에게 전하라는 뜻이로군.”
“이재성을 당신 꼴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 전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강성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풀며 중얼거리듯 내게 물었다.
“어떻게 감사실을 움직인 거지? 우리가 이훈 대표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아낸 거고?”
“처음부터 당신은 제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고? 그게 아니라 네 뒤에 회장님이 있었던 거겠지. 하아! 회장님이 후계자를 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다면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텐데······.”
한탄하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이한철 회장이 오래전부터 나를 후계자로 정해 놓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한철 회장의 도움을 받지 않은 나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마지막 경고를 전하라고 했지? 그래. 말해 봐라.”
“간단합니다. 이재성에게 후계 경쟁을 포기하라고 전하세요.”
“포기하라고? 뭐 차기 회장이 포기하라는데 계속 싸울 수는 없겠지. 그런데 포기하면? 포기하는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지?”
“대가요? 제가 대가를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지분이라도 지키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진 거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그룹에서 쫓겨날 것이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재성의 지분을 단 1%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지분이라 해도 괜히 신경 쓰였으니까.
하지만 이재성이 끝까지 발악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귀찮았다. 이준성이랑 힘을 합칠 수도 있었고.
그러니 관대한 제안을 해서라도 후계 경쟁을 포기하게 만들면 나로선 이득이었다.
물론 당사자 입장에서는 내 제안이 그리 관대하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계열사는커녕 임원직도 포기하라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경고한 대로 지분까지 잃고서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것보단 나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마. 네 말대로 경고는 재성이에게 전하도록 하지. 다만 재성이가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끝까지 저항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 대신 철저하게 짓밟힐 거라는 사실만 알아두시길.”
“…….”
“참고로 짓밟히는 것은 동성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동성 기업을 지키고 싶다면 최선을 다해 설득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다. 후계 경쟁을 포기하라고 최대한 설득해 보지.”
강성호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 강성호의 모습에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강성호에 이어 최인준까지 징계 해고를 당했다. 부대표였던 최인준 역시 비리가 상당했던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어부지리로 부대표에 취임하게 되었다.
혜성 개발에 들어오고 겨우 석 달 만의 일이었다.
‘이재성 이놈은 아직도 조용하군. 정말 끝까지 해 보자는 건가?’
처가는 배신했고 외가는 힘을 잃었다.
이제 이재성의 주변엔 사람이랄 게 없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저항하려는 건지, 나를 찾아오질 않았다.
‘이준성 그놈도 조용한데, 무슨 생각들인지 모르겠네.’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그룹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는 현실을 말이다.
하기야, 이한철 회장의 입에서 확실하게 후계자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준성은 특히나 현실 파악이 느린 놈이었고.
“유동연 대리. 현재 그룹의 여론은 어떻습니까?”
“워낙 능력이 출중하시고 회장님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부대표님을 지지하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예전처럼 서자라고 무시 받을 일은 없겠군요.”
“그럴 겁니다. 이제는 혜성 건설에서조차 부대표님의 이름 세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동연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혜성 모직과 혜성 개발은 물론이고, 나머지 계열사에서도 나에 대한 존재감이 상당해진 거 같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군. 혜성 개발이라는 주력 계열사에서 무려 부대표가 되었으니, 모두가 나를 주목할 수밖에.’
뚜쟁이들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만큼 나는 그룹 내외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부대표님. 회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회장님이요?”
신은규의 말에 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성이냐?
“예, 접니다.”
-저택으로 오거라. 중히 할 말이 있다.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 같이 대답했다.
‘드디어 확답을 주시려는 건가.’
실제로 나는 이한철 회장이 호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후계자 자리를 확정 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 * *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시군.’
이한철 회장의 얼굴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노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한철 회장의 건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내년쯤 쓰러져서는 사경을 헤매게 될 것이다.
‘과연 이번에는 어떨지…….’
그룹의 상황이 원 역사보다 훨씬 양호하니, 이번엔 다를 거 같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는데, 이한철 회장이 불쑥 물었다.
“부대표가 되었는데, 어려움은 없느냐?”
“임직원들이 저를 잘 따라줘서 어려울 건 크게 없습니다.”
내 말에 이한철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실권을 장악했다지?”
“그룹의 회장이 될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능력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동부터 시작해서, 참 대단하더구나. 솔직히 1년이란 시간 동안 뭘 보여 줄 수 있을까 걱정도 했었는데, 내 걱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이제 확신이 서셨습니까?”
나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확신이 섰냐는 질문.
그건 다름 아닌, 후계자 선정을 묻는 것이었다.
“확신은 목동 개발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들었다.”
“그렇습니까?”
“혜성 그룹의 차기 회장이 될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 말고는 없더구나.”
“당연히 그럴 겁니다.”
솔직하게 대답하니, 이한철 회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임원들 앞에서는 제법 겸손하게 군다던데, 내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그들은 남이고 회장님은 가족이지 않습니까.”
“……!”
이한철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내 입에서 가족이란 단어가 튀어나왔으니 놀랄 만도 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저는 당신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확실한 후계자가 되기 위해 내 나름대로 립서비스를 하는 것.
물론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다면 조금 더 마음이 열릴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언제쯤 저를 후계자로 선언하실 계획입니까?”
“너무 보채지 마라. 네가 보채지 않아도 곧, 공식 선언을 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후계자가 되는 건가?
나는 이한철 회장의 확답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두 놈이 어떻게 나올지, 그게 문제야.”
“두 놈이라면, 이재성과 이준성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그놈들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거든.”
그야 그럴 것이다.
다른 재벌이었으면 가문의 오점 취급받았을 서자에게 그룹을 뺏기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뭐든 해 보라고 하세요.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냐?”
“그들이 저를 두려워해야 할 일이지, 제가 두려워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알았다. 괜한 걱정은 접어두는 거로 하지.”
이한철 회장은 내 패기 넘치는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의 앞에서만큼은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정답인 듯싶었다.
“일단 혜성 모직의 지분부터 넘겨주마.”
“감사합니다.”
“나머지 지분도 순차적으로 정리해서 넘겨주겠다. 아마 올해 안에는 혜성 개발의 지분까지 넘겨줄 수 있을 거야.”
후계자가 되는 것을 넘어 지분까지 한 번에 넘겨받는다니.
다른 재벌 그룹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치 않았다.
권력은 부자 사이에서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이 있듯, 후계자에게 지분을 넘기는 걸 꺼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금 문제도 있었고 말이다.
‘이한철 회장도 본인의 건강 상태를 알고 있나 보네.’
이한철 회장이 나에게 지분을 넘기는 이유는 오직 하나.
본인의 건강 때문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바로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게끔 준비해 주는 것이다.
“혜성 개발의 지분까지 받은 뒤에는 그룹 부회장이 되어라.”
“좋습니다.”
지분도 주면서 부회장 자리까지?
이러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노사가 기뻐하시겠군.’
물론 나도 기뻤다.
혜성이라는 대기업의 수장이 될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 * *
“너무 급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이 우려스럽다는 얼굴로 이한철 회장에게 말했다.
“한성이는 이미 충분히 능력을 보여줬어. 그런데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있나?”
“물론 이한성 도련님의 능력은 저 역시 충분하게 입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룹에 입사한 지 1년밖에 안 지났는데 후계자로 정하는 건…….”
“봉현이. 내 건강 상태가 어떤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잖아.”
“…….”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한성이는 지금껏 잘해오지 않았나? 입사한 지 1년밖에 안 됐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1년밖에 안 돼서 그만한 일들을 한 걸세.”
이한철 회장은 그리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시간을 끌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아나?”
“글쎄요.”
“한성이가 나에게 시간제한을 줬네. 올해 안에 후계자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그룹을 떠난다고 하더군.”
“예? 도련님이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황당해하는 진봉현 비서실장의 얼굴을 보며 이한철 회장의 미소는 더욱더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