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후계자가 된 거나 다름없지
강성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야 할 사람은 열 명도 넘는데, 정작 그의 사무실에 모인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상무 한 명에, 이사 네 명이었다.
“정승호 상무는? 설마 정승호 상무도 안 오는 건가?”
“……예. 지창훈 대표를 들먹이면서 못 오겠다고 했습니다.”
배춘식 상무의 말에 강성호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광영 기업 대표, 지창훈!
강성호는 설마 이재성의 장인인 지창훈이 배신을 때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서자인 한성을 밀어준다니?
이건 이재성만 배신한 것이 아니라, 동성 기업까지 배신한 것과 다름없었다.
‘도대체 이한성 그놈이 뭐라고.’
차진만이 배신했을 때는 솔직히 위기감까지 느끼지는 않았었다.
어차피 차진만은 이재성의 파벌 안에서 존재감이 없는 편이었다.
발언권도 그리 크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니 차진만이 배신했을 때는 오히려 빈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지창훈의 배신은 달랐다.
후계 경쟁에서 처가만큼 든든한 세력은 없었다.
그런데 이재성은 바로 그 든든해야 할 세력에게조차 배신을 당한 것이다.
이재성의 파벌은 자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김영수 이사는?”
“김영수는 아예 이한성에게 무릎까지 꿇었답니다.”
“무릎을 꿇었다고? 허!”
“김영수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임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다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닐지 우려스럽습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겨우 두 달도 안 돼서 이 모양이었다.
한성이 혜성 개발에 입사하고 두 달도 안 돼서 이재성의 핵심 파벌인 동광파가 지리멸렬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때, 목동의 땅값이 상승한다면?
한성이 추진하고 있는 목동 부지 매입이 대성공을 거둔다면 어떻게 될까.
강성호는 자신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끔찍한 상상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대표를 불러와.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
그의 말에 이사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이훈 대표를 치시는 겁니까?”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잖아!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기라도 해?”
“…….”
배춘식 상무는 입을 급히 다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부대표를 포섭해서 이훈 대표를 치는 것.
그게 위기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부대표에 오르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 이한성 그놈도 더는 나댈 수가 없게 될 거라고.”
이사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위험 부담이 컸지만, 그 과실은 매우 달았다.
* * *
<목동, 신정동 136만 평 수용.>
<인구 12만 명 수용할 뉴타운 건설!>
<9월부터 대대적으로 토지 매입할 예정.>
<목동, 신정동의 무허 건물, 뉴타운 입주권과 이주금 지급!>
4월 중순.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다.
정부에서 목동 지역에 신시가지를 조성한다는 소식이었다.
“전무님 오신다.”
“와, 발걸음부터가 위풍당당하시네.”
“당연히 그렇겠지. 목동 땅값이 미친 듯이 오르고 있는데.”
“운이 정말 좋으시다. 어떻게 목동 땅을 사자마자 땅값이 오르냐.”
“다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시기적절할 리가?”
“알고 계셨다면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니야? 정부에도 인맥이 있으시다는 뜻이잖아.”
“뭐가 됐건, 앞으로 이한성 전무님의 시대가 될 거 같다.”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지금까진 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전무고 회장의 아들이니 억지로 따라주는 척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나에 대한 불신은 깨끗하게 사라질 거다.
빌딩 계약 몇 건 체결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공을 세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한성 전무님!”
김영수가 내 이름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역시 전무님의 식견은 대단하십니다. 목동이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시다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충성심을 어필했던 김영수.
확실히 눈치가 빠른 것인지, 누구보다 먼저 와서 나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어디 저만의 공입니까. 저보다는 직접 발로 뛰어서 계약을 체결했던 매매사업부 임직원분들의 공이 더 큽니다. 물론 김영수 이사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겸손하시기까지! 저는 전무님을 모실 수 있어서 그저 뿌듯하게만 느껴집니다.”
잠시 김영수의 아부를 들어주는데 또 한 명의 임원이 다가왔다.
차진만 상무였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는 김영수처럼 비굴하게 아부하지는 않았다.
남들보다 일찍 내 밑에 들어왔고 직급도 가장 높았기에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다.
뒤이어 이사인 조규원, 김태규가 다가왔다.
그들 역시 차진만처럼 우아하게 나를 치켜세웠다.
“주식도 그렇게 잘하시더니, 부동산도 이렇게 성공하실 줄이야. 정말 투자의 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게 다 회장님의 피를 이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회장님도 부동산 감각이 대단하신데, 전무님이 딱 그 재능을 이으신 거지. 하하하!”
네 사람이 끝이 아니었다.
내가 걸을 때마다 임원들이 한 명씩 자연스럽게 내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자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저기 강성호 전무 아닙니까?”
“쯧쯧. 침몰하는 배에 계속 남아 있는 모습이 참 보기 흉합니다.”
“이재성의 외삼촌인데 어쩔 수 있나요. 하하!”
맞은편에 강성호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회사에서 골목대장 놀이를 하다니.”
다 들리게 혼잣말하는 그의 모습에 차진만이 이죽거리듯 말했다.
“가장 골목대장 놀이에 심취하셨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그저 우스울 따름입니다.”
“차진만 상무. 그쪽에 붙더니 아주 기세등등하군? 이한성 전무가 잘 챙겨주나 봐?”
“물론이지요. 우리 전무님께서는 이재성과 달리, 저를 아주 잘 챙겨주십니다.”
“내가 전에도 경고했을 텐데. 이재성 상무를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저도 전에 이야기했잖습니까. 이재성은 저랑 직급이 같다고. 짬으로 따지면 제가 훨씬 위에 있는데 왜 반말하면 안 됩니까.”
역시 강성호를 상대하는 일엔 차진만이 제격이었다.
나는 피식 웃은 뒤에 내 뒤를 따르고 있는 임원들에게 말했다.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가시죠.”
“예!”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강성호가 몸을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이한성.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반말하지 말라니까, 또 반말하고 그러네.
하지만 굳이 상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었다.
‘뭘 믿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비서들의 축하를 받으며 다시 평소처럼 업무를 보려는데 이훈 대표가 호출하였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앉게.”
인사를 하고서 소파에 앉으니 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저 같은 사람이라면?”
“회사 일보다는 사내 정치에 열중하는 그런 사람들 말일세.”
“…….”
“오늘도 임원들을 이끌며 떠들썩하게 출근했다지?”
“제가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가 회장님 아들이 아니라면 그들도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야.”
뭐 어쩌라는 건지…….
나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그분들은 제가 회장님 아들이라서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능력이 뛰어나고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지하는 겁니다.”
“자네가 한 달 전에 그런 말을 했으면 코웃음 쳤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군.”
이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심경이 대단히 복잡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니 기분이 묘한 거 같았다.
“하지만 아직 자네는 공식적인 후계자가 아니야. 일개 전무일 뿐이지. 그러니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예.”
“이만 물러가게.”
“그러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엄청난 공을 세웠으니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훈은 여전히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참 어려운 사람이군.’
내가 그 생각을 하는데 노사가 물었다.
(너는 이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참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면 이훈이 회사를 떠난다면 어떨 거 같으냐?)
노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하지만 일단 노사의 말에 대답부터 해주었다.
“자발적으로 떠나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거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면?)
“예? 이훈 대표가 이한철 회장에게 해고라도 당한답니까?”
(강성호가 이훈의 비리를 그룹 감사실에 제보했다. 네가 침묵한다면 이훈은 징계 해고를 당하게 될 거야.)
“……!”
눈이 커졌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이훈이 비리를 저지르다니?
(아, 물론 진짜 비리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강성호가 비리를 조작한 거야. 몇 년 전에 강남의 부지를 매입했을 때, 매입 가격을 10억 올려 주는 대가로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이지.)
“그 정도의 비리로 감사실이 움직입니까?”
(이재성이 움직이게 만들겠지. 그래도 그룹 전체로 보면 아직 이재성의 입김이 미치고 있으니 말이야.)
내부에서는 강성호가 비리를 조작하고 바깥에서는 이재성이 감사실을 동원한다?
이러면 이훈으로선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 때문에 딱히 인맥이랄 것도 없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강성호가 뭘 믿고 그러나 했더니, 이거를 믿고 그랬었나?’
솔직히 말해서 강성호도 지창훈처럼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줄 알았다.
무릎 꿇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타협할 거로 생각했다. 그래야지만 내가 회장이 된 이후에 자리보전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의외로 강성호는 강경하게 나왔다.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떨 거 같으냐? 이훈이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아, 아니면 남는 게 좋을 거 같아?)
“그야 당연히 이훈 대표가 계속 대표이사로 남는 게 저희에게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재성의 수작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훈이 떠난다고 해서 우리에게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니야. 아까 이훈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이재성이 대표로 삼으려는 최인준이 너에게 더 좋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내가 그의 약점을 알고 있거든.)
“최 부대표의 약점을 알고 계시다고요?”
(그래. 최인준이 강성호와 어떤 거래를 했든, 이 약점 하나만 있으면 최인준은 네 말에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을 거다.)
대표가 될 최인준을 내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강성호가 부대표에 오르는 것을 막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최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구태여 이훈 대표를 쫓아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지?)
“지금 당장이야 불편하게 느껴져도, 제가 회장이 된 이후라면 이훈 대표 같은 인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능력도 좋은 데다 이 시대에는 드물게도 청렴하기까지 하니까.)
“예, 그래서 저는 이훈 대표를 지켜줄 생각입니다.”
(너도 이제 네가 단순한 후계자 후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노사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선택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후계자라……. 하긴 오늘부터는 사실상 후보자를 넘어, 후계자가 된 거나 다름없지.’
* * *
-삼촌. 감사실에서 곧 출발할 겁니다.
이재성의 말에 강성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날이 왔다.
혜성 개발을 손에 쥘 날이.
-부대표 되면 이한성 그놈 좀 제대로 막아 주세요. 숨도 못 쉬게 만들라는 말입니다.
“알았다. 그렇게 하마.”
-믿겠습니다.
강성호는 통화가 끝나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한성. 그 애송이 놈도 오늘 이후로는 나댈 수 없게 되겠군!’
그가 그렇게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검은 정장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문을 벌컥 열고서 들이닥쳤다.
“감사실에서 나왔습니다. 모두 하던 행동 멈추세요.”
“가, 감사실? 대표이사실은 여기가 아닌데……?”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는 강성호 전무. 당신을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
강성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훈 대표가 아닌 자신을 조사하겠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자, 강성호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망연자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