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남은 건 전쟁뿐이다
JS 그룹은 일성 그룹의 장남이 세운 기업이었다.
그리고 유정석은 바로 그 장남의 처남이었고.
워낙 능력이 좋아서 JS 그룹의 회장까지 된다고 들었다.
물론 그래 봤자 지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사실상 월급쟁이 CEO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뭘요. 어차피 가는 길이었는데요.”
“다음에 기회 되면 식사나 한번 같이해요.”
꽤 설레는 말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유지은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좋냐?)
“예. 좋습니다.”
(쯧쯧. 너도 참 금사빠구나.)
“금사빠요?”
(금방 사랑에 빠지는 놈이라고.)
“아직 사랑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뭔가 인연은 인연이지 않습니까? 같은 아파트 단지에 회사도 근처라니.”
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자에 관심을 두는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인연은 무슨.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그딴 건 믿지 마라.)
“뭐, 제 돈을 보고 덤벼드는 여자들보단 낫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했는데도 계속 뭐라고 하는 걸 보니 진지하게 유지은과 교제할 생각인가 보구나?)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유지은 씨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문제니까요. 그래도 뭔가 설레는 기분이 드는 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쯧.)
노사는 혀를 찼다.
내가 연애하는 게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그래도 언제까지 혼자인 채로 있을 수는 없잖아? 지현이 그놈도 은근히 결혼하라고 보채는 중이니 말이야.’
내 나이도 어느덧 27.
20대 중반이면 어지간한 사람은 거의 결혼했을 나이였다.
여자라면 이미 노처녀란 소리를 들을 나이고.
아직 결혼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이 없지만, 연애 정도는 해보고 싶었다.
(하긴, 너도 여자를 만날 때가 되기는 했지. 몇 년간 여자 손을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부끄럽군요.”
(다만 한 가지를 충고하자면, 너무 여자를 믿지 마라. 그리고 너의 눈도 믿지 마. 내 미래를 보면 알 수 있듯, 너는 사업 감각은 뛰어날지 몰라도 여자를 보는 눈은 그리 좋지 않아.)
그 같은 충고를 들으니 뭔가 생각이 많아졌다.
노사가 괜히 여자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한 것이 있으니 불신하는 것일 터.
그런 노사의 모습을 보니 나라고 안심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확실하게 마음이 서면 그때 교제를 시작하자.’
노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설령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어설픈 마음으로 시작하지는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부동산 매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갑자기 땅을 안 팔기 시작했다고요?”
“예. 저희 말고 다른 곳에서도 땅을 사들이고 있는 것인지, 복덕방들이 더 가격을 높게 부르라면서 뻣뻣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움직이라고 했는데, 그새 들킨 겁니까?”
“저희가 어디인지 들킨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아다리가 안 맞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거래가 거의 없었던 목동이다.
그런데 혜성 개발에서 땅을 사들이기 무섭게 거래량이 많아졌다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방해하기 위한 수작 같았다.
‘역시 동광파 놈들이 움직인 건가.’
나는 혀를 차며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한번 알아보세요. 우리 말고 목동 땅을 건드는 세력이 어디인지.”
며칠이 지나자 알게 되었다.
누가 목동 땅을 사들이고 있는지를.
“광영 기업이요?”
“예, 그렇습니다. 광영 기업에서 닥치는 대로 땅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나를 방해하는 세력은 다름 아닌, 이재성의 처가인 광영 기업이었다.
심지어 광영 기업은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대놓고 땅을 사들였다.
‘안 그래도 광영 기업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알아서 명분을 만들어 주는군.’
노사와 이야기했던 대로, 광영 기업을 손봐줘야 할 거 같았다.
“신은규 대리. 광영 기업의 연락처 아십니까?”
“찾아보겠습니다.”
“찾으시면 전화하셔서, 그쪽 대표랑 연결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응징하기 전에 한 번쯤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과연 어떤 말을 지껄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광영 기업 대표, 지창훈입니다.
“혜성 개발의 이한성 전무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룹에 입사하고 1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하셨다고요?
친해질 사이도 아닌데 굳이 쓸데없는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지금 시간 됩니까?”
-시간이요?
“시간 되시면 한번 만나시죠.”
-흠, 저에게 무슨 용건이 있으신가?
“직접 만나고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조금 곤란한데. 솔직히 제 입장에서 이 전무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일이잖아요. 재성이 눈치도 봐야 하고.
“그래서 안 보시겠다?”
낮은 목소리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니 지창훈이 말을 바꿨다.
-정 저를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세요. 회사로 오시면 시간을 내드리죠.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내가 직접 그를 찾아가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 * *
“아이고, 이한성 전무! 이렇게 보게 되다니, 정말 반가워요.”
지창훈은 평범하게 생긴 중년 사내였다.
나는 지창훈의 인사를 대충 받아주고는 용건을 꺼냈다.
“혜성 개발에서 목동 땅을 매입한다는 정보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엥? 갑자기 목동 땅은 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시치미 떼지 마시죠. 광영 기업에서 목동 땅을 공격적으로 매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해에요, 오해. 나는 그냥 목동이 잘 될 거 같아서 조금 매입한 거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까?”
“허 참. 이렇게 나오다니?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구려.”
“주제도 모르고 혜성 그룹의 후계 경쟁에 끼어드셨으면서, 정말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지창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난할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혜성 회장님 아들이라지만, 나이도 어린 분이 너무 오만한 거 아니요?”
“진짜 오만한 게 뭔지 보여드립니까?”
나는 매서운 눈빛으로 지창훈을 노려봤다.
그러자 지창훈의 비서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 자식이! 나이도 어린 게, 너 죽고 싶어?”
“필홍이, 너는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사장님.”
“가만히 있으래도.”
“알겠습니다.”
필홍이란 사내는 지창훈의 말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나를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무리 회사가 작다지만, 깡패 나부랭이를 비서로 둡니까?”
“뭐, 깡패?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가만히 있으라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들의 행태가 같잖았다.
윽박지르면 내가 겁먹기라도 할 줄 알았던 것일까.
“콩트는 끝났습니까?”
“아, 미안하게 됐네요. 제가 비서 교육을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됐고,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동 땅 사는 거, 이제 그만 하세요. 필홍인지 뭔지 저놈도 자르고요.”
내 말에 지창훈이 눈을 부릅떴다.
이필홍이라는 자 역시도 울컥하더니 한층 더 살벌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요?”
“그럼 제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허, 참!”
“제 경고를 똑똑히 새겨들으세요. 계속 저를 방해하려 든다면 그때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회사를 잃게 될 겁니다.”
내 경고에 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로선 황당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제아무리 혜성 건설의 전무라지만, 잘 나가는 중견 기업을 없애겠다니.
“자신감이 과해도 너무 과해 보이는구려. 재벌 2세라고 세상이 쉬워 보이나 본데, 정도를 지키는 게 좋을게요.”
“현금만 백억 넘게 있으면 자신감을 가져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
백억이라는 말에 지창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의 자산이라고 해봐야 회사 지분까지 합쳐도 30억 정도에 불과할 것이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창훈은 이내 코웃음을 쳤다.
내 말이 터무니없게 느껴진 모양이다.
“마음대로 해보세요. 우리 회사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나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같이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상은 실패군.’
협상이 실패했으니, 남은 건 전쟁뿐이었다.
* * *
“건방진 새끼.”
지창훈은 한성이 앉았던 자리를 노려보며 분노를 삼켰다.
혜성 그룹의 회장도 아니고, 서자에 불과한 놈에게 이 같은 모욕을 당할 줄이야.
잘 나가는 신흥 중견 기업의 사장인 그로선 불쾌하기 짝이 일이었다.
“참 웃기는 놈입니다. 허세도 정도껏 해야지, 백억이 말입니까?”
“그러니까. 일성 그룹 회장도 현금 자산은 백억이 안 될 텐데, 지가 뭐라고 백억이야?”
“성격도 더러운 게, 영 마음에 안 듭니다. 제가 동생들 데리고 그놈 한번 손봐도 되겠습니까?”
이필홍의 말을 듣는 순간 지창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워낙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보니, 주먹을 써서라도 응징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서자니, 뭐니 해도 이 회장의 아들이다. 괜히 건드리면 우리만 피 봐.”
“아쉽군요.”
“재성이가 회장이 되면 언제든 손봐줄 수 있으니, 그때 제대로 손봐주자고.”
“흐흐, 벌써 기대가 됩니다.”
그렇게 지창훈은 한성의 경고를 무시했다.
지창훈의 입장에서는 일개 서자일 뿐인 한성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성의 경고를 받은 다음 날부터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대, 대표님. 지금 찌라시를 통해 온갖 안 좋은 루머들이 퍼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모르겠습니다! 자금 악화설을 비롯하여 곧 도산할 거라느니, 대표가 해외로 튀었다느니, 그런 루머들이 퍼지는 중입니다!”
“빌어먹을! 큰손들이 우리를 노리기라도 하는 건가?”
루머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날엔 조흔 은행을 시작으로 여러 은행에서 광영 기업에 사람을 보냈다.
그들은 돈도 없는데 왜 부동산을 마구잡이로 매입하는지 추궁하였다.
“나 지창훈입니다. 지창훈! 설마 이 정도의 자금난으로 우리 회사가 도산하기라도 할 거 같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부채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명동에서 30억을 넘게 빌리셨다고요?”
“그, 그걸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법적 절차에 따라 채권 회수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지창훈의 얼굴은 단번에 핼쑥해졌다.
은행 부채만 백억이 넘는 상황.
정말로 은행에서 채권을 회수하려 든다면 광영 기업이 도산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 사위가 누군지 아시지 않습니까. 광영 기업이 파산할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빌고 빌어서 간신히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지창훈의 위기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창훈아. 너희 회사를 노리고 있는 곳이 있다. 지금 광영을 인수하려고 여기저기서 지분을 모으고 있어.”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은밀하게 찾아와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광영의 지분을 팔라더군. 현재 주가보다 훨씬 비싸게 사준다면서 말이야.”
“거, 거기가 어딘데요?”
“한성 주택. 회사 이름이 한성 주택이었어.”
“……!”
지창훈은 눈을 부릅떴다.
한성!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회사 이름에 하필 한성이 들어가 있었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차라리 우연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연이라기에는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