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차라리 혜성 건설을 인수해
3월 11일.
언제나처럼 업무를 보는데 전화를 받던 이소희가 말했다.
“전무님, 대표님이 부르십니다.”
나는 그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내 계획서를 읽으셨나 보군.’
노사에게 목동 땅을 매입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이훈이 나를 부른 이유도 그 계획서 때문일 터.
똑똑!
“이한성 전무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대표이사실에 들어가니 이훈이 여느 때처럼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전무가 올린 계획서는 읽어 봤어.”
“아, 목동 부지 매입 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회사에 온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아주 엉뚱한 짓을 벌이더군.”
“계획서를 읽으셨으면 아시겠지만, 결코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동은 곧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기다려 봐. 강성호 전무가 곧 올 테니까.”
이훈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끊고는 그 같이 말했다.
‘강성호가 온다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강성호라면 내 계획에 반대할 것이 뻔했다.
설령 회사에 이로운 일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대표이사님. 어떤 용무로 저를 다 부르셨습니까.”
고요한 적막감 속에 몇 분을 기다렸을까.
마침내 강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 전무, 여기 앉게.”
강성호는 잠시 나를 힐끔 보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전무를 부른 이유는 경영 관리부를 책임지는 강 전무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네.”
“말씀하십시오.”
“이한성 전무가 목동 부지를 매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정부에서 곧 목동 개발을 시작할 거라면서 말이야.”
그 말에 강성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목동이라니. 지금 시점에 목동 땅을 매입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왜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강성호에게 굳이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강성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더니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자네에게 이유까지 설명해 줘야 하나?”
“하대하지 마시죠. 같은 전무끼리.”
“직급이 같다고 나이까지 같지는 않잖아?”
“이재성의 개라면 개답게 행동하시지요? 어디서 다른 집 개 주인과 동등해지려고 합니까?”
“개? 지금 나보고 개라고 했어?”
쾅!
말다툼이 심해질 기미를 보이자 이훈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너희들 싸우라고 부른 줄 알아?”
그의 일갈에 대표이사실은 잠시 동안 적막감이 흘렀다.
하지만 강성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목동 부지를 매입해선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목동을 서부의 강남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목동이 과거의 목동과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여전히 허허벌판이지. 오염된 하천에 버려진 농토가 즐비하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늘 개발할 거라는 소문만 있고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일리가 있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설득하기가 꽤 까다로울 거 같았다.
“과거에는 그런 소문들이 거짓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뭐가 다르지?”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었지 않습니까?”
“그게 왜?”
“지금의 정부가 얼마나 국가 위신을 신경 쓰는지 대표이사님도 잘 아실 겁니다. 외국인들이 김포 가도를 통해 서울에 진입할 텐데, 과연 정부가 외국인들에게 목동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추측이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듯싶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생각이 달랐는지, 반대 의견을 펼쳤다.
“설령 정부에서 목동 개발을 시작하는 게 사실이라 해도, 군 장성 부인들이 벌써 채갔을 겁니다. 목동 땅값이 정확히 얼만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들어가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땅값도 모르면서 일단 늦었다고 말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 오를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목동 땅값의 평균 시가라고 해 봤자 7, 8만 원입니다. 서울의 평균 땅값이 평당 40만 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목동 개발이 확정 날 경우 최소 네 배 이상 오를 겁니다.”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가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혜성 개발에서는 신사업을 벌일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2년 넘게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 무슨 신사업입니까?”
혜성 개발이 적자를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워낙에 부동산 경기가 안 좋았던 터라, 임대 수입보다 은행 이자가 더 많이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자금은 문제 될 게 없었다.
황 노인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금은 제가 조달할 수 있습니다. 백억이든, 2백억이든 말입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크게 놀랐다.
이한철 회장이 직접 은행을 찾아가도 백억을 대출받기는 쉽지 않았다.
하물며 2백억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을 얻어올 수 있다고? 혜성 개발의 부채액이 2천 억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하는 거야?”
“제가 명동의 큰손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저를 굳게 신뢰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에게 가면 담보가 부족해도 큰돈을 빌릴 수 있을 겁니다.”
황 노인은 내 자산 규모를 알고 있었다.
그깟 백억에서 2백억 정도쯤이야 못 빌려줄 이유가 없으리라.
“자네가 돈을 빌려올 수만 있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거 같군.”
이훈이 그 같은 말을 하자 강성호가 다급히 나섰다.
“대출을 받는 거라면 저는 반대입니다. 안 그래도 부채가 많아서 문제인데 추가로 빚을 진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내가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을 펼쳐도 강성호는 변함없이 반대할 것이리라.
“목동의 땅값이 올라간다면 빚이 늘어나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땅값이 올라가지 않는다면? 그럼 누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겁니까?”
“제 자리를 걸겠습니다.”
나는 마침내 승부수를 띄었다.
강성호에게는 논리가 통하지 않았기에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자리를 걸겠다고?”
“만약 올 한해 목동의 땅값이 오르지 않는다면, 그 즉시 사직서를 쓰겠습니다.”
내 말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사직서를 제출하겠다는 말은 그야말로 배수진을 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강 전무. 혹시 더 할 말 있나?”
“……단순히 땅값이 오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이자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랑 내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갑자기 웬 내기입니까?”
“제가 매입할 목동의 땅값이 올해 두 배 이상 오른다는 것에 제 모든 걸 걸겠습니다. 혜성 건설의 제 지분까지도 말입니다. 강 전무님은 무엇을 걸겠습니까?”
“……!”
“왜 아무 말도 못 하십니까? 아까 책임에 대해 그리 말씀하셨는데, 본인도 책임을 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의 힐난에도 강성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감 넘치는 나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거 같았다.
“더 이야기를 나눠 볼 필요는 없을 거 같군.”
이훈이 결론짓듯 말했음에도 강성호는 어떠한 이견도 제기하지 않았다.
* * *
생각 좀 정리할 겸, 오랜만에 도보로 퇴근하였다.
“어떻게 된 게 안건을 통과시키는 것도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벌써부터 심한 반발에 부딪히니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지금은 약과야. 네가 활약을 하면 할수록 방해는 거세질 거다.)
“강성호도 그렇고, 진짜 그놈들은 회사의 이익에는 쥐뿔도 관심이 없는 거 같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놈들은 제 부귀영화에만 관심이 있을 뿐, 회사가 어떻게 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아.)
답답했다.
노사야 실적만 쌓으면 해결될 일이라고는 하는데, 오늘 강성호가 하는 행동만 봐도 실적을 쌓는 게 쉽지는 않아 보였다.
‘어쩌면 목동 땅을 사는 걸 방해할 수도 있어.’
회사의 미래를 신경 쓰지 않는 자들이었다.
만약 작정하고 나를 방해하려 든다면 목동 부지 매입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실수인 척 부지 매입 추진계획을 언론에 공개한다던가, 은밀하게 소문만 흘려도 땅값이 치솟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동성 기업이나 광영 기업 중의 하나가 목동 부지를 매입할 수도 있었고.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광영 기업을 아예 우리의 수중에 넣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수중에 넣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
“인수하자는 겁니다.”
광영 기업은 이재성의 처가였다.
매출 수백억대의 중견기업으로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있었다.
시가총액은 대략 백억이 조금 안 되는 수준.
내가 50억 정도를 들인다면 광영 기업을 인수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만약 광영 기업을 인수한다면 이재성의 측근들을 대거 회유할 수 있게 된다.’
이재성의 측근 중에는 광영 출신이 꽤 있었다.
만약 광영 기업이 내 것이 된다면 그들 중 일부는 줄을 갈아탈 가능성이 높았다.
(돈이 많다고 아주 자랑을 하려는 거냐? 인수할 회사가 없어서 광영 기업을 인수하겠다니. 그렇게 돈을 막 쓸 거면 차라리 혜성 건설을 인수하지 그러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기야, 광영 기업을 인수하느니 차라리 혜성 건설을 인수하는 게 낫긴 하다.
대출 낀다는 가정하에 혜성 건설을 인수할 자본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야 돈 낭비나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이한철 회장에게 공짜로 받게 될 혜성 그룹의 지분을 굳이 돈 주고 살 필요는 없었던 것.
마찬가지로 광영 기업도 구태여 인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너의 계획을 잘만 가다듬으면 네가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겠어. 이를테면, 자본을 이용해 광영 기업의 사장을 협박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협박이요?”
(인수하는 척만 해도 광영 기업 사장 입장에서는 큰 위협을 느끼지 않겠냐?)
“진짜 인수할 필요 없이 시늉만 하라는 뜻이군요.”
(그래. 결국엔 광영 기업을 네 뜻대로만 다루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노사가 추천한 방법이 썩 괜찮게 느껴졌다.
“저기요!”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성 씨 맞죠? 반가워요! 여기서 뵙네요!”
“아, 유지은 씨?”
누군가 했더니 러닝 할 때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유지은이란 이름의 여인이었다.
(흠.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노사의 중얼거림을 한 귀로 흘려듣고는 유지은에게 물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기 근처에서 회사 다니세요?”
“예, 저기 건물 보이시죠? 일성 화재에 다니고 있어요.”
“그렇군요. 저는 혜성 개발에 다니고 있습니다.”
“우와 집도 가깝고 회사도 가깝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집고 가깝고 회사도 가깝다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기묘한 우연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행운처럼 느껴졌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 기분이랄까.
“퇴근하시는 길이세요?”
“예.”
“그럼 저 좀 바래다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이 시간에 혼자 귀가하는 거는 처음이라서…….”
나는 그녀의 말에 반색했다.
하지만 즉답은 하지 않고서 잠시 노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노사는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 되나요?”
“아니요. 어차피 집도 가까운데 같이 가시죠.”
“고마워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유지은의 표정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에게도 봄날이 오는 건가?’
아직은 호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은근하게 기대되기는 했다.
그녀와 연애하면 어떤 기분일지.
(아, 누군가 했더니 유정석의 장녀구나.)
내가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노사가 찬물을 끼얹었다.
‘유정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그게 누구지?’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미래의 대기업들을 기억하느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JS 그룹도?)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니 노사가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거기 회장 되는 사람이다.)
“……!”
유지은의 아버지가 JS 그룹의 회장이 될 사람이라니.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