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해
“마, 말도 안 돼. 차진만 상무랑 친하다니.”
벙찐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김영수를 보며 나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얼마 후,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단신의 중년인이었다.
“빨리 오셨네요, 차진만 상무.”
“전무님이 부르시는데 어떻게 시간을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일 제쳐두고 달려왔습니다!”
차진만은 아부하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김영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단순히 안면만 튼 정도가 아닌 게 확실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무님, 이 친구는 왜 여기에 있습니까?”
“제가 아주 불쾌한 일을 겪었습니다.”
“불쾌한 일이라면……?”
“이쪽에 있는 김영수 이사가 저를 신입사원 대하듯 대하더군요. ‘교육’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나는 일부로 교육을 강조해서 말했다.
아까의 복수였다.
내 말을 들은 차진만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김영수를 바라봤다.
“김영수. 너 미쳤냐? 어딜 감히 전무님께!”
“그, 그게 아닙니다. 상무님,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차진만은 김영수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퍽!
아무 대꾸 없이 구둣발로 김영수의 정강이를 칠뿐이었다.
“아악!”
“이사가 됐다고 아주 미쳐 날뛰네? 짬도 얼마 안 되는 게 감히 말이야.”
“시, 시정하겠습니다!”
김영수는 다급하게 정자세를 하였다.
그러자 차진만이 그의 정강이를 한 대 더 때렸다.
퍽!
“으윽···.”
“뭐 하고 있어? 어서 전무님께 사과드리지 않고!”
잠시 주저하던 김영수가 차진만의 노한 얼굴을 보고는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뭘 다시 안 하겠다는 겁니까?”
나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진만 때문에 억지로 사과한다고 해서 내가 바로 받아 줄 필요는 없었다.
“그…….”
“똑바로 대답 안 해? 더 맞고 싶어?”
“아, 앞으로 하늘같이 모시겠습니다!”
하늘같이 모시겠다니.
무슨 종교도 아니고.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신은규를 가리켰다.
“아까 제 비서와 감정 다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바로 화해하시고 업무도 잘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신은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소희도 문 옆에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영수는 넋을 잃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상황이 종료되자, 차진만이 나에게 말했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제가 회사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상무님이 직접요?”
“예. 하하, 제가 함께하면 아까와 같은 귀찮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나야 나쁠 게 없었다.
차진만이 나의 사람이라는 걸 회사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안내해 주시죠.”
임원, 그것도 연차가 제법 되는 상무에게 직접 안내를 받으니 무슨 회장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나를 보는 혜성 개발 직원들의 표정에 의문과 놀람이 떠올랐다.
“뭐야. 저 사람 새로 온다던 그 전무 아니야? 근데 왜 차진만 상무님이 따라다녀?”
“진짜 이상한 그림이네. 차진만 상무는 이재성을 후계자로 미는 사람 아니었어? 설마 배를 갈아탄 건가?”
“엥? 이한성 전무는 서자잖아.”
“혜성 모직에서 활약하기는 했지.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겨우 그런 거로 라인을 바꾼다고?”
“어쨌거나, 상황이 심상치가 않네. 우리도 괜히 피 보지 않으려면 줄을 잘 타야겠어.”
“그러게. 차진만 상무가 저쪽 편에 섰으니 이거 고민 좀 해 봐야겠는데?”
차진만이 없었으면 직원들은 나를 흉보기 바빴을 것이다.
임원진부터가 이재성의 사람들이었으니 직원들로선 흐름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진만이 대놓고 나를 편드니 직원들도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에게 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한성 전무님! 여기 계셨습니까.”
“실망입니다. 저도 불러주시지 그랬습니까.”
이런 분위기는 두 명의 이사가 추가로 끼면서 더욱 확산했다.
조규원과 김태규.
내가 한 달 전부터 어렵게 포섭했던 이사들이 내 뒤에 따라붙었다.
그들도 나를 극진하게 대했는데, 누가 봐도 나의 사람인 게 티가 날 정도였다.
“김단일 이사, 인사하게. 이분은 이한성 전무님일세.”
“예? 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김 이사는 제 후배인데, 아주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한 임원입니다.”
“그렇습니까.”
세 사람은 단순히 건물 안내만 해준 것이 아니었다.
안내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사람 소개였다.
간부들을 시작으로 혜성 개발의 임원 중에서 중립에 가까운 임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포섭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로 말이다.
‘다들 어색해하는군.’
직원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듯, 임원들 또한 당혹스러운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서자인 나를 깍듯하게 대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그저 황당하고 의문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원래라면 나를 배제할 생각이었을 테니 더욱더 어처구니가 없을 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라고 알겠어? 갑자기 저러시는데.”
“도대체가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네.”
“이거 우리도 오해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내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도 저들끼리 작게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그만큼 임원들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차진만!”
그때였다.
무리를 헤치고 나타난 중년 사내가 차진만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강성호 전무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중년 사내의 이름은 강성호.
혜성 개발의 또 다른 전무였다.
“아무래도 초행길이니 모르는 게 많으실 거 같아서 이한성 전무님을 안내해드리고 있었습니다.”
차진만이 능청스럽게 대꾸하니 강성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왜 자네가 해!?”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슨 생각이라니요. 그냥 회사를 안내한 거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겁니까? 전무님도 이재성이 출근했을 때 어떻게 하셨는지 깜빡 잊으셨나 봅니다.”
“이재성? 이재성 상무님이 네 친구야? 어디서 감히!”
“뭐 어떻습니까. 직급도 같은데.”
“미치겠군. 이 새끼, 진짜 정신 나간 거 같은데?”
“새끼라니요.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됐고! 이번 일은 이재성 상무님한테 꼭 보고할 테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강성호의 말에 차진만이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러자 강성호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봤다.
원흉이 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내가 원흉이 맞기는 하지.’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나도 차진만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줄은 예상 못 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급자였던 강성호에게 대들기까지 하다니.
‘무리해서라도 나의 신임을 얻고 싶었던 건가? 만약 그런 생각이었다면, 판단력이 썩 나쁘지는 않은 거 같군.’
내가 그렇게 차진만에 대해 평가하고 있을 때, 강성호는 더 할 말이 없는지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떠났다.
“아니, 저렇게 가 버리면 어떡합니까? 이한성 전무님과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예의지.”
“놔둬라. 강성호 전무가 지금 예의를 차릴 겨를이 있겠냐? 한시라도 빨리 이재성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을 거다.”
조규원과 김태규의 대화를 한 귀로 들으며 나는 다시 열성적으로 사람들을 상대했다.
적들이 대응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이재성의 명령이 떨어져도 나를 적대하기가 꺼려지게끔 만들려는 의도였다.
* * *
(혜성 모직 때보다는 시작이 나쁘지 않아 보이는구나.)
“흠, 그렇습니까?”
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봤을 때, 지금 당장은 그리 상황이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차진만이 공식적으로 내 편에 섬으로서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닌 걸 증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파벌 규모로 보면 여전히 이재성 쪽이 압도적이었다.
두 명의 전무와 네 명의 상무 그리고 일곱 명의 이사가 사실상 이재성의 파벌에 속해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이사들도 반쯤 걸쳐 있고 말이다.
(대표나 부대표, 그리고 절반 이상의 이사는 중립파나 다름없어. 직원들 역시 이재성을 지지한다고 보기 어렵고. 만약 네가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 준다면 이 중립파를 회유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제가 아무리 엄청난 성과를 보여준다 해도 이재성의 외가나 처가는 저를 계속 배척하지 않겠습니까?”
혜성 개발이 괜히 이재성의 영역인 게 아니었다.
동성 기업과 광영 기업, 이른바 동광파 출신들이 이재성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기업은 이재성의 처가와 외가였다.
참고로 전무인 강성호 역시 이재성의 외삼촌이었다.
물론 나와도 법적으로는 친척 관계였고.
(네가 후계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면 그들도 줄을 갈아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아직 너의 곁에 빈자리가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저는 서자인데요?”
(그게 뭔 상관이야?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동성 기업이나 광영 기업이라고 해서 꼭 이재성만 지지하라는 법은 없어. 애초에 그들 개개인은 출신지만 같을 뿐, 동성이나 광영에 충성하지도 않을걸?)
노사의 말을 들으니 지금 상황이 썩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했다.
결국, 혜성 모직 때처럼 성과만 보이면 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성과를 보일지가 관건이겠군요.”
(네가 담당할 매매사업부에서 성과를 보이려면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바로 인맥과 정보지. 그리고 너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정보야 노사가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인맥 역시도 황 노인을 필두로 이한철 회장이 소개해 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진짜, 노사님 말대로 해볼 만하겠는데?’
나는 마침내 자신감을 되찾았다.
혜성 개발에서도 혜성 모직 때처럼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었다.
* * *
빌딩 매매부 직원들의 업무 내용은 다양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역할은 하나였다.
잠재 가치가 높거나 임대 수익률이 좋은 빌딩을 매입하는 것.
그룹에 돈이 부족하면 빌딩을 매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빌딩을 매입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업무였다.
“동우 빌딩, 건물주와의 연락은 어떻게 됐나?”
회의를 주관하던 김영수 이사가 문정현 차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문정현 차장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건물주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뛰었는데, 은둔 생활을 하시는 분인지 연락처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직도 연락처를 못 구했다고? 시간이 몇 주나 지났는데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연락처 구하는 거 하나도 못 하면, 네가 회사에서 하는 게 도대체 뭐야! 이한성 전무 따까리짓 하려고 회사 다녀!?”
“아닙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신축 빌딩이 급증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빌딩은 매물이 별로 없었다.
임대 수익률이 높은 빌딩은 더더욱 귀했고.
문제는 마음에 드는 빌딩을 찾아도 매입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건물주의 연락처를 구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문정현 차장 역시도 종로의 복덕방을 전부 뒤져 봤지만 동우 빌딩의 건물주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 빌딩의 건물주, 제가 압니다.”
“너는 뭔데…… 헉! 이한성 전무님?”
그때 갑자기 회의장에 한성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