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35화 (35/300)

35화 생각보다 성질이 더럽네

“부사장님! 한잔 따르겠습니다!”

혜성 개발의 김태규 이사가 무릎을 꿇은 채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난 당연하다는 듯, 한 손으로 술을 받았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같은 계열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상급자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역시 돈이 좋군. 한때는 적대 관계였었는데, 이렇게 공손해지다니 말이야.’

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차진만 상무와 조규원 이사, 김태규 이사, 이렇게 세 사람은 이재성을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나와 관계가 좋을 리 없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김태규 이사의 모습만 보면 알 수 있듯, 그들과 나의 관계는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정말 부사장님은 주식의 신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한 번을 안 틀리시는지. 하하하.”

“규원이 형님도 이번에 많이 이익 보셨습니까?”

“나는 겨우 본전 뽑았지. 저번에 손해를 많이 봤었잖아.”

“그러게 왜 부사장님 말을 안 들어서는. 팔라고 하셨을 때, 팔았으면 손해 볼 일도 없었지 않습니까.”

“어허, 이 사람이. 내가 부사장님 말을 안 들은 게 아니고, 다 이유가 있었다니까.”

“아무튼 형님은 주식할 머리가 아니니까, 앞으로도 괜히 머리 쓰지 마시고 부사장님 말만 들으세요. 저 보세요. 부사장님 말만 듣고 천만 원 벌었잖아요.”

“물론이지! 우리 부사장님은 주식의 신인데, 어찌 부사장님의 말을 거역할 수가 있겠어?”

이사들을 회유하겠다고 뇌물을 줄 필요는 없었다.

뇌물 대신에 내가 이용한 것은 바로 정보였다.

노사에게 받은 작전주에 관한 정보.

이 중에서 내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은 동전주 위주로 이사들에게 추천해 주었다.

물론 이들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조규원 이사 같은 경우, 내가 팔라고 할 때 안 팔고 끝까지 가지고 있다가 큰 손해를 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픽이 100% 적중률을 보이자 그때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

마치 회장님 모시듯 나를 떠받든 것이다.

“부사장님, 또 한 번 가르침을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차진만 상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 중에서 가장 늦게 내 픽을 받은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수익률을 보고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한 번 크게 손해를 봤던 조규원 이사조차 월급쟁이에겐 거액인 3백만 원 이상의 수익을 봤으니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좋은데 알려 줄 테니까.”

“예, 물론입니다! 기다리는 대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꼭 좀 기회를 주십시오.”

혜성 개발의 상무면 그룹 전체에서도 의전 서열이 낮은 편이 아닌데도, 그는 몸을 숙이지 못해 안달 났다.

그만큼 내 픽을 받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도 여러분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부사장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못 들어주겠습니까?”

“아마 이런 소문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곧 혜성 개발로 소속을 옮길 거라는 소문을.”

“그 소문,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합니다.”

“저도 들어보긴 했는데, 헛소문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헛소문이 아닙니다. 이번 달 안에 혜성 개발 전무로 인사 명령이 떨어질 겁니다.”

“허어.”

“정말입니까?”

“이렇게 좋은 일이! 가까운 곳에서 부사장님을 모시게 되었군요!”

세 사람은 내 말을 듣고서 살짝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을 테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이내 반색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미 내 픽을 받기로 한 시점에서 그들은 이재성 파벌에서 나의 파벌로 배를 갈아탄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혜성 개발로 오는 게 그들 입장에서도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혜성 개발에서 저를 많이 도와주세요. 제가 주식이나 할 줄 알지 다른 걸 알겠습니까. 여러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도움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주식의 천재이시니, 부동산에서도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주실 거 같습니다. 하하하!”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의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돈의 힘은 위대하다고.

‘내 픽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이들이 배신할 일은 없겠어.’

* * *

“종태 형. 축하해.”

“갑자기 뭘 축하해?”

“상무로 승진한 거 축하한다고.”

“승진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뭘 뒤늦게 축하를 하고 그러냐.”

“인수인계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축하도 못 해 줬잖아.”

“됐어. 회식 쐈으면 됐지. 그보다, 너나 축하한다. 드디어 혜성 개발로 가게 됐네. 오늘 가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월 21일.

정식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오늘부터 나는 혜성 모직의 부사장이 아닌, 혜성 개발의 전무였다.

“직원들에게 인사 잘하고 가라.”

“그래야지.”

종태 형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갔을 것이다.

지금이야 혜성 개발로 소속을 옮긴다지만, 혜성 모직의 직원들은 앞으로도 쭉 내 사람이었다.

내 사람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일.

“그리고 혜성 개발에서도 꼭 성과 내서 부사장까지 승진해. 그래야 내가 네 덕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 거 아니냐.”

“상무 자리를 부담스럽게 여겨 놓고는 더 높은 자리를 원하는 거야?”

“흐흐. 이왕 임원이 된 거, 부사장까지는 찍어 봐야 하지 않겠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적응력 하나는 끝내줬다.

“부사장이 뭐야, 내가 회장이 되기만 한다면 계열사 사장 자리도 줄 수 있어.”

“나 진짜 기대한다? 그렇게 말해놓고 안 주면 마음 상할지도 몰라.”

“그래. 대신 형도 잘해야 해. 혜성 모직에서 지금의 매출 성장세를 계속 이어 나가야지 후계자가 될 명분이 생겨.”

“알았다. 네가 워낙 잘해 놨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건성으로 말하는 종태 형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다른 부서의 부장, 차장들도 불러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생산부장인 원선무도 그랬고 영업부장과도 몇 번 마찰을 겪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옛날 일이었다.

두 사람은 내가 실력을 보여주고 최진수까지 쫓아낸 뒤로는 깨끗하게 상관으로 인정했다.

경리부장이야 처음부터 나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말이다.

“부사장님, 멀리서 응원할게요!”

“건강히 지내십시오!”

“가지 마세요, 부사장님!”

부장, 차장과의 대화가 끝나고 직원들의 배웅을 받았다.

간부들은 몰라도 직원들의 마음은 확실하게 얻은 상태였기에, 나를 배웅하는 직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아마 저들만큼은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응원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 * *

“혜성 개발에서는 어떨지, 기대되는군요.”

“그래요? 저는 불안하기만 한데…….”

“부사장님, 아니, 전무님은 잘하실 겁니다. 우리가 제대로 보필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비서인 이소희와 신은규가 그 같은 대화를 나누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던 유동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 도착했습니다.”

“내립시다.”

나는 비서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혜성 건물의 본사로 향했다.

“저기,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요?”

“전무님을 환영하려는 거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 거 같아서.”

로비에는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모여 있었다.

신은규의 말처럼 나를 환영하기 위한, 일종에 의전 행사인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로비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열렬히 손뼉을 쳤다.

“전무님, 혜성 개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인파의 대표로 보이는 이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주고는 이름을 물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저는 빌딩 매매부의 문정현 차장이라고 합니다.”

부장도 아니고 차장이라.

다 좋은데 그게 조금 아쉬웠다.

‘뭐 이런 일에 차장급이 나서는 것도 지나친 의전이긴 하지.’

의전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문정현은 살짝 어색해하더니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켰다.

“대표이사님께서 전무님을 바로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직원들과 잠시 인사만 나누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로비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 중에 과장급 직원들과 한 번씩 악수를 하였다.

모두와 악수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비서님들은 제 사무실에 가 있으세요.”

그렇게 비서들까지 보내고 문정현 차장을 따라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왔나?”

“안녕하십니까. 이한성 전무라고 합니다.”

“차장은 볼일 봐.”

대표이사 이훈은 내 인사를 무시하고는 문정현에게 말했다.

“예.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또 부르십시오.”

문정현이 나가자 이훈이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의미인 거 같았다.

“이한성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자네가 회장님의 삼남이었나?”

“……예.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회장님의 자식이란 이유로 특혜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겸손한 척하는군.”

이훈은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뭔가 나를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그 나이로 전무가 됐는데 특혜를 받을 생각이 없다고? 지나가는 개도 웃을 소리를 하고 있어.”

“…….”

“왜?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이재성, 그놈도 그러던데. 내가 뭔 말을 할 때마다 못마땅하다는 듯 쏘아 봤지. 30대 애송이 주제에 말이야.”

이재성의 사람과 사이가 안 좋다고 들어서 안심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낙하산 인사 자체를 싫어하는 인물인 듯싶었다.

“자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회장님 아들이란 이유로 특혜를 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알아서 처신 잘해 봐. 내가 자네를 도와줄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저런 태도를 보이는데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훈이 언짢은 기색을 하고는 문을 가리켰다.

축객령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가.”

복도로 나오자 노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질이 더럽구나.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사람이라 좋게 봤었는데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유동연을 통해 이훈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던 터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리도 없었지만 말이다.

‘뭐 실력만 보여준다면 인식이 달라지겠지.’

그 생각을 하며 전무실에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고성이 들렸다.

“대리 따위가 어디서 차장을 오라 마라야! 높으신 분 비서 되니까 회사가 우습게 보여?”

“정중하게 부탁한 겁니다. 문정현 차장도 괜찮다고 했고요.”

“말본새 봐라! 어른이 말하는데 어디서 말대꾸야! 업무를 배울 게 아니라 예의부터 배워야 해. 네놈은!”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전무님!”

이소희가 살았다는 얼굴로 나를 불렀다.

신은규도 말싸움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한 명,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내가 왔는데도 반응조차 안 했다.

“뭐하냐고 물었습니다.”

“그, 김영수 이사라고 갑자기 사무실로…….”

“이한성 전무님입니까? 반갑습니다. 김영수 이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무님.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비서 교육을 다시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불청객, 김영수는 이소희의 말을 끊고는 그 같이 말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신경을 긁는 말투였다.

“당신이 뭔데 내 비서 교육을 신경 써요?”

“상급자로서 버르장머리 없게 행동하는 하급자를 어떻게 가만 놔둡니까?”

“그러는 당신은, 지금 이게 상급자를 대하는 태도입니까? 당신부터 교육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이거 참, 말이 안 통하네. 전무님, 오늘 막 회사에 오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김영수는 턱을 치켜들며 건방지게 말했다.

누가 보면 내 윗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과연 누가 현실 파악을 못 하는 건지 한 번 알아봅시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이소희를 바라봤다.

“차진만 상무를 불러오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지시에 이소희는 당황하면서도 서둘러 움직였다.

“차, 차진만 상무님은 갑자기 왜 부르는 겁니까? 애초에 그분과 아는 사입니까?”

“알죠.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친합니다만.”

“……!”

내 말에 김영수는 소스라치게 놀라 할 말을 잊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을 거로 생각했던 내가 무려 상무, 그것도 연차가 상당한 차진만 상무와 친하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은 곧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