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의 사람으로 만들어
원더우더를 출시하기 전까지만 해도 경리부에서 우려가 컸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비만 무려 삼억을 투자했다.
TV에 신문에 스타 마케팅까지.
중소기업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을 광고비에 쏟은 것이다.
더군다나 한 번에 삼십만 장을 생산한다는 사실도 부담스럽게 여겼다.
만약 재고를 끌어안게 된다면 그 손실은 천문학적이었다.
쁘띠엘르에서 엄청난 이익을 봐도 혜성 모직 전체에서는 적자가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성은 직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브랜드 출시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원더우더는 쁘띠엘르를 처음 출시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재고가 남기는커녕 추가로 생산해야 할 정도였다.
가맹점 가입을 희망하는 매장 역시 수십 곳이 넘었고 말이다.
“부사장님 정말 대단하지 않아? 어떻게 매번 이렇게 성공하실 수 있지?”
“완전 능력자셔. 사업에 천재적인 감각이 있으신 거 같아.”
“예술적인 감각도 뛰어나신 거 같던데. 부사장님이 직접 고르신 디자인은 무조건 성공하잖아.”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성을 칭송했다.
한성이 오고 나서 혜성 모직은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그냥 최고 실적도 아니었다.
연 매출만 무려 세 배 이상이 증가하였다.
그런데 원더우더의 성공으로 올해는 그 이상의 매출을 기록할 것처럼 보였다.
직원들로선 한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일이 많아졌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는 직원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봤을 때, 기획부장님도 예사로운 사람은 아닌 거 같더라.”
“그러게. 원더우더도 기획부장님이 직접 계획한 것이라며?”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물론 그 계획을 가다듬은 것은 부사장님이지만, 어쨌든 원더우더의 성공에는 기획부장님의 공이 커.”
“처음에는 그냥 낙하산 인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낙하산은 낙하산인데 실력이 좋은 낙하산이었던 거지. 마치 부사장님처럼 말이야.”
기획부장인 김종태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달라졌다.
원래 김종태는 기획부를 제외한 다른 부서에서 일종의 외부인 취급을 받았었다.
한성의 외사촌이란 이유로 오히려 가진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원더우더의 성공으로 이런 평판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됐다.
원더우더의 성공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면 상무 자리는 기획부장님이 갖게 되는 건가?”
“에이, 설마. 연공서열이라는 게 있는데?”
“기획부장님의 사촌 동생이 부사장님인데 연공서열이 뭐가 중요해? 게다가 이번에 공까지 세웠잖아.”
“그, 그런가?”
“내 말이 맞다니까?”
“만약 네 말이 맞다면 지금이라도 기획부장님에게 줄을 대야 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그래야지. 기획부장님이 사실상 회사의 2인자나 마찬가지신데.”
“어서 자리를 마련해 봐야겠네.”
* * *
노사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추진한 브랜드가 큰 성공을 하였구나.)
“제가 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종태 형이 거의 다 기획했으니까. 물론 노사께서도 많이 도와주셨고 말입니다.”
(겸손하게 굴기는.)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쨌든, 올해 매출도 기대 이상이겠어. 어쩌면 3백억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3백억이나요?”
(단순히 브랜드 하나가 늘어난 게 아니야.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매출을 증대시키고 있어. 교복 자율화 시대가 열리기도 했고, 가맹점 수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으니, 3백억대의 매출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아.)
“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작년의 300% 매출 증가율도 사실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그런데 노사의 말대로 올해의 매출이 삼백억을 기록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매출 증가율이 무려 500%였다.
‘혜성 모직이 혜성 개발 다음가는 계열사로 불릴 날도 머지않은 거 같은데?’
대기업에서도 연 매출 수백억 계열사는 흔치 않았다.
심지어 주력 계열사도 끽해 봐야 천억 단위였다.
혜성 건설도 마찬가지.
빅 4라 불리는 네 개의 대기업만이 조 단위를 기록할 뿐이었다.
“그렇게 매출이 잘 나온다면 종태 형을 상무로 승진시키는 것은 문제가 없겠군요.”
(아마 그럴 거다. 원더우더의 성공으로 사내 여론도 굉장히 좋아졌어. 상무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을 거야.)
“다행이군요. 이러면 안심하고 혜성 개발로 떠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 네 후임으로 올 부사장이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어지간해선 너의 지배력이 흔들리지 않을 거다.)
하기야, 혜성 모직의 내 지분만 20%였다.
직원 대다수가 나를 지지하고 있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부사장으로 이재성의 측근이 임명된다고 해도 종태 형이 있는 이상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혜성 개발은 어떻습니까? 이재성의 세력이 가장 크다고는 알고 있는데,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알려 주십시오.”
(간단하다. 사장이랑 부사장 빼고는 임원진은 전부 이재성의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해.)
“……임원진 전부가 이재성의 사람이라고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혜성 개발에 이재성의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재성이 몇 년이나 혜성 개발에서 근무했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세력을 구성하지 못했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임원진 대부분이 이재성의 사람이라는 건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냥 부서 몇 개에서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안에도 파벌이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다. 너 말고 나머지 두 전무도 사실상 대립 관계나 마찬가지지.)
“그래도 결국 이재성의 사람들이니 저를 배척하겠군요.”
(당연히 그럴 거다. 그들은 이재성을 후계자로 밀어주는 쪽이지, 절대 다른 사람을 밀어주는 쪽은 아니니까.)
“…….”
노사의 말을 들으니 혜성 개발을 장악하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울 거 같았다.
‘일단 노사를 믿고서 가는 거긴 한데, 괜히 불안해지는군.’
혜성 모직 때처럼 성과를 보인다고 사람들이 나를 따라줄 거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성과를 내려고 하면 기를 쓰고 방해하려 들 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갑갑하게 느껴졌다.
“회유할 만한 사람은 찾으셨습니까?”
(몇 명 정도는 무리 없이 회유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지만 가장 회유해야 할 사람은 혜성 개발의 대표이사다.)
“사장이요? 사장은 이재성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로 너의 사람도 아니지.)
“그건 그렇군요.”
노사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혜성 모직에 처음 입사했을 때가 떠올랐다.
만약 혜성 모직의 사장인 민제훈이 나를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최진수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회사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런 만큼 회사의 대표를 내 편으로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대표가 설령 민제훈처럼 실권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우선 계열사를 옮기기 전에 내가 만나라고 하는 혜성 개발의 임원들을 만나봐라. 돈을 조금 쓴다면 어렵지 않게 회유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계열사를 옮긴 뒤에는 어떻게든 혜성 개발의 대표이사를 너의 사람으로 만들어.)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한 주문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단 해 보는 수밖엔.
‘혜성 개발 사장이라. 자리보전을 약속해 주면 되려나? 아니면 돈을 줄까?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우려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나에겐 노사가 있었으니까.
* **
이재성은 당당한 발걸음을 하고서 타 부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혜성 건설의 영업 본부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상무님, 어쩐 일이십니까?”
40대 차장이 길을 막자 이재성이 까칠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못 올 곳 왔어요?”
“그, 그건 아닙니다만.”
“형님 출근하셨다면서요? 동생으로서 형 좀 보러 왔습니다.”
“……아.”
“아는 무슨. 길 막지 말고 나오세요.”
자신을 붙잡는 차장에게 거침없이 말하고는 전무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형님, 접니다.”
집에서는 따로 높임말을 쓰지 않지만, 회사에서는 나름대로 예의를 갖췄다.
물론 직급이 아니라 형님이라 부른 것만 봐도 공사 구분이 그리 철저한 편은 아니었다.
“네가 왜 왔어?”
“일단 들어갑니다.”
“꺼져!”
이준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이재성은 개의치 않고 문을 열었다.
“이 새끼가. 너 미쳤어? 중동에서 뭐 좀 했다고 내가 우습게 보이냐?”
“회사 오자마자 다시 쫓겨나고 싶어? 이런 일로 뭘 그리 흥분하고 그래?”
이죽거리는 동생의 모습에 이준성은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까불지 말고 용건만 말해. 할 말 없으면 지금 당장 꺼지고.”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와봤어. 형, 이한성 그놈 어떻게 할 거야?”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그 새끼 이야기는 왜 꺼내고 지랄이야?”
“마음에 안 드는 놈이잖아. 서자 주제에 나대도 너무 나대고 있어.”
“근데 뭐 어쩌라고?”
“형, 반응이 시원치 않다? 내가 형이었다면 그놈, 조폭을 동원해서라도 혼쭐을 냈을 거 같은데.”
그 말에 이준성은 콧방귀를 꼈다.
아무리 그가 다혈질이어도 그렇게 생각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그딴 짓을 해? 아버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말이야.”
“호오. 그러면 가만히 지켜만 본다고? 이거, 참 이상하네. 내가 아는 준성이 형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형은 당한 만큼 갚아 주는 성격 아니었어?”
이준성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실 그라고 한성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창업 기념식 때 한성이 자신의 비리를 폭로하는 바람에 그의 손발이 날아갔다.
평판이 낮아진 것도 타격이 컸고.
‘하지만 그놈, 절대 만만하지가 않단 말이지.’
그는 더 이상 한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토끼를 사냥할 때도 호랑이는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하물며 그는 호랑이가 아니었고 한성 역시 토끼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확실한 기회가 아니고서는 한성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그놈이 마음에 안 든다면 네가 한번 손을 써 보지 그러냐?”
“내가?”
“왜? 쫄았냐?”
“뭐? 내가 그놈한테 쫄렸다고? 진짜 형,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
“이한성 그놈, 개발로 간다는 소문 있던데. 그거 때문에 쫄은 거잖아.”
이재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로선 이준성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깟 서자 놈이 뭐라고 쫀단 말인가?
“진짜 어이가 없네. 내가 그따위 놈을 무서워할 이유가 어디 있어?”
“크크! 어디 한번 잘 상대해 봐라. 아마 쉽지만은 않을 거다. 뭐 너의 본거지에서 질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본거지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안 져. 아무튼, 형은 가만히 지켜만 본다는 거지?”
이준성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더 할 말이 없는지 이재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한성 그 자식이 도대체 뭐라고 난리를 치는지.’
그는 한성에 대해 티끌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한성은 그저 건방진 성격을 가진 철부지에 불과했다.
‘혜성 개발에 온다고? 그 소문이 만약 진짜라면, 나야 오히려 좋다. 안 그래도 혜성 모직에서 설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말이야.’
다른 계열사라면 그의 영향력이 닿지 않았다. 오랫동안 힘을 숨기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혜성 개발만큼은 달랐다.
혜성 모직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든, 한성이 혜성 개발에서 성과를 보일 날은 결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