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다시 고림 건설을 사
아침에 일어나보니 노사가 옆에 없었다.
나는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를 느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노사가 옆에 있음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생활이랄 게 없지 않은가.
심지어 돈을 많이 벌었는데도 나를 위해 쓸 수도 없었다.
사치 부리는 것을 경멸하는 노사가 옆에 꼭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근데 뭘 하지?’
원래라면 아침 운동 갈 시간이었다.
노사가 늘 하는 잔소리가 운동하라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노사가 없는 지금도 운동을 해야 할까?
‘그래도 러닝은 해야지.’
아침 러닝을 안 하면 뭔가 찝찝할 거 같았다.
습관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역시 상쾌하네.”
영하 5도.
조금 쌀쌀했지만, 겨울에 이 정도면 적당했다.
달리다 보면 체온도 올라갈 것이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때, 바로 옆에서 20대 중반의 여성이 말을 걸었다.
이 시간대에 자주 러닝을 하는 여성이었다.
원래는 ‘네’하고 짧게 대답했겠지만, 노사가 없어서 그런지 미인과의 대화를 계속 이어 가고 싶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서 자주 뵀었죠? 근처에 사세요?”
“혜성 아파트에 살아요. 달리는 게 취미라서 아침마다 나오고 있어요.”
“아, 저랑 같은 곳에 사시네요.”
“그러세요? 이웃이었네요. 반가워요.”
그녀가 상큼하게 웃었다.
이웃이라.
그 말을 들으니,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음…… 나이는 비밀로 할게요.”
순간, 아차 했다.
여자에게 나이 물어보는 건 실례라고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실수하고 말았다.
“대신, 이름을 알려드릴게요. 유지은이에요.”
다행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그녀였다.
“유지은 씨군요. 이름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저는 이한성입니다.”
“이름 멋지시네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유지은이 다른 길로 빠지자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냥 평범하게 대화를 나눠 봤을 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군. 내가 여자를 밝히는 성격은 아닌데 말이야.’
길어 봐야 3분도 안 되는 잠깐의 대화였다.
그런데 왠지 즐거웠다.
다음에도 그녀와 러닝을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출근을 준비했다.
“오늘은 조금만 천천히 가 볼까?”
명색이 부사장인데, 쫓기듯 출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느긋하게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뭐야? 평소보다 더 빠르잖아?’
언제나 정시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는데 오늘은 그보다 오히려 10분 더 일찍 도착했다.
이거, 부지런해져도 너무 부지런해진 거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출근하셨어요, 부사장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부사장실로 향했다.
“웬일이세요? 평소보다 일찍 오셨네요?”
“할 게 없어서 그랬습니다.”
농담처럼 그리 말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기도 했다.
나도 천성이 사업가인 것일까?
집에서 가만히 쉬는 것보다 회사에 나오는 것이 더 즐겁게 느껴졌다.
“커피 타드릴게요.”
이소희가 타 준 커피를 마시며 평소처럼 업무를 봤다.
사실 이제 웬만한 일은 노사가 없어도 혼자서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디자인을 기획하는 일도 가능했다.
물론 노사가 기획한 디자인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노사에게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아.’
특히 내년에 혜성 개발로 소속을 옮기면 배울 게 더 많아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부동산의 기초도 모르는 상태이니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노사가 옆에 없어서 편하군.’
나는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는 신은규에게 물었다.
“요즘도 가맹점 신청이 많이 들어옵니까?”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저희가 답변을 못 해 줘서 이 개월 이상 대기하고만 있는 매점도 있습니다.”
직영점을 포함해서 대리점 수가 벌써 백 개였다.
혜성 모직의 직영점은 불과 여섯 개였는데 정말 빠르게 확장했다.
“그건 좀 문제가 있군요.”
“인력도 부족하고 또 상권 중복이나 입지에 따른 영업지 재설정 등을 상의해야 해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최대한 인력을 늘려야겠습니다.”
“예. 기획부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직원을 많이 뽑아야 할 거 같긴 했다.
점장 교육을 담당할 부서도 새로 만들어야 했고 말이다.
“기획부장이 찾아왔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종태 형이 보였다.
나는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공적인 자리였기에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러자 종태 형도 경칭을 쓰며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전에 말씀드렸던 계획서를 준비해 왔습니다.”
“아, 새로운 브랜드요?”
“그렇습니다. 원더우더라는 이름의 브랜드입니다.”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계획서를 읽었다.
원더우더는 교복 자율화 시대를 맞이하여 기획부에서 준비하고 있는 또 하나의 브랜드였다.
이번에는 럭비, 카누, 승마부 같은 조금 더 고급적인 이미지를 가진 스포츠의 운동부와 우리 브랜드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융화하는 식으로 기획을 잡고 있었다.
조금 어중간할 수도 있지만, 쁘띠엘르의 인지도와 디자이너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실패는 안 할 거 같았다.
“괜찮은데요? 기획부에서 신경을 많이 썼나 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종태 형의 자질은 범상치 않았다.
업무에 적응하기도 벅찰 시점에 이렇게 거창한 계획까지 준비하다니.
심지어 실현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능력 하나로 시가총액 2백 조가 넘는 글로벌 기업의 임원이 됐다더니, 정말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종태 형을 기획부로 데리고 오길 잘했어.’
안 그래도 혜성 모직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종태 형이 제격인 거 같았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만약에 원더우더까지 성공한다면 내년 매출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쁘띠엘르보다 조금 더 고가라서 이윤도 많이 남을 터.
하지만 아직 노사의 조언을 듣기 전이기에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자신감이 생기긴 했지만 억 단위, 어쩌면 십억 단위의 투자가 필요한 브랜드 사업까지 내가 정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노사가 오면 결정을 내리는 게 현명해 보였다.
‘그나저나 종태 형에게도 슬슬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게 좋겠지?’
해가 바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내년이 되면 혜성 개발로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해야 했다.
종태 형은 나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미리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여러분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네!”
“마침 담배 피러 가고 싶었는데 잘 됐군요. 알겠습니다.”
비서들이 자리를 비우자 종태 형이 소파에 거의 눕듯이 몸을 파묻었다.
“아, 살 거 같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자유분방한 성격인데, 동생에게 깍듯이 대하는 게 종태 형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을 거다.
“근데 무슨 일이야? 비서들까지 내보내고? 뭐 중요하게 할 말 있어?”
“내년이 되면 계열사를 옮길 거야.”
“엥? 계열사를 옮긴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야.”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회장이 되기 위해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고 생각하면 돼.”
만약 나에게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졌다면 그냥 안정적으로 혜성 모직을 키웠을 것이다.
연 매출 수백억 정도야 무리 없이 키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원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혜성 그룹의 수명은 겨우 4년, 아니 이제 3년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혜성 모직보다 규모가 더 큰 계열사로 소속을 옮기는 게 좋았다.
“그럼 혜성 모직은 어떻게 되는 건데?”
“형이 맡아 줘야지.”
“내가?”
“상무가 마침 공석이잖아?”
“설마 나보고 상무하라는 거야?”
“형이 준비하고 있는 원더우더 브랜드 있지? 내가 가능성 있는지 조금 더 확인해 볼 테니까, 만약 내가 된다고 하면 그거 무조건 성공시켜. 성공시키기만 하면 내가 상무까지 승진시켜 줄 게.”
종태 형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공장장에서 기획부장으로 승진한 게 얼마나 됐다고 또 승진이야? 그게 진짜 가능해?”
“가능하지. 내가 누군데?”
“……맞다. 너, 회장님 아들이었지?”
“혜성 모직의 소유권은 나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형은 그냥 명분만 만들어 줘.”
“이 자식.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더 부담스럽게 만드네?”
“그래도 형은 할 수 있잖아?”
“너는 어떻게 나보다 나를 더 잘 믿냐? 나도 솔직히 확신이 없는데 말이야.”
그야, 형의 미래를 아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을 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종태 형은 걱정 반, 기쁨 반의 표정을 지었다.
* * *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아, 오셨습니까?”
노사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우면서도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뭔가 더 즐겼어야 했는데…… 차라리 담배라도 한번 펴 볼 걸 그랬나.’
역시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자유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고?)
“기획부에서 계획서를 제출했는데, 제법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었습니다. 내년에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자는 건데, 제가 봤을 때는 승산이 있어 보였습니다.”
나는 기획부에서 준비하고 있는 원더우더란 브랜드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5천 원에서 7천 원 사이의 가격대로 정했다는 것부터 승마복 비슷하게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디자인까지 설명하자 노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호오, 괜찮아 보이는데?)
“그렇습니까?”
(쁘띠엘르의 인지도를 이용한다면 나쁘지 않은 성과를 볼 수 있겠어. 다만, 원더우더 브랜드만의 독창적인 아이덴티티가 조금 애매한 거 같기는 하다. 그것만 어떻게든 보완하면 되겠는데?)
원더우더만의 독창적인 아이덴티티라.
노사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조금 애매한 느낌이긴 했다.
기획부와 회의를 해서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만들어야 할 거 같았다.
‘역시 노사의 조언을 듣길 잘했어.’
나는 속으로 뿌듯함을 느끼며 화제를 전환하였다.
“그리고 종태 형에게 다른 계열사로 소속을 옮긴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잘 했다. 슬슬 이야기할 때가 되긴 했지.)
“종태 형이 원더우더 브랜드를 성공시킨다면 상무로 승진시키면 될 거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민제훈에 종태 형까지 있으니, 너도 안심하고 혜성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겠어.)
“그런데 가신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재성을 관찰한 것은 별로 성과가 없었다. 하루 이틀 관찰하는 거로 약점을 찾기는 어려울 거 같더군.)
“아, 그런가요?”
아쉬웠다.
이준성처럼 확실한 비리를 알아낸다면 마음이 놓였을 텐데.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이재성의 약점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걸 알아냈으니까.)
“중요한 거라면……?”
(다시 고림 건설을 사. 큰손들이 곧 작전을 시작할 거다.)
그 말을 듣자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주식을 다시 한다니?
그렇다면 올해 5월에 겪었던 그 천문학적인 수익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건가?
‘만약 이번에도 작년처럼 400%의 수익을 본다면 내 돈이 얼마야. 헉. 4백억?’
4백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