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수틀리면 통째로 인수하지 뭐
벤케이라는 일식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참석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네 명이었다.
“더 많이 데려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김한선 상무께서 미안해하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제가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건데요.”
원래는 열 명 정도 부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재성 때문에 일곱 명이 떨어져 나갔다.
이재성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참석하겠다던 사람들이 이재성 핑계를 대며 불참한 것이다.
“이재성 상무가 협박하지만 않았으면 더 많은 인원을 부를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재성.
전부터 그리 생각했지만,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이딴 식으로 시비를 걸다니. 이준성이 나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벌써 잊어버린 건가?’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니, 적대 관계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이렇게 예고도 없이 공격을 하면 나로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비열하게 내 쪽에 붙으려는 임원들을 협박하다니.
‘이재성도 이재성인데, 겨우 협박 전화 한번 받았다고 손절하는 놈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제아무리 이재성이 회장의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유력해졌다지만, 지금 당장은 상무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직급이 같은 상무, 심지어 전무까지도 이재성의 협박에 굴복하였다.
이재성은 두려워하면서도 나와 척을 지는 것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이게 지금 내 위치였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이 자리를 함께해 주셔서 위안이 됩니다. 여러분도 후환이 두려웠을 텐데 말입니다.”
“바늘 가는 데 실도 가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애초에 이재성 상무가 두려워서 부사장님을 뵙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내 말에 최훈현 부장과 이정협 상무가 각각 답했다.
그러자 김한선 상무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우리 이참에 확실하게 노선을 정하는 게 어떨까요?”
“노선이라니요?”
“이한성 부사장님을 주군으로 모시는 겁니다.”
“……!”
뜬금없는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주군이라니?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정말 이상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훈현 부장과 이정협 상무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마치 그가 그런 말을 꺼낼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즉에 주군으로 모셨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해둘 기회가 생겼으니 다행입니다.”
“부사장님! 저희의 주군이 되어 주십시오.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 역시 부사장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른 채,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자 노사가 호통을 쳤다.
(뭘 하고 있어? 어서 받아들여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나의 가신이 된다는 뜻이었다.
가신이란 개념은 나에겐 낯설게만 느껴졌지만, 의외로 재벌가에선 흔히 쓰이는 개념이었다.
진봉현 비서실장도 이한철 회장의 가신으로서 혜성 그룹이 아닌, 이한철 회장 개인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배를 갈아탈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부사장님과 끝까지 가 보고 싶습니다!”
“설령 후계 경쟁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저희를 먹여 살릴 능력은 충분하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세 사람의 확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비록 파벌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실패했지만 진정한 내 사람은 찾아낸 거 같았다.
* * *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군.)
노사의 말에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예. 가신이란 게 뭔가 어색하긴 해도, 든든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뭐, 그렇다고 너무 신뢰하지는 마라. 왕조 시대에서도 절대적인 충성은 흔하지 않았어. 하물며 재벌은 말할 것도 없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재성, 그놈이 생각보다 일찍 손을 쓰는구나. 태생이 오만한 놈이라서 너를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원래는 안 이랬습니까?”
(나 때는 견제할 필요도 없었지. 아직까지도 회사 생활에 적응하는 단계였으니까. 그리고 이재성, 그놈도 원래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었어.)
“그렇습니까?”
(이준성이 빈틈을 보일 때까지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 그러다 혜성 그룹이 먼저 무너지면서 나가리 되었지만.)
이재성은 여러모로 내 덕을 많이 본 듯싶었다.
나로선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이재성이 저를 귀찮게 할 거 같은데, 어떻게 복수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준성 때도 그랬지만 나는 당하면 당한 만큼 갚아 주는 사람이었다.
아직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어도 이재성이 나를 상대로 수작을 부린 게 밝혀진 이상,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당한 피해만큼은 그대로 갚아 주고 싶었다.
(혜성 개발을 네 것으로 만들어. 그게 지금으로선 최고의 복수다.)
“확실히 최고의 복수이긴 하겠네요.”
내가 혜성 모직을 장악하고 있듯, 이재성은 혜성 개발을 장악하고 있었다.
건설로 소속을 옮긴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재성의 것이라 할 수 있는 혜성 개발을 내가 빼앗는다면 최고의 복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다른 방법은 또 없습니까?”
(하나 더 있긴 하다.)
“어떤 겁니까?”
(이재성의 측근을 너의 사람으로 만드는 거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가능해요?”
(안 될 건 없지. 돈으로 매수해도 되는 일이니까.)
“아…….”
하기야, 돈이면 안 될 게 없었다.
물론 돈으로 매수한 사람을 내가 신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가능만 하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 같습니다. 복수도 하면서 실질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재성의 측근을 내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은 첩자를 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보를 얻기도 수월해질 것이다.
(좋아. 그러면 내가 한번 이재성의 주변을 조사해 보지. 이재성도 빈틈없는 성격은 아니어서 허술한 구석이 분명 있을 거다. 어쩌면 이준성 같은 꼴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부탁드리겠습니다.”
(쯧. 그나저나 안 그래도 조사할 게 많은데, 이재성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히게 생겼어.)
“요즘은 뭘 조사하고 계십니까?”
노사는 굉장히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서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다.
나를 위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모으는 것이다.
(큰손들 위주로 조사하고 있다.)
“큰손들이요? 그 사람들을 왜 조사하십니까?”
(일성 전자에 투자한 돈, 계속 놔두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작년처럼 주식 좀 해 보려고 준비하는 중이다.)
주식이라.
하긴, 다시 시작할 때도 됐다.
일성 전자가 비록 은행 예금보단 낫다지만, 그래봤자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수익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 회장에게 갚을 이자까지 생각하면 수익률이 이십 프로도 안 될 정도였다.
물론 반년 만에 이십 프로면 엄청난 수익률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재성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올 테니 당분간 알아서 잘하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이제는 노사가 옆에 없으면 괜히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노사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으니까.
노사는 그런 나의 모습에 만족했는지 흐뭇한 얼굴을 하고는 사라졌다.
* * *
‘많이 성장했군.’
전에는 과거의 자신을 볼 때면 어리석고 한심하게만 느껴졌었다.
생각이 짧을 때도 많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와 말보다 행동이 앞서서는 안 될 때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감정 조절도 잘 못 하는 편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성은 부족한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쑥스러워하던 모습조차 이제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당장 회장이 되도 잘하겠는데?’
뿌듯했다.
자신이 제자 하나는 제대로 키운 거 같았다.
물론 그 제자가 자기 자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내가 반드시 너를 최고의 재벌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주마.’
노사의 1순위 목표는 가족의 행복이었다.
그다음이 바로 한성의 기업인으로 성공시키는 것.
1순위 목표는 이미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원래라면 몇 달 전에 돌아가셨을 어머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셨다. 요즘은 취미로 요리를 배우고 있을 정도였다.
동생인 지현이도 아무 문제 없이 대학 생활을 하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무척이나 원만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노사는 2순위 목표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한성을 대기업 회장,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기업 회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노력 덕분인지 제법 괜찮은 성과를 보고 있었다.
어느덧 혜성 그룹의 후계자 자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성, 그놈에게 붙은 놈이 겨우 세 놈뿐이라지?”
“하하, 그렇습니다. 그 세 놈도 별 볼일 없는 자들입니다. 무시해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서자 놈이 지금쯤이면 제 주제를 파악했겠군.”
이재성.
바로 이 방해꾼만 사라진다면 한성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리라.
“형님의 수하들은 잘 감시하고 있지?”
“예. 그런데 업무에만 충실히 하는 것을 보면, 이준성 전무가 다시 출근할 때까지 조용히 있을 거 같습니다.”
“구설수에 오를 짓은 안 하겠다는 건가. 뭐 좋아. 지금 당장은 가만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일이지. 우리도 당분간 자중해. 괜히 건방 떨고 다니다가 사고 치지 말란 말이야.”
“예!”
이재성의 모습을 지켜보던 노사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무시했었는데, 부하들을 잘 휘어잡고 있군. 쉽게 빈틈을 찾기는 어렵겠어.’
노사는 잠시 이재성의 주변을 관찰하였다.
가진 현금은 얼마이고, 그를 따르는 인사들은 누구인지.
하지만 몇 시간에 걸쳐 관찰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아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재성이 그렇게 허술한 성격은 아닌 듯싶었다.
‘뭐 그래 봤자 시간문제다. 네놈이 나에게까지 약점을 숨길 수는 없을 거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지금 당장 건질 만한 것은 없어 보였기에, 다른 사람부터 조사하고자 했다.
‘박산영. 아무래도 이자가 대모의 대리인인 거 같단 말이지.’
최근 들어 노사는 주가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손들의 대리인을 파악해나가는 중이었다.
주식을 다시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지금까지 주식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나비효과가 두려워서였다.
큰 줄기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세세한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터.
괜히 미래 정보만 믿고 주식에 손을 댔다간 큰 손해를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일성 전자를 비롯한 전자주, 제약주 일부에만 주식을 투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식을 손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한성을 이 나라 최고의 재벌로 만들려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노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큰손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박산영이 대모, 백희연의 대리인이 맞다면 큰손에 관한 모든 정보를 손에 쥘 수가 있다. 그리고 큰손들의 정보만 있다면 주식으로 돈 버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큰손이 들어가면 주가가 상승하고 큰손이 돈을 빼면 주가가 곤두박질하는 시대였다.
만약 큰손이 손을 쓰기 전에 큰손의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린아이도 엄청난 수익을 보는 게 가능했다.
(내년에는 한성의 현금을 최소 5백억으로 만들고 만다. 수틀리면 혜성 건설을 통째로 인수할 수 있게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