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슬슬 계열사를 옮기는 게 좋겠어
-이한성 부사장님,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약속을 취소해야 할 거 같습니다.
“강 사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렇게 됐으니, 다음에 봅시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충구.
그는 혜성 관광호텔 사장이었다.
물론 이전의 혜성 모직처럼 비중이 큰 계열사는 아니었다.
1년 매출이라고 해 봤자 백억도 안 됐으니.
하지만 회사의 규모가 어쨌든 한 회사의 사장이었다.
내 사람으로 만든다고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배신을 해?’
아직 배신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나와의 만남을 피할 이유는 뻔했다.
다름 아닌, 이재성 때문이었다.
(확실히, 천억짜리 수주의 영향이 크긴 크구나. 그룹 내의 분위기가 이렇게 확 바뀌다니 말이야.)
노사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혜성 그룹 임원진 사이에서는 나를 유력 주자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한철 회장이 나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매출 20억짜리 회사를 60억으로 만드는 엄청난 성과까지 이뤄냈다.
직급도 단번에 부사장까지 올랐고 말이다.
나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엉덩이 무거운 혜성 건설의 임원들이 직접 나를 찾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같은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세력을 만들려고 할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재성이 찬물을 끼얹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방위군사령부가 발주한 킹칼리드 사관학교 숙소 신축공사의 규모는 무려 일억 3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무려 천억에 가까운 수주 금액이었다.
이재성은 단 한 번의 활약으로 그룹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했다.
‘무슨 공사 하나의 규모가 천억이나 하냐.’
나로선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내가 혜성 모직을 키우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전년도보다 매출을 세 배 이상 늘렸다.
겨우 반년만의 성과였다.
그런데 이재성은 수주 하나 따낸 거로 나의 성과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연 매출 60억을 기록해 봤자, 천억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이래서 건설, 건설하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혜성 건설로 자리를 옮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진짜로 옮긴다면 최진수가 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견제를 받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황당하군. 이재성은 이번 수주 공사와 조금도 연관이 없는데, 언론은 마치 그놈이 모든 일을 주관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
“이재성이 해낸 게 아니었습니까?”
(숟가락만 얹었을 거다. 이번 수주 공사는 원 역사에서도 있었던 일인데, 그때는 이재성이 중동으로 가지도 않았었거든.)
그 말을 들으니 괜히 더 기분이 나빠졌다.
결국 이재성은 손 하나 까닥 안 하고서 어부지리를 취했다는 뜻이 아닌가.
‘이준성이나, 이재성이나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야.’
형제라는 것들이 저런 놈들뿐이라니.
한숨만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일단 계속 인맥을 관리해 봐라. 이참에 적아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니 말이야.)
박쥐를 가리자는 건가?
확실히 그럴 필요가 있어 보이기는 했다.
한성 그룹에는 중립파를 자처하며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붙는 박쥐가 너무 많았다.
진짜로 사내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이한철 회장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매출도 꾸준히 늘려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건설 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규모였지만, 매출이 백억 단위가 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 매출 백억이면 중견 기업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혜성 그룹 안에서 계열사 순위를 매기자면 4위 안에 들 정도였다.
뭐, 애초에 혜성 그룹은 건설과 임대 쪽이 독보적인 기업이었지만.
(그리고 슬슬 계열사를 옮길 준비도 하는 게 좋겠어.)
“벌써요?”
(상황이 달라졌으니 대응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이재성이 저리 나온 이상, 너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이제 막 회사 권력을 장악했건만…….
그러나 노사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가 지금 시점에 계열사를 옮기라고 했으면 옮기는 게 맞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옮기는 게 좋을까요? 원래 계획했던 대로 유통 쪽?”
노사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정부에서, 정확히는 상공부에서 유통 산업의 현대화를 꾀한다고 한다.
유통 산업의 현대화에 사용될 자금만 3천 억.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유통, 레저 붐이 돌 것이다.
혜성 모직에서 그랬듯이, 지금 시점에 혜성 유통에 들어가면 여러모로 득을 볼 게 많을 거 같았다.
(개발로 가야 한다.)
“혜성 개발이요? 하지만 거기는 이재성이 있던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거기를 가야지. 네가 거기를 장악하면 이재성은 큰 힘을 잃게 되는 거야.)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적지나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과연 지금 시점에 혜성 개발을 가는 게 맞는지 의문이었다.
“부동산이나 임대는 아예 알지 못하는데 괜찮을까요?”
혜성 모직은 그나마 내가 아는 업계였다.
하지만 혜성 개발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지 않으냐.)
“…….”
늘 그렇듯 자신감 넘치는 노사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서울시 건설국장 출신이었다가 올해 혜성 건설 사장으로 취임한 김명운은 자신보다 서른 살은 어려 보이는 청년을 보며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먼 길을 갔다 왔는데 피곤하지 않나? 조금 더 쉬지 그랬어.”
“이틀 쉬었으면 충분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중동인데 말이야.”
“하하, 괜찮습니다.”
“자네가 괜찮다면야. 그나저나, 정말 장한 일을 했네! 어떻게 그렇게 큰 규모의 공사를 수주해냈나?”
김명운 사장으로선 눈앞의 청년, 이재성이 반갑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룹이 한창 어려울 때, 사우디에서 무려 천억에 가까운 규모의 수주 공사를 따왔으니 말이다.
“심지어 아랍 아르리칸 뱅크에서 차관까지 받아왔다지?”
수주 공사만 따온 게 아니었다.
국제은행 차관단으로부터 무려 오천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하는 계약까지 성사시켰다.
요즈음, 그룹의 모든 임직원을 통틀어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별일 아닙니다. 제가 중동 쪽에 아는 분들이 많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하!”
“역시나! 인맥까지 대단하군? 건설로 오길 잘했네. 정말 잘했어!”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재성은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러자 김명운 사장의 표정이 더욱더 환해졌다.
‘장남과는 완전히 다르구먼! 차남이 훨씬 더 인재였어.’
만약 이준성이 이 같은 공을 세웠다면 아주 기세등등했을 것이다.
사장인 김명운 앞에서도 콧대를 세웠을 터.
하지만 이재성은 달라 보였다.
그가 보기에 이재성은 일도 잘하는데 성격까지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존재감이 흐릿했다는 게 의문일 정도였다.
“저는 이만 일 보러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예,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마지막까지 예의 바른 인사를 하던 이재성.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측근들 앞에선 김명운을 비웃기 바빴다.
“사장은 수주 공사를 어떻게 따냈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야.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눈이 없는 건지. 뭐가 됐든 나야 좋지만 말이야. 후후.”
“상무님의 자리를 잠시 맡는 사람에 불과한데 아는 게 뭐 있겠습니까? 그 작자는 아마 회사 돌아가는 꼴도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요. 경력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합니까. 현장을 모르는 책상물림인데.”
그의 측근들도 사장인 김명운을 우습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였다.
후계 경쟁에서 사실상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기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나저나 우리 형님께서는 아직도 집에서 쉬고 계시나?”
“예. 이준성 전무는 아마 내년이 되어서야 업무에 복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년? 푸하하! 오래도 쉬시는군. 그냥 평생 쉬셔도 좋을 텐데 말이야.”
“곧 그리되지 않겠습니까? 상무님께서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신다면 말입니다.”
“후후. 맞아, 곧 그리될 테지. 그런데 우리 형님 꼴도 참 우습게 됐군. 서자 놈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다니 말이야.”
이재성은 조소를 지었다.
비록 그가 뒤에서 부추기기는 했지만 일이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도 오히려 당하다니.
결과적으로 이재성에게 좋은 일이 되었지만, 이준성이 한성을 상대로 보여 준 모습은 끔찍할 만큼 한심스러웠다.
‘저런 놈이 나와 형제라는 게 쪽팔릴 정도야.’
만약 자신이 장남으로 태어났으면 진즉에 후계자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이재성이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는데 그의 측근 중 한 명인 박찬흥 토목 이사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서자 놈, 이한성 부사장을 조금 견제하기는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견제? 지금 나보고 이한성 따위를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나?”
박찬흥의 말에 이재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가 이준성 앞에서 한성을 경계해야 한다느니, 아버지가 한성을 총애하고 있다느니 그런 말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이제이 선상이었다.
즉, 이준성과 한성을 싸우게 만들기 위해 과장해서 말한 것.
실제로는 한성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세력도 없고 나이도 어렸다.
이준성의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인 것을 보면 기개는 당당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기개 하나로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이한철 회장이 한성을 총애하는 일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리 능력 우선주의라지만, 적자와 서자의 차이는 분명했다.
창업자라면 그깟 출신이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재벌 2세부터는 달랐다.
서자 출신일 경우 다른 재벌들에게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아마 혼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이한철 회장도 생각이 있다면 절대 한성에게 회장직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데려온 것은 아닐 테야. 그저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데려온 거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성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혜성 모직에서 보인 성과가 만만치 않습니다. 연 20억 매출을 60억으로 만들었는데, 직원들 사이에서도 호평이 자자하답니다.”
“저 역시 이한성 부사장은 경계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서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쓰입니다. 물론 회장님께서 그자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 요즘, 이한성 부사장이 파벌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진지한 생각으로 후계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이재성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측근들이 이렇게까지 한성을 경계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듣다 보니, 아예 무시할 이야기들은 아닌 거 같군. 아버지의 반응이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고.’
한국으로 왕의 귀환을 한 날, 그는 이한철 회장에게 후계자의 자질을 인정받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한철 회장이 그를 대하는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마치 그의 성과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뭐, 좋아. 놈이 위협적이라면 싹을 잘라 버리면 그만이다. 놈에게 붙으려는 임원들 있지? 전화 걸어서 협박해. 누구의 편에 설지 확실히 정하게 만들란 말이야.”
파벌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기만 해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다.
혜성 모직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이한성 그놈에게도 한번 연락해 보는 게 좋겠어. 이대로 계속 나와 후계 경쟁을 할 것인지, 아니면 혜성 모직 하나를 갖고서 후계 경쟁을 포기할 것인지를 고르게 하는 거지. 흐흐!”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이한성 부사장도 생각이 있으면 혜성 모직으로 만족할 겁니다.”
“맞습니다. 주제 파악을 하고 있다면 후계 경쟁을 포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재성은 확신했다.
양자택일의 기회를 준다면 한성은 반드시 혜성 모직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이다.
‘비천한 서자 놈에게 매출 육십억짜리 계열사 하나도 감지덕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