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적당히 어울려줘
이한철 회장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진봉현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봉현이. 자네는 이번 일 어떻게 보나?”
“혜성 모직의 부사장이 검찰에 기소된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일.”
진봉현 비서실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일단 정부에서 우리 그룹을 노린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정부에서 권력을 행사한 거라면 굳이 혜성 모직만을, 그것도 일개 부사장을 노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노렸으면 나를 노리거나 내 자식들을 노렸지, 최진수 같은 떨거지를 노리진 않았을 거야.”
“물론 다른 기업에서 움직인 것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검찰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나?”
“저는 아무래도 이한성 도련님이 개입하신 거 같습니다.”
그의 말에 이한철 회장은 예상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최진수가 기소됨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한성이었다.
누구라도 한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룹 임원들 사이에서는 한성이 손을 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한성 도련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셨을 겁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한성이 한 일을 나쁘게 보지 않고 있으니.”
“그렇습니까?”
“검찰을 이용한 게 뭐 어때서? 애초에 내가 직접 지검장을 소개해 줬는데 말이야.”
“…….”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거 같아서 마음에 들어. 모름지기 사업가라면 과감성도 있어야지.”
정말로 마음에 들었던 건지, 이한철 회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미 힘의 균형은 압도했다 들었는데 검찰까지 대동해서 적을 처리하다니. 자비는 없다, 이건가?’
외부인을 끌어들인 건 사실 좋게 볼 수는 없었다.
만약 한성이 평범한 임원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제재를 가했을 터.
하지만 한성은 그의 아들, 그것도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유력한 아들이었다.
아버지 입장에서 봤을 때 한성의 행동은 결코 탓할 일이 아니었다.
적을 상대로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한 것뿐이었으니까.
그 과감성은 오히려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한성이를 승진시키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이한성 도련님의 역량과 성과는 누구도 부정하거나 깎아내릴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룹 임원들도 찬성했으면 찬성했지, 반대할 일은 없을 겁니다.”
매출이 전년도보다 무려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십 년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회사가 한성이 개입한 이후로 상전벽해라 할 정도의 발전을 이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한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그의 능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부, 부사장 말씀이십니까?”
“마침 부사장 자리가 비었잖아. 혜성 모직은 그 어느 때보다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인데, 한성이 부사장 자리에 앉는 게 제격이지 않겠어?”
그의 말에 진봉현 비서실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상무에서 부사장으로 진급하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상무가 된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파격을 넘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성급한 게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임원들이 전무까진 이해해도 부사장까지는 이해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자네도 알지 않은가. 내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나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길어 봐야 십 년이겠지.”
이한철 회장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관리만 잘 해 주신다면 만수무강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아무튼, 내 건강을 생각하면 신속히 후계자를 정해야만 해.”
“후계자는 이한성 도련님으로 정하신 겁니까?”
“아직 더 봐야겠지. 하지만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 언제든 내 자리를 물려줄 수 있게 미리 준비해둬야 하지 않겠어?”
“음…….”
“자네가 임원들을 잘 설득해 봐. 최대한 반발이 없게끔 말이야.”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만, 두 도련님이 어떻게 나올지···.”
가장 반발할 사람은 임원들이 아니었다.
한성의 경쟁자인 이준성과 이재성.
바로 이 두 사람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었다.
“그 두 놈이야 어쩔 수 없지. 한성이가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뭐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 왔지 않나?”
여전히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이준성을 생각하며 이한철 회장은 피식 웃었다.
* * *
쁘띠엘르는 계속해서 성장세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기획부 직원들이 이 같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브랜드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 높아졌으니, 슬슬 고가 제품을 출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 역시 고가 제품을 출시하여 백화점에 입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직원들이 이 같은 자신감을 내보일 정도로 쁘띠엘르의 인지도는 상당했다.
‘확실히 고가 제품을 출시하면 매출이 크게 늘어나기는 하겠지.’
아직도 중소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혜성 모직이었다.
지금의 인지도를 유지한 채 고가 제품을 출시한다면 몇 년 안에 중견 기업을 넘어 대기업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한 수 앞만 보는 행동이지.’
직원들이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경영자였다.
나만큼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사업을 꾸려가야 했다.
“여러분. 초심을 잃지 마십시오. 우린 계속해서 젊은 층을 공략해야 합니다. 세련되면서 실용적인, 그러면서 가격까지 저렴한 제품! 이게 우리의 아이덴티티입니다.”
고가 제품을 출시하는 것?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브랜드 인지도를 확실하게 구축하는 것이었다.
유행이란 늘 그렇듯 일시적인 속성을 가졌고, 우리 브랜드 역시 한때의 유행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인지도만 믿고 고가 제품을 출시하는 것은, 결코 해선 안 되는 선택이었다.
우린 우리만의 뚜렷한 아이덴티티로 계속 밀고 나가야만 했다.
“요즘은 소비자 고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제품에 문제가 생긴 경우 즉시 환불해 주고 있습니다.”
“가맹점에서도 매뉴얼이 지켜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십시오.”
“예, 매뉴얼을 지키지 않을 시 받게 될 불이익에 대해 확실하게 주지시키겠습니다.”
나는 아이덴티티를 지켜가면서도 고객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10월부터 소비자 보호법이 시행되면서 물품 구매에 따른 소비자 고발이 늘어나고 있었다.
다른 점포들, 심지어 백화점에서도 소비자 고발을 무신경하게 대응하였다.
하지만 쁘띠엘르는 달랐다.
봉제 부분이 터졌다던가, 원단 자체에 문제가 있을 경우 반드시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거나, 환불해 주었다.
그리고 이 같은 매뉴얼은 가맹점에서도 철저하게 지키게끔 하였다.
서비스만큼은 백화점 못지않다는 뜻이었다.
“부산에서 이번 달에만 열 개가 넘는 매장에서 가맹점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열 곳이나요?”
지켜야 될 매뉴얼이 많은데도 가맹점 신청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의 인지도가 상당하다는 의미였다.
뚜렷한 아이덴티티와 친절한 서비스 정신, 그리고 세련된 디자인이 합쳐지면서 인지도를 계속 높여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세대로 간다면 내년에 연 매출 2백억대 돌파도 가능하지 않을까?’
올해도 전년에 비해 300% 이상 성장했다.
지금의 성장세를 유지한다면 내년에 2백억 매출을 찍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았다.
‘근데 내년에는 내가 다른 계열사로 옮겨야 한단 말이지.’
혜성 모직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성과는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러니 내년이 되면 다른 계열사로 가서 또 한 번의 기적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나를 증명해야지만, 혜성 그룹의 모든 임직원이 나를 인정할 것이다.
‘어떻게든 내년 상반기에 백억 매출을 찍어 보자.’
백억을 찍냐, 못 찍냐는 엄청난 차이.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 * *
따르릉!
한창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사, 상무님. 회장님께서 전화 주셨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말입니까?”
“예.”
이소희에게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한성이냐? 용건만 간단히 말하마. 이번에 너를 부사장으로 승진시키기로 결정 내렸다.
“……!”
눈을 부릅떴다.
기대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간단히 부사장으로 승진할 줄이야.
-그리고 지분도 줄 생각이다. 매출이 얼마라고 했지?
“얼마 전에 60억을 돌파했습니다.”
-40억을 목표치로 정했는데, 60억이라. 정말 기대 이상이야.
설마 지분도 더 주려나?
-정식으로 인사 명령이 떨어지는 날에 내 지분 20%를 넘겨주마.
하지만 아쉽게도 지분은 원래 주기로 했던 20%였다.
나는 쓴웃음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뭐든지 지나치면 해로운 법이었다.
부사장 자리를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하면 될 일.
“감사합니다.”
-끊으마.
이한철 회장은 정말로 용건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뭔가 아쉬운 기분이군.’
전화가 짧으면 나로선 나쁠 게 없는데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 인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게 찝찝한 모양이었다.
“회장님께서 어떤 이유로 전화를 주셨나요?”
이소희가 기대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비서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저를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준답니다.”
“예에!?”
“저, 정말입니까?”
“허어. 믿기지 않는군요.”
하나같이 놀란 얼굴들이었다.
심지어 신은규까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서들도 내가 승진하는 것을 기대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부사장까지 승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나는 비서들의 얼굴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분도 받고 부사장 자리까지 얻었으니, 여러모로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이준성 그놈도 이제 나보다 직급이 낮군. 뭐, 혜성 건설의 전무가 혜성 모직의 부사장보다 급이 더 높기는 하지만 말이야.’
위는 아니어도 동등한 위치에 선 것은 분명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 *
일주일이 지나고 부사장 취임식이 열렸다.
5월에 처음 입사했으니 반년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한 것.
짝짝짝!
직원들의 열렬한 박수갈채에 나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저 중에는 나와 마찰이 있었던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털어냈다.
오늘부턴 기획부고 생산부고 영업부고 그런 구분이 무의미했다.
모두 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취임식이 끝난 뒤,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을 일일이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이한성 상무님. 아니, 이제는 부사장님이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사장님! 가능하다면 저와도 시간을 내주십시오.”
“아, 예. 그러죠.”
“벌써 부사장이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았다.
심지어 엉덩이가 무거운 혜성 건설의 임원들까지도 나에게 접근하였다.
그룹 임원들도 이제 나를 유력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접근하는 것도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회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김한선이나 몇몇을 제외하면 박쥐나 다를 게 없는 놈들이지만, 그래도 회장이 될 때까지는 적당히 어울려 줘라. 이들만 확실하게 너의 편으로 삼는다면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사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조금 껄끄러운 이들도 있었지만, 회장이 될 때까지는 최대한 어울려 주리라.
물론 회장이 된 이후에는 좌천을 시키든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부사장이 된 나는 인맥 관리에 주력하였다.
내 세력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이 중동에서 날아왔다.
사우디로 떠났던 이재성이 사우디 정부로부터 무려 일억 삼천만 달러 상당의 주택공사를 따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