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너를 보는 얼굴들이 심상치 않아
내 말에 이준성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주변에서도 경악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직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선 지금 상황이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사업 잘 풀린다고 아주 기고만장하네? 너 진짜 죽고 싶냐?”
이준성이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 소리가 들렸다.
워낙 그의 악명이 상당하다 보니 나를 우려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당당하게 말했다.
“죽인다는 협박 좀 그만하지. 혜성 가의 장남이면서 수치도 모르나?”
“이 새끼가…….”
“전에도 말했지? 때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때려보라고. 어디 사람 많은 데서 복싱이라도 해보자.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손해일까?”
분노한 이준성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역시 욱하는 성격답게 참는 법을 몰랐다.
“전무님! 참으셔야 합니다. 회장님이 곧 들어오실 겁니다.”
“싸워봐야 전무님만 손해입니다. 상대는 서자이지 않습니까.”
측근들이 나서서 말리자,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이준성이었다.
“사이가 안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러게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사람 있는 장소에서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다니.”
“성격이 그런데 어쩌겠어. 나는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는 이한성 상무의 모습이 의왼데?”
하지만 웅성거리는 임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준성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고작 혜성 모직 상무 주제에 그따위로 행동하다니. 혜성 모직에서 성과 좀 낸다고 뭐가 달라질 성싶으냐?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계열사다. 거기서 무슨 짓을 하든, 네놈의 지위가 달라질 일은 없을 거야!”
씩씩거리던 이준성은 애써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그 같이 도발하였다.
“적어도 당신처럼 지위가 낮아질 일은 없겠지.”
“뭣이?”
“이번에 또 사고를 쳤던데? 아, 회장님도 아직 모르시려나?”
“뭔 개소리야?”
“안양 뉴타운 공사. 거기서 자재 대금을 착복하고 있잖아. 2억 단위로 거창하게 해 먹는데 설마 아무도 모를 줄 알았나?”
“……!”
이준성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측근들과 이사들의 얼굴도 충격으로 하얗게 질렸다.
그들로선 까무러치게 놀랄 일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비리가 나의 입에서 만천하에 공개되었으니.
‘조금 아깝기는 한데, 뭐 어쩔 수 없지.’
원래는 나중에 써먹으려고 했던 정보였다.
관계된 임원이나 직원이 워낙 많기에 내가 회장이 되면 한 번에 숙청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이준성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상, 확실하게 내 존재감을 알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형에게 예의가 없다느니, 성격이 모질다느니 그런 소문만 퍼지게 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되지도 않는 놈이 계속 도발하는데 말이야.’
이래 봬도 내가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이준성이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다 해도, 지고는 못 살았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과정까지 알려줘야 하나? 신옥실업, 양조상시, 국동제각 이렇게 세 개의 회사로부터 합판과 목재를 사들이는 것처럼 꾸민 뒤에 모조리 가로챘잖아?”
이준성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확실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저, 전무님 일단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이준성은 측근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너 이 새끼, 나중에 보자.”
“다음엔 같은 상무로 봤으면 좋겠네. 아니, 내가 전무에 오르고 당신이 상무가 되면 더 좋겠고.”
솔직히 상무가 아니라 아예 감방에 가는 게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한철 회장이 자신의 자식을 징역 살게 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뭐 그렇다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볍게 넘어가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다.
(존재감을 어필하는 것엔 성공한 듯싶다. 너를 보는 얼굴들이 심상치 않아.)
노사의 말을 듣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나를 보는 시선이 확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이방인 보듯 이상하게 바라봤었는데, 지금은 더욱 더 다양한 얼굴들이었다.
그중에 대부분은 경계심을 내비쳤지만, 다행히도 일부는 ‘호감’을 드러냈다.
이준성의 비리를 까발린 게 결코 손해는 아닌 거 같았다.
“이 상무, 대단하군. 이런 자리는 처음일 텐데, 벌써 그렇게 활약을 하다니 말이야.”
민제훈.
혜성 모직의 사장인 그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별거 아닙니다.”
“하하하! 자네는 정말 겸손한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통 구분이 안 가. 역시 왕이 될 사람이라 그런가?”
요즘 같은 시대에 왕이라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민제훈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뭐가 됐건, 결코 범상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았다.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도 나쁘지 않던데.’
나이만 젊었으면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 골치 아프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이한철 회장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귀빈석 쪽을 바라보더니 마이크를 들었다.
“존경하는 우리 혜성 가족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 혜성 그룹이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혜성의 발전에 헌신해 주신 모든 임직원 여러분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멍하니 기념사를 들었다.
마이크를 든 이한철 회장의 모습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어차피 그가 할 이야기는 뻔했다.
지금까지 노력해줘서 감사하다.
그러니 앞으로 더 노력해 달라.
뭐 이런 이야기나 하겠지.
“돌이켜 생각건대, 저는 지나칠 정도로 건설 위주의 사업을 고려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그룹 전체의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우리 그룹의 모태인 혜성 모직이 될 겁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뻔한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말을 꺼냈다.
“갑자기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혜성 모직이라니? 허, 참.”
임원들도 당황했는지 뒤에서 작게 웅성거렸다.
그만큼 이한철 회장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이 상무. 이제 그룹 사람들도 알게 되겠어. 회장님이 자네를 얼마나 신임하는지 말이야. 흐흐.”
민제훈이 옆에서 음흉하게 웃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모른 척하기는. 회장님이 갑자기 왜 우리 회사 이야기를 꺼냈겠어? 바로 자네 때문이 아니겠나?”
“…….”
(민제훈 말이 맞다. 원래는 이런 내용이 없었는데 갑자기 생긴 거를 보면 너 때문인 게 확실해.)
나 때문에 기념사를 바꿨다?
그렇다면 이한철 회장의 마음속에서 내가 후계자로 자리 잡기 직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행사 끝나고 기회 되면 아버지와 독대를 해봐라. 그러면 더욱 확실하게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준성 비리 문제로 이한철 회장과 한번 만나볼 생각이었다.
브랜드 사업을 확장하려면 돈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자네, 이따 시간 좀 내게.”
민제훈이 다시 말을 걸었다.
“시간이요?”
“내가 알고 지내는 임원들이 꽤 있네. 이 상무에게 생각이 있다면 내가 그들을 직접 소개해 주지.”
그룹의 임원을 소개해 준다?
이건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후계자 자리야 이한철 회장의 마음만 얻으면 되는 거지만, 회장이 된 이후에는 결국 임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지 않은가.
미리 안면을 트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기념사가 끝나고 창립 유공자와 장기근속 포상자에 대한 포상 수여가 이어졌다.
물론 나는 관련된 것이 없었기에 손뼉 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갈 무렵, 민제훈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자신의 인맥들을 소개해 주기 위함이었다.
“하하하, 김 상무! 어서 인사하게. 이 친구가 바로 회장님의 삼남인 이한성 상무일세. 아주 능력이 출중한 친구이지!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하다네. 하하하!”
“반갑습니다. 유통의 김한선 상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소개해 준 사람은 30대로 보이는 김한선 상무였다.
김한선 상무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는 이한성 상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소식은 들었습니다. 쁘띠엘르 브랜드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셨다고?”
“아직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민제훈 사장님의 말씀처럼 겸손하신 거 같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나름대로 즐거웠다.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도 있었고 나를 서자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서자는커녕 미래의 후계자를 대하듯 나를 대하였다.
(유능하면서 신의가 있는 사람이다. 비주류지만, 나름대로 인맥이 있으니 너의 파벌로 끌어들여도 손해 볼 게 없어.)
노사도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걸 보고서 더욱더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이후로 몇 명의 임원을 더 만났다.
다행히 그중에서 나를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민제훈이 신경 써서 사람을 소개해준 거 같았다.
‘근데 김한선 말고는 다 나를 어정쩡하게 대하는군.’
서자라는 신분이 문제였다.
그냥 젊은 상무였으면 거리낌 없이 나를 대했겠지만,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거리감을 좁히기가 어려웠다.
‘뭐, 차차 나아지겠지.’
지금이야 내가 어정쩡한 신분이라서 그렇다.
진짜 후계자로 자리를 잡는다면 임원들도 더욱 확실한 태도로 나를 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민제훈의 소개로 여러 임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이한철 회장이 몸소 나를 찾아왔다.
“회, 회장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임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이한철 회장에게 인사하였다.
“일들 보게. 나는 내 자식 놈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니.”
그의 말에 임원들이 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공식 석상에서 이한철 회장이 나를 찾아온 일은 예사롭게 넘길 일이 절대 아니었다.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 이한철 회장이었다.
후계자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는 뜻.
그런데 한창 후계 경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한철 회장이 나를 찾아왔으니 임원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정말 너를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구나.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오늘 이후로 너에 대한 그룹 내부의 여론이 크게 달라질 거다. 차기 후계자로 보는 사람도 늘어날 테고 말이야.)
노사의 말에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쁘띠엘르 건으로 또 한 번 점수를 땄나 보군.’
뭐가 됐건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혜성 모직에서 이런 식으로라도 존재감을 알린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브랜드 사업이 점차 궤도에 오르고 십억이 넘는 매출이 나오기 시작한다면 지금 나를 향한 관심이 곧 지지로 이어지게 되리라.
물론 그전에 혜성 모직부터 확실하게 장악해야겠지만 말이다.
“아까 준성이와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더구나.”
“뉴타운 공사에 관한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래. 준성이가 이억을 착복했다는 이야기, 사실이더냐?”
어쩐지…….
뭔가 급해 보인다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장남이 또 사고 쳤나 싶어서 급하게 나를 찾은 거였다.
“예. 사실입니다.”
“하아.”
이한철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나라도 한숨이 나올 거 같았다.
장남이라는 놈이 모자란 행동만 하고 있었으니.
“너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지?”
추궁 섞인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주식을 잘하는 이유가 그저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좋아서만은 아닙니다.”
“즉, 너만의 정보력이 있다는 이야기군?”
“그냥 저를 도와주는 분이 계십니다. 이번 정보도 그분께서 알려주신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분이란 노사를 뜻했다.
물론 이한철 회장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거 같았지만 말이다.
‘그런 것 보니 황 회장님을 찾아뵌 지가 오래됐군.’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봬야 할 거 같았다.
황 노인이라는 인맥을 잃어서는 안 되니까.
“그런데 이번 일,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느냐? 네가 그리 소란을 피웠으니, 조용히 넘어갈 수도 없게 됐다.”
나는 숨을 죽이며 이어질 이한철 회장의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