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저 얼굴을 잘 기억해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타 마케팅.
현재의 한국에선 잘 사용되지 않는 마케팅 기법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스포츠 선수들을 이용한 광고는 홍보 효과가 클 거 같았다.
요즘만큼 스포츠 인기는 절정에 달한 적도 없었으니.
“광고비는 거의 들지 않겠군요.”
(한 명당 만 원 정도면 충분할 거다. 대학교 선수나 고등학교 선수들은 인기에 비해 버는 돈은 일반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맞는 말이다.
프로에서 뛰는 야구 선수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고등학교나 대학교 선수들은 수입이 형편없었다.
용돈 정도 되는 돈만 받아도 열심히 우리 브랜드를 광고해줄 거 같았다.
노사에게 조언을 들은 나는 지체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기획부 직원들에게 스타 마케팅 전략을 지시한 것이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전략 같습니다. 일단 광고비가 안 든다는 게 매력적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상무님!”
“그런데 스포츠 선수를 이용하는 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지!”
“맞아요. 그리고 제 동생도 이천희라는 농구 선수를 엄청나게 따라다녔어요. 지금도 그 선수가 홍보하는 옷이라면 무조건 사 입을걸요?”
직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크게 감탄하며 나를 찬양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 상황을 타개할 묘수가 따로 없었기에 결국 찬성을 표했다.
* * *
“지현아! 그 옷 뭐야? 예쁘다!”
“그치? 쁘띠엘르라고 우리 오빠 회사에서 만든 옷인데, 나쁘지 않아!”
친구가 자신이 입은 옷을 칭찬해 주자 지현은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 그녀의 용돈이라면 훨씬 비싼 옷을 입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한성이 그녀에게 주는 용돈만 한 달에 10만 원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알뜰한 성격인 지현은 자신을 가꾸는 것에 그리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저 시장에서 천 원짜리 옷을 사 입는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쁘띠엘르란 브랜드는 최고의 브랜드였다.
단순히 오빠가 만든 브랜드라서 그런 게 아니라, 디자인도 예쁠뿐더러 가격까지 착했다.
원단 역시 시장 옷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고 말이다.
“얼마나 하는데?”
“별로 안 비싸. 3천 원 정도 해!”
“3천 원?”
하지만 안타깝게도 쁘띠엘르는 인기가 없었다.
옷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던 친구도 가격 이야기를 듣고는 떨떠름해 했다.
대학생들의 용돈이라고 해봐야 하루에 천원 정도였다.
교통비 2백 원에 교내식당에서 국밥 3백 원짜리 먹으면 남는 게 5백 원도 안 된다.
3천 원, 정확히는 4천 원에 근접한 쁘띠엘르 제품을 사 입으려면 거의 열흘 가까이 돈을 모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가치’가 있는 제품이라면 그 정도 모으는 거야 어렵지 않을 터.
“브랜드치고는 엄청나게 싼 거지. 백화점에서 파는 옷들 봐봐. 만 원도 넘잖아.”
“그, 그렇긴 한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브랜드라서…….”
하지만 쁘띠엘르는 아직 가치랄 것이 없었다.
신생 브랜드, 그것도 광고조차 안 하고 출시한 브랜드였다.
아무리 디자인이 좋아도 인기가 없는 브랜드는 돈 쓰기가 아깝게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데……. 사람들이 왜 안 사는지 모르겠어.’
지현은 답답했다.
동생 입장에서 당연히 한성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브랜드가 출시되고 보름이 지났는데도 학교에서 쁘띠엘르 옷을 입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친구들에게 열심히 홍보했는데도 그러했다.
‘오빠 어떡하지. 엄청 준비를 많이 했다고 하던데…….’
걱정이 됐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함께 혜성 모직 직영몰을 구경 가는 것밖엔.
하지만 7월 말이 되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지현아, 지현아! 그거 쁘띠엘르 맞지?”
“와! 정말 쁘띠엘르야?”
“어쩐지! 디자인이 예쁘더라!”
“지현아, 그 옷 어디서 샀어? 나도 살래!”
보통 날처럼 쁘띠엘르 옷을 입고 등교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들이 달라붙어서는 옷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심지어 안면만 간신히 트던 학생들까지도 그랬다.
지현은 얼떨떨해했지만 쁘띠엘르의 영업 사원이라도 되는 양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가격이 3천 원 정도밖에 안 한다고? 우와! 엄청 저렴하다!”
“진짜, 혜성 모직 직영몰에서만 팔아? 그러면 구하기 힘들 수도 있겠는데?”
“이따가 바로 가자! 늦으면 못 살 수도 있어!”
마치 쁘띠엘르를 사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거 같았다.
‘도대체 뭔 일이야?’
그녀로선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자신이 추천할 때는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못 사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행동하다니.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되었다.
“김영일 선수가 쁘띠엘르를 입었다고?”
“응, 그렇다니까! 안 그래도 멋있는데, 화려한 옷을 입으니 진짜 죽여주더라고! 이러니 안 입으면 배겨?”
“하지만 그 선수는 남자잖아?”
“뭐 어때. 예쁘기만 한데. 네가 입은 것도 예쁘잖아?”
프로 야구가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야구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여대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타 학교 야구 선수를 응원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인기 넘치는 야구 선수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쁘띠엘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직접 쁘띠엘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물론이었다.
야구 선수뿐만이 아니었다.
농구와 축구, 복싱까지.
인기 종목에서 활동하는 고등학교 선수와 대학교 선수들이 쁘띠엘르를 입고 다녔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쁘띠엘르 사 입는 게 유행이 되었다.
안 그래도 베스트 드레서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쁘띠엘르를 입고 다니면서 유행이 시작되었는데, 스타 마케팅으로 유행이 더욱 확산한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빠가 잘돼서 다행이네.’
* * *
스타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방배동의 직영몰에서 재고가 다 떨어졌답니다!”
“강남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하하!”
7월까지만 해도 상황은 암울했었다.
누적 판매량이라고 해봐야 고작 천 장 정도.
재고가 남아돌아서 어찌 처분해야 할지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8월이 되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직영몰을 중심으로 판매량이 급속도로 늘어갔다.
태풍 세실의 북상으로 한창 소란스러운 8월 13일인 오늘까지, 무려 사만 장을 판매했을 정도였다.
“경리부도 이제 앓는 소리를 못 하겠는데요?”
“앓는 소리는 무슨! 상무님을 우러러보기 바쁠걸?”
“흐흐흐.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알았겠어? 나는 소리 없이 망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직원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여름이 끝나기 전인데도 이 정도의 판매량이라니.
나로서도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무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신 비서까지 왜 그래요?”
“존경스러워서 그렇습니다. 브랜드 준비하는 과정부터, 실행하고 결과를 얻기까지 그야말로 빈틈이 없으셨습니다.”
“빈틈이 없기는요. 운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운을 기회로 만든 것은 상무님입니다. 만약 과장들의 말을 듣고 각 제품을 천 장씩만 생산했으면 유행을 어떻게 만들었겠습니까?”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극찬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리기도 전에 다른 두 비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신은규의 말에 동의를 표하였다.
“진짜 요즘 화장실 갈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여직원들이 전부 상무님 이야기만 한다니까요? 이야기 들어보니까, 남직원들 반응도 비슷한 거 같더라고요!”
“제가 듣기로도 사내 여론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입니다. 경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영업부에서도 상무님의 능력을 재평가하는 듯합니다. 심지어 그룹의 임직원들 사이에서도 상무님 성함이 조금씩 언급되고 있습니다.”
말수 적은 유동연까지 그런 말을 하니,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에게 존재감을 알렸다니, 창립 기념일에 조금 덜 민망하겠군.)
노사의 말을 듣고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창립 기념일이었네?’
워낙 브랜드 사업에 집중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그룹에서는 굉장히 중요시하는 창립 기념일인데도 말이다.
‘과연 다른 계열사의 임원들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창립 20주년 기념일이니 혜성 그룹의 주요 인사들이 전부 참석할 것이다.
물론 이준성이나 이재성도 참석할 것이고.
후계 경쟁을 하는 입장에선 여러모로 중요한 자리였다.
‘가을이나 겨울 때였으면 좋았을 텐데, 시기가 아쉽군.’
지금은 아쉽게도 그룹의 중역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성과가 없었다.
반년, 아니, 석 달 정도만 시간이 주어졌어도 떳떳하게 성과를 내보였을 텐데, 여러모로 아쉬웠다.
‘이번엔 조용히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어.’
* * *
8월 14일 토요일.
이날은 일찍 퇴근하고서 방배동에 있는 혜성 건설 본사로 향했다.
‘엄청나게 크네. 혜성 모직과는 비교가 안 돼.’
사실상 그룹 본사로 취급받는 곳이었다.
당연히 건물의 크기도 클 수밖에 없었다.
“이한성 상무님 되십니까?”
“예.”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안내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도착한 곳은 14층.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구나.)
노사의 말처럼 강당에는 양복을 입은 수백 명의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혜성 그룹, 정확히는 혜성 건설의 직원들이었다.
‘확실히 대기업은 대기업이야.’
그나마 안내 직원이 있어서 다행이지, 혼자 왔으면 골치 아플 뻔했다.
“여기에 앉아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에게 지정된 자리는 귀빈석이었다.
일반 직원들과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다.
나름대로 임원이라서 귀빈석을 지정해준 거 같았다.
(자리가 괜찮군. 나 때보다 좌석이 뒤에 있어.)
“좌석이 뒤에 있으면 안 좋은 거 아닙니까?”
(뒤로 갈수록 힘 있는 사람이 앉는다. 아마 이준성이나 건설 부사장은 끝자리에 앉을 거야. 앞에는 건설의 차장이나 부장급이 앉을 거고.)
그렇다면 나는 중간쯤이니 나쁘지 않은 거 같다.
물론 후계자에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중간으로 만족할 순 없었지만.
몇 분 정도 지나자 귀빈석 쪽으로 임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음? 저 사람 뭐야? 평사원이 잘못 온 거 아니야?”
“아마 그 사람일 겁니다. 왜, 회장님 삼남이라는.”
“아…… 혜성 모직으로 갔다던 그분? 그러고 보니 무슨 브랜드 사업을 한다던데.”
나를 처음 보는 임원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여기서 20대는 나뿐이니 신기하게 여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 민머리는 내가 전에 말했던 김상복 이사다. 이준성과 함께 자재 대금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지. 네가 회장이 되면 꼭 쳐내야 한다.)
(방금 너와 눈인사 한 사람, 잘 기억해라. 이름은 백운화. 겉으로 착한 척하지만, 마지막에 우리 그룹을 배신하고 고림 그룹에 붙은 놈이다.)
임원들이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듯, 나 역시 그들을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노사가 옆에서 임원들의 이력을 불러주니 그저 재미있게만 느껴졌다.
‘근데 어째 절반 가까이가 무능하거나 비리를 저질렀냐. 대기업에 인재가 이렇게 없어도 되는 거야?’
하긴, 혜성 그룹이 괜히 망한 것이 아니었다.
실력도 없는 것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망한 것이다.
“어이! 주제도 모르는 것이 여기에 앉아 있네?”
그때였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임원 중에서 젊은 편에 속하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험한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내 이복형제이자, 혜성 가의 장남인 이준성이었다.
“이 건방진 새끼. 내가 왔는데 앉아서 들은 척도 안 해?”
“용건이 뭡니까?”
“용건? 하! 닥치고 꺼져.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의 말을 듣고 자리를 옮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는 어디까지나, 당당하게 그를 내려다보기 위해서였다.
“후계자도, 뭣도 아닌 당신이 나에게 뭐라 할 입장은 아닌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