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21화 (21/300)

21화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는 법이다

하나의 옷을 제작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컨셉을 잡아야 했고, 스케치로 디자인을 구체화해야 했으며, 원단과 부자재를 결정해야 했다.

그 이후에는 샘플 공정 작업을 거쳐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몇 개월이 지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것은 이처럼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내가 여름 시즌을 반쯤 포기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직 5월이라 시간적 여유가 충분해 보이기도 했지만, 옷을 디자인하고 그 디자인된 옷을 제작 공정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가을도 마냥 여유롭다고 볼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디자이너들은 가을까지 기다리기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열정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진행했다.

박봉에 시달리다가 이십 만 원의 월급과 함께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니 힘이 넘쳐나는 거 같았다.

“상무님! 이 디자인은 어때 보이세요?”

그중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 내가 첫 번째로 영입한 박미란이었다.

그녀는 하루에 몇 번이고 상무실을 찾아와 자신이 스케치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음……. 이번에도 화려한 옷이네.’

솔직히 나는 디자인을 볼 줄 모른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디자인은 하나같이 요란스럽게만 느껴졌다. 오죽하면 티셔츠 하나에 색상이 세 개나 들어갈 정도였다.

(또 하나 건졌군. 저건 출시해도 괜찮겠어.)

하지만 나와 달리 노사의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나이 차이와 무관하게, 패션을 보는 눈은 나보다 노사가 더 정확하였다.

“괜찮아 보입니다. 색상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와, 정말요?”

노사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옷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지금 시대의 트렌드를 어느 정도 꿰차고 있을 터.

그래서 나는 노사의 조언을 들으며 디자인을 골랐다.

“바로 기획부에 전해서 생산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기획부는 혜성 모직의 브랜드 사업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아직 정식으로 부서가 편성된 것은 아니지만, 생산부의 유능한 직원들과 드림 패션의 인력을 끌어모은 상태였다.

내가 준비했던 브랜드가 성공적으로 출시되고 나면 기획부는 정식으로 편성이 될 것이다.

‘아마 그때쯤 기획부가 혜성 모직에서 가장 힘이 있는 부서가 되지 않을까?’

브랜드 사업이 성공한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매출의 상당 부분이 브랜드 수익에서 발생하게 될 테니까.

“감사합니다!”

“예상보다 열심히 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히히! 퇴근까지 시간 남았으니까 디자인 더 만들어오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끔 보면 열정이 너무 과한 거 같기도 했다.

* * *

일곱 가지의 디자인이 샘플 공정까지 완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디자인 된 제품을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것.

하지만 문제는 옷을 얼마나 생산하는지, 그리고 옷의 가격은 얼마로 할지였다.

옷 한 장당 평균 원가가 대략 천 원 정도였다.

평화 시장에서 판매되는 저가 의류의 가격이 오백 원에서 이천 원 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원가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가격 산정은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옷을 얼마나 생산할지에 관한 문제 역시 만만치 않게 중요했다.

이전에 취급하던 카피 옷들이야 재고가 쌓일 일은 극히 드물었다.

재고가 남아돌면 싼값에 떨이로 판매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브랜드 옷은 그렇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재고를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신제품의 생산 계획과 가격 산정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전에 브랜드 이름을 정하는 게 먼저겠지만.’

이름 없이 브랜드를 출시할 순 없는 법.

나는 상무실 안에 모인 기획부 직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브랜드 이름은 생각해 오셨습니까?”

“……네.”

“한번 이야기해 주시죠.”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막내부터 지목했다.

“저, 저는 에이스란 이름이 어떨까 싶습니다.”

“에이스?”

“그,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겐 각자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이 있지 않습니까? 10대와 20대를 노리고 있다면 에이스란 이름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막내치고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브랜드 이름 자체는 애매하게 느껴졌다.

좋은 거 같으면서도 끌리지는 않는 느낌.

혹시 몰라 노사를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뭔가 침대 브랜드로 해야 어울릴 거 같은 이름이야. 패션 브랜드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군.)

노사가 그렇다니 고민할 필요도 없게 느껴졌다.

나는 막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른 직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대를 충족시키는 브랜드 이름은 없었다.

‘내가 학생이 아니라서 와 닿지 않는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번에 그룹 비서실에서 나의 비서로 소속을 옮긴 신은규가 말을 꺼냈다.

“쁘띠엘르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프랑스어입니까?”

“네, 맞습니다. 프랑스어로 작은 날개라는 뜻인데, 저만 그런지 몰라도 프랑스어는 뭔가 있어 보이게 느껴집니다. 하하.”

“확실히 뭔가 있어 보이는 브랜드명이긴 합니다.”

긍정하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워낙 프랑스 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프랑스어라는 언어 자체가 고급스럽게 느껴지기는 했다.

패션 하면 프랑스이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거 같았다.

(브랜드명으로 괜찮은 거 같다.)

노사까지 긍정을 표시하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전 좋은 거 같은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엄청 좋아 보입니다.”

“제 생각에도 젊은이들이 좋아할 이름인 거 같습니다.”

기획부 직원들의 얼굴은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자신들과 관련 없는 신은규가 브랜드명을 정한 셈이니 그들로선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하지만 내가 좋다고 말하는데 별로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은규에게 감사 인사를 하니,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처음엔 달갑지 않아 했는데, 금방 적응하네? 적응력이 나만큼 좋은 거 같군.’

그룹 비서실에서 비중이 낮은 계열사의 비서, 그것도 상무의 비서가 됐으니 신은규로선 좌천을 당한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만났을 때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역시 노사가 인정한 인재는 달랐다.

며칠이 안 돼서 비서 업무에 적응하더니, 이제는 비서 업무가 아닌 영역에서조차 활약하고 있었다.

‘내가 그룹 회장이 될 가능성이 그리 낮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 보지?’

뭐가 됐던 신은규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니 나로선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브랜드명을 정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를 해야겠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구석에 놓여있는 옷 하나를 들어 올렸다.

박미란이 디자인한 제품이었다.

“파격적인 디자인이죠?”

“……예. 굉장히 새로운 디자인인 거 같습니다.”

직원들의 표정이 애매했다.

평사원이나 주임은 20대라서 그런지 그럭저럭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거 같은데, 30대 이상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디자인인 건 확실해 보였다.

“여러분은 이 제품의 최종 가격을 얼마 정도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까? 참고로 원가는 천 원 정도 나왔습니다.”

직원들이 부르는 가격대는 다양했다.

9천 원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5만 원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대학생 용돈이 한 달에 3만 원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담이 될 가격대였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학생들이 용돈으로 살 수 있는 금액이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시장 옷보다 가격이 낮아서도 안 되죠.”

현재 의류 시장은 고가 시장과 저가 시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중저가 브랜드 의류라는 시장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쁘띠엘르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소비자들의 반향을 끌어내려면 적당한 가격대를 찾아야만 했다.

“2천 원이면 학생들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거 같습니다.”

“2천 원은 브랜드의 상품치고 지나치게 낮은 금액이 아닐까요? 옷이 너무 싸면 브랜드의 가치까지 낮아질 수 있습니다.”

“명품들은 대부분 만 원이 넘고 심하면 20만 원짜리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5천 원 정도가 괜찮을 거 같습니다.”

“5천 원도 비싸 보입니다만.”

“그러면 4천 원은 어떤가요?”

“뭔가 애매하지 않습니까, 사천 원은?”

중저가라는 기준이 너무 모호했던지 금액이 오락가락했다.

누구는 3천 원, 누구는 5천 원.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지만 결론이 나올 거 같았다.

“3천9백 원으로 갑시다.”

4천 원에서 백 원을 뺀 3천9백 원으로 가격을 정했다.

학생들에게 4천 원도 큰돈이다.

하지만 백 원을 빼면 3천 원대가 된다.

겨우 백 원 차이지만, 학생들에겐 그 차이도 크게 다가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량을 정해야 하는데…….”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얼마나 생산할 것이냐?

디자이너 영입하랴, 패턴 샘플 작업하랴, 이것저것 돈을 쓰기는 했으나 그래 봤자 몇백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주도하고 있는 브랜드 사업이 설령 망한다 해도 혜성 모직의 손해는 고작 몇백만 원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물량을 과도하게 생산했다가 망한다면?

십만 장을 생산했는데 다 못 팔아버린다면 어떨까.

원가만 계산해도 손해가 일억이었다.

공장 인력의 임금까지 계산한다면 거기서 몇천만 원을 더 추가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고민했다.

욕심내서 대량 생산을 할지, 아니면 소비자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정도로 소량 생산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명심해라.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노사의 말을 듣고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만 장씩 생산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유행을 탔는데 물량이 부족해서 흐름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불운한 일도 없었다.

뒤늦게 물량을 생산해봤자 이미 유행이 끝난 후일 터.

그렇기에 나는 욕심내기로 했다.

각각 만 장씩 생산하기로 말이다.

“마, 만 장이나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같습니다. 아직 소비자의 반응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여름 시즌은 소량 생산하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진행하는 가을 시즌에 대량 생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당연히 직원들은 우려를 표했다.

여름 시즌은 어디까지나 실험의 의미가 강했다.

그런데 여름 시즌부터 만 장씩 생산하자고 하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만큼은 이견을 듣지 않겠습니다. 그저,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저 혼자서 지겠습니다.”

만약 예상과 다르게 망한다 해도 재고 물량을 내가 다 사면 그만이었다.

그동안 주가도 많이 올라서 십억 가까이 추가로 번 상태였다.

막대한 돈이 있는데 이 정도의 도전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 * *

쾅!

이준성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최진수의 나이가 자신보다 열다섯 살 많은데도 개의치 않았다.

“최 부사장! 혜성 모직은 당신이 꽉 잡고 있다 하지 않았어!?”

그렇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최진수는 그저 비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하, 하. 꽉 잡고 있다는 말은 조금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다만, 회사의 간부 중에 저와 어울리는 사람이 많을 뿐입니다.”

“부리는 사람이 많은데 일 하나도 똑바로 못 하나?”

“이한성 상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놈이 제 세상인 양 미쳐 날뛰고 있다는 소문이 나에게까지 들려오는데 뭐? 걱정하지 마?”

그는 방배동 대저택에서 한성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안중에도 두지 않던 최진수를 굳이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인 것도 한성에게 앙갚음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최진수는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한성에게 어떠한 수작도 부리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브랜드인지 뭔지 거창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데도 그랬다.

“가만히 지켜보시면 곧 듣게 될 겁니다. 상무가 준비하고 있는 브랜드 사업이 처참하게 실패했다는 소식을.”

최진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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