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너는 재능이 있다
노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왠지 이한철 회장을 보는 게 껄끄러웠다.
하지만 혜성 모직 직원들에게 이한철 회장과의 친분을 과시할 기회를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거침없이 사장실에 들어갔다.
“회장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한성이 왔느냐. 잘 왔다. 여기 와서 앉아라.”
예상대로 이한철 회장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놀란 얼굴을 하는 최진수 부사장을 보며 속으로 조소를 흘리고는 소파에 앉았다.
“민제훈 사장에게 들었다.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냥 노력하는 건 아닌 거 같더구나. 뭔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고 한다던데?”
이한철 회장은 내가 독자적인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음을 아는 눈치였다.
하긴, 나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니 그럴 만했다.
“브랜드를 가지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오, 브랜드라.”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디자이너를 영입한 것밖에 없습니다.”
“대단한 게 아니기는. 다른 아들놈들은 출근도 제대로 안 해서 내 속을 썩이고 있는데, 역시 너만은 다르구나.”
애초에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노사가 아니었어도 그놈들보단 내가 훨씬 낫다.
“그런데 혜성 모직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공식 일정은 계열사 시찰이긴 한데, 사실 너를 보러 찾아온 거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면 그룹에서 아무런 비중이 없는 혜성 모직에 올 일은 없었을 테니.
“저를 왜……?”
“네가 아비를 안 찾으니, 내가 직접 올 수밖에 없지 않으냐?”
친한 척하는 이한철 회장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색함을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임원들의 놀란 얼굴만 봐도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이익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아무리 친한 척을 하셔도 제가 회장님을 아버지라 부를 일은 없을 겁니다.’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는데, 이한철 회장이 임원들과 비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게. 아들과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예! 알겠습니다.”
병풍처럼 서 있던 임원들과 비서들이 쏜살같이 사장실을 나갔다.
“회사 생활에 어려운 점은 없었느냐?”
최진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내가 말만 한다면 이한철 회장은 어떤 요구든 들어줄 것이다.
최진수를 배제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그러면 나는 단숨에 회사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작 최진수 따위 때문에 나에 대한 기대감을 반감시킬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나 혼자서 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의 마음을 얻어야 하니까.
“예.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간부들과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말 그대로 사소한 마찰입니다. 제 능력을 입증하고 난다면 문제 될 것도 없습니다.”
내 말에 이한철 회장이 흡족한 얼굴을 하였다.
역시, 당당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준 게 잘한 선택인 거 같았다.
“강남으로 이사했느냐?”
“예, 아파트로 이사 갔습니다.”
“그래? 잘했다. 아파트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투자 목적으로도 괜찮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지현이, 연애한다고 했었지?”
“지현이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만나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잘 지내고 계시고요.”
“……그렇구나.”
이한철 회장은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이 있는지 계속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불쑥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는? 만나는 여자 있느냐?”
“아직은 따로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혹시 선을 볼 의향은 있느냐?”
나는 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노사의 말을 듣고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그룹의 사정이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다.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너를 어떻게든 힘 있는 집안과 결혼시켜 돈을 구하려는 생각뿐이야.)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겉으로 나를 생각하고 위하는 척을 해도 결국 이한철 회장의 머릿속은 나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다.
이러니 이한철 회장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네 나이도 이제 서른이 다 되어가니, 슬슬 혼인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
“제가 전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결혼 같은 중요한 문제는 제가 알아서 결정하겠다고. 물론 지현이의 결혼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노사야 병에 걸린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이한철 회장의 말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달랐다.
어머니도 건강하셨고 경제적 여건도 넉넉했다.
즉, 이한철 회장에게 어떠한 ‘빚’도 지지 않았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그냥 해본 말이었다. 잊어라.”
“혹시 자금 융통이 필요하십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룹의 자금 사정이 더욱 악화하였다는 사실을.”
이한철 회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뭔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거 같았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룹의 문제는 나중에 후계자가 되고 나서 거론하도록 해라.”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 할 상황이 아니십니까? 제2 은행권에서 단기 채권을 곧 회수해 간다는 소문도 들려오는데 말입니다.”
이한철 회장은 침음을 흘렸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혜성 그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았으니.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굳이, 정략결혼이라는 수를 쓰지 않아도 돈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혜성 그룹 정도의 대기업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수백억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잘 아는구나. 그런데도 돈을 구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냐? 설마…… 주식으로?”
“제가 아무리 주식을 잘해도 그렇게 단숨에 몇백억을 벌지는 못합니다.”
“그렇겠지. 그게 당연한 일이야.”
“제가 직접 돈을 빌려줄 수는 없지만, 돈을 빌려줄 사람을 소개해 줄 수는 있습니다.”
“누구를 소개해 준단 말이냐?”
“명동의 황인범 회장입니다.”
내 말에 이한철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황 노인은 대기업 회장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황 노인은 재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황 회장을 어떻게 아는 것이냐?”
“제 주식 실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황인범 회장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제 조언으로 황인범 회장은 엄청난 이익을 거두었죠. 몇백억은 우스울 정도로 말입니다.”
“……너는 늘, 내 상상 밖에 있구나.”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원래도 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지만, 오늘의 일을 계기로 평가가 한층 더 올라가지 않을까 싶었다.
“좋다. 네가 황 회장을 소개해줘서 돈을 빌릴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만약에 제 소개로 황인범 회장에게 돈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면 저에게 뭘 해주시겠습니까?”
“흠……. 그래. 너도 아무 대가 없이 도와줄 순 없겠지. 너 역시 황 노인에게 빚을 지는 셈이니 말이야.”
사실, 빚을 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황 노인이 나에게 빚을 갚는 거지.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현금으로 10억을 주마.”
“10억이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10억 받겠다고 황 노인이란 패를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것이 아니었다.
“제가 황인범 회장에게 빌린 돈이 얼만지 아십니까? 50억입니다. 시중 은행보다 낮은 금리로 50억을 빌렸단 말입니다.”
구태여 밝힐 필요는 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반대로 꼭 숨겨야 할 정보도 아니었다.
내가 상당한 자산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이한철 회장이었다.
5억 자산가에서 50억 자산가로 상향 평가해 준다면 나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어차피 오십억이 내 전 재산이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그게 사실이냐?”
“믿지 않으시다면 별수 없습니다. 하지만 10억이란 돈이 구미가 안 당기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걸 말해봐라.”
“우선, 조흔 은행의 고위 간부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이한철 회장에게 받아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혜성 건설의 지분을 받아내는 게 최상의 결과겠지만, 지분을 받을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았다.
아무리 나를 높게 평가한다 해도 유산으로 지분을 넘기면 넘겼지, 생전에 지분을 넘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를 받아내는 게 좋을까?
노사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하나가 바로 이한철 회장의 인맥.
조흔 은행의 고위 간부를 소개해달란 이유도 바로 이 인맥을 얻기 위함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엄청난 요구를 하는구나.”
“그룹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요구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 사람들에게 너를 어떻게 소개할지가 걱정이다.”
“혜성 가의 삼남으로 소개하면 되는 일인데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것 말고도 또 하나 요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한철 회장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어서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은규와 유동연이라는 이름의 비서들을 제게 주십시오.”
노사가 이야기했던 다른 한 가지가 바로 이거였다.
인재.
즉, 혜성 그룹이 자랑하는 유능한 인재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대단하구나. 이제는 인재까지 가져가려는 거냐?”
“회장님이 가진 인맥과 인재가 현금 10억 따위보다 훨씬 귀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정말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한철 회장.
왠지, 인맥과 인재뿐만이 아니라 이한철 회장의 마음마저 얻은 거 같았다.
(일단 그룹의 몰락은 어느 정도 유예 기간을 확보한 거 같구나.)
원래라면 지금쯤 제2 은행권에서 750억에 달하는 단기 채권을 회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장희자 어음 사기 사건의 여파로 건설주들의 신용은 땅끝으로 추락했으니까.
하지만 황 노인을 통해 5백억이라는 거액의 대출을 받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황 노인은 사채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거물이었다.
그에게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혜성 그룹의 신용은 크게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죠?”
(당연한 이야기다. 오히려 부채를 부채로 돌려막은 셈이니 장기적으로 보면 상황이 좋아졌다고 말하기는 힘들어.)
맞는 말이다.
당장에 위기야 어떻게든 모면했지만, 아직도 혜성 그룹의 앞날은 깜깜했다.
(무엇보다 고림 그룹이 문제다. 그놈들은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거야.)
자금난도 심각한데 경쟁 기업까지 혜성 그룹을 노리고 있었다.
물론 고림 그룹이 지금 당장 혜성 그룹을 어쩌진 못할 것이다. 혜성 건설의 상황이 심각하다고 해도 고림 그룹 역시 썩 좋은 상황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전대환 대통령의 장인이 있었다.
대통령의 권력이 절대적인 시대에서, 혜성 그룹은 고림 그룹과 적대한다는 사실만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어서 빨리 혜성 그룹의 후계자로 자리 잡아야겠군요. 후계자가 정해진다면 자연스레 약점도 줄어들 테니 말입니다.”
(좋은 마인드다. 그룹의 웬만한 문제들은 네가 후계자가 되고, 회장이 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 너의 사업적 재능은 아버지보다 뛰어나니 말이야.)
조금 과한 기대 같았지만, 그렇다고 노사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자신감이란 것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업가 재능에 대한 자신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