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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9화 (19/300)

19화 결혼할 나이가 됐잖아?

종태 형이 나를 보며 소리쳤다.

“이 자식아!”

꽤 화난 얼굴이었다.

난데없이 공장장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했다.

심지어 나는 일만 떠맡기고서 공장도 찾아오지 않았고 말이다.

“잘 지냈어?”

“너 같으면 잘 지냈겠냐!”

“왜 그래? 형이 원하는 게 자유분방함이었잖아. 윗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워?”

“한성이 오늘 좀 맞아야겠다.”

정말 때릴 기세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내 깐족거림을 듣고서 진심으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하아, 이 자식. 상무라서 때릴 수도 없고.”

“상무는 무슨. 그냥 평소처럼 대해. 달라진 건 없으니까.”

“안 그래도 반말하고 있잖아. 그리고 사석이라 이러는 거지, 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존댓말 해야 하지 않겠냐?”

“그거야 뭐 당연한 이야기지. 나도 그때는 존댓말 사용할 거야.”

“근데 나 언제쯤 본사로 불러줄 거냐?”

“똑같은 회산데 본사는 무슨 본사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리고 솔직히 드림 패션은 혜성 모직의 자회사나 마찬가지잖아? 합병했다고는 하는데 간판만 바뀌었지, 뭐가 달라진 게 없어.”

그의 말처럼 드림 패션은 사실상 방치되는 중이었다.

이한철 회장이 직접 지시해서 인수한 회사인데, 정작 그 이후의 조치에 대해서는 지시가 없었으니 회사 차원에서 관리하기도 애매해진 것이다.

‘뭐 이제 내가 왔으니 그것도 문제 될 건 없지만.’

최진수가 빼앗으려고 했었지만, 민제훈 사장의 도움 덕에 가까스로 지켜낼 수 있었다.

이제 드림 패션은 확실하게 내 영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아무튼, 기계도 잘 모르는 내가 공장장 노릇을 하는 것도 뭔가 염치없잖아. 나는 영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아직 시간이 필요해.”

“얼마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계획대로만 된다면 올해 안에 불러올 수도 있어.”

시간상으로 여름 시즌은 무리겠지만, 가을 시즌의 의류 시장을 공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내가 영입한 디자이너들이 가을 시즌에 큰 성과를 낸다면,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지게 될 터.

종태 형의 직책을 바꾸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나 보다? 그렇게 빨리 된다는 거 보면.”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아. 생산부 안에서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좀 있고.”

“그래?”

“그런데 형, 혹시 내가 없을 때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거 없어? 오더 물량이 줄었다던가, 매출이 줄었다던가.”

“딱히? 오더 물량이 오락가락하기는 한데, 매출은 거의 비슷해. 어차피 매출 대부분은 대성 어패럴에서 나오니까.”

“그러면 대성 어패럴의 오더만 남기고 적자 나는 오더를 조금씩 줄여 봐.”

“그럼 일손이 너무 남을 텐데?”

“생산부의 오더를 가져가면 되지. 드림 패션이 있는데 굳이 다른 회사에 하청을 줄 필요는 없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괜찮겠어?”

“뭐가?”

“하청 업체와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 간부들이 적지 않을 거 아니야.”

틀린 말이 아니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과장급 이상의 간부 중에는 뒷돈을 받고서 하청 업체 선정에 관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뭐, 혜성 모직이 워낙 작은 회사라서 그 뒷돈이 몇만 원에서 10만 원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드림 패션에 일감을 몰아준다면 하청 업체로부터 뒷돈 받은 간부들이 반발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내가 이래 봬도 회장님 아들이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반발한다면 힘으로 찍어 누르면 돼.”

“이야. 자신감 봐라?”

종태 형이 감탄한 듯 바라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튼 오더 줄인 뒤에 생산 일정 계획을 다시 짜봐. 그리고 고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라인도 만들어두고.”

“고가 제품?”

“정확히는 중저가 제품이야. 저가보단 조금 퀄리티 있는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거든.”

“중저가라, 특이한데? 일단 알았다. 네 말대로 최소 오더량만 남기고 라인도 다시 조정할게.”

“고마워. 부탁할게.”

“됐다. 일 이야기 끝났으면, 술이나 마시러 가자.”

“그러자.”

* * *

다음 날.

나는 생산부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상무실로 소집했다.

참고로 상무실은 원래 소회의실로 쓰던 공간이라서 여러 명이 들어와도 공간이 널널했다.

“원선무 부장은 언제 옵니까?”

“지금 오고 계십니다. 아, 저기 보입니다.”

유독 엉덩이가 무거운 원선무까지 도착하자, 상무실 문을 닫았다.

더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아무 때나 불러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문정민의 열렬한 반응에 피식 웃고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여러분을 이렇게 불러들인 이유는 우리 생산부에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상치 않은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다들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혜성 모직은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존립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보니 이 회사는 이10년 동안 조금의 발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퇴보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

“물론 여러분의 탓은 아닐 겁니다. 다른 직원들의 탓도 아니고 말입니다. 단지, 이 회사가 도전이란 것을 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결과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상무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원선무가 낮은 목소리로 요점을 물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구겼지만, 안 그래도 요점을 말할 생각이었기에 지체하지 않고 말문을 이어나갔다.

“저는 혜성 모직의 미래를 위해서 도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전이요? 정확히 어떤 도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단순한 도매업체에서, 진정한 의류업체로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만의 자체적인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상무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자체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체적인 브랜드를 가지려면 당연히 디자이너를 영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싼 월급 줘가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디자이너가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낼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제대로 된 제품을 못 만들면 그 재고는 우리가 떠안아야 합니다.”

“도전 없이는 발전도 없는 법입니다.”

“상무님. 샘플로 옷 하나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지 아십니까? 수많은 패턴 샘플의 공정이 필요하고, 이 패턴 샘플을 한 번 하는데 적어도 만 원은 들어갑니다. 디자이너 월급에다 패턴 샘플까지, 우리 회사에서 디자인이니 브랜드니 그런 거는 사치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에 심성보 차장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장들의 분위기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시 혜성 모직에는 패배주의라고 할까?

무언가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았다.

“한마디로 돈이 문제라는 겁니까?”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재무 상태 보고서를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회사의 자금 사정이 그리 여유롭지 않습니다. 드림 패션을 인수하면서 이미 큰돈을 썼지 않습니까?”

드림 패션을 운운하는 게, 마치 나를 질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의 본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그렇담 경제적인 뒷받침만 된다면 문제 될 게 없겠군요.”

“설마 회장님의 지원이라도 받으실 생각입니까?”

“지원해 준다면 당연히 받아야죠.”

“지금 그룹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제2금융권에서 단기 채권을 회수하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과연 저희를 지원해 주겠습니까?”

“꼭 그룹의 지원이 없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돈을 구할 방법은 많으니까. 뭣 하면 제가 회사에 돈을 빌려줘도 될 일입니다. 몇억 정도는 당장에라도 빌려줄 수 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내 말에 모두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재벌 2세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이만큼의 현금 부자란 사실은 알지 못했다.

“저, 정말 그렇게 돈이 많으십니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현금 자산만큼은 회장님보다 많을 겁니다.”

“……!”

간부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한철 회장이 현금을 가지고 있어 봐야 얼마나 가지고 있겠는가?

끽 해봐야 십억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장희자에게 얻어낸 삼십억이 현금으로 남아 있었다.

지분을 포기할 수 없는 이한철 회장과 달리 언제든 주식을 현금화시킬 수도 있었고 말이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수십억도 감당이 가능한데, 어떻습니까. 원선무 부장.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원선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돈이 수십억이나 있다는데 그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회사를 통째로 인수할 수도 있을 정도의 거액인데.

“자금력이 풍부하다면 새로운 도전을 해봐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그러면 바로 사장님에게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예.”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말로 설득했다기보다는 돈으로 찍어 누른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됐다.

이제는 가을 신상품이 성공적으로 출시하게끔 만들기만 하면 된다.

* * *

5월 24일.

미리 약속을 잡아놓았던 박미란 디자이너를 만났다.

난 솔직히 박미란 디자이너를 만나기 전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

디자이너는 예술가였다.

그리고 예술가라 하면 대부분 자존심이 강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예술가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영입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정말 월급을 20만 원이나 주신다고요? 거기에 인센티브까지? 와! 계약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다행히도 박미란 디자이너는 내 제안에 반색하며 거침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내가 말했지 않았느냐. 이때는 금전적으로 한창 어려워하던 시절이라 조건만 좋으면 무조건 받아들일 거라고.)

이유야 뭐가 됐건, 영입에 성공했으니 다행이었다.

‘운이 좋았군.’

이제 박미란을 시작으로 다른 디자이너들을 추가로 영입해서 가을 신상품을 준비하면 될 거 같았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제가 일반적인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박미란이 갑자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서는 거침없이 사인한 주제에 뒤늦게 겁이 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뭐랄까. 성숙하면서 무거운 그런 디자인보단 가벼우면서 젊어 보이는 디자인을 선호해요. 색상도 빨강색 같은 화려한 색상을 좋아하고요.”

“오히려 좋습니다. 저도 지금까지의 무채색 계열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색상의 작품들을 원합니다. 그리고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실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캐주얼 의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 정말요? 그러면 제가 선호하는 디자인이랑 딱 맞을 거 같아요!”

갑자기 신이 난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은근히 소심한 성격이군. 내가 직접 찾아와 영입을 제안했는데도 쓸데없는 이유로 마음을 졸이다니 말이야.’

애초에 그녀를 영입하려는 이유가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캐주얼 의류를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내년부터 시행될 교복 자율화.

내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의류 시장은 청소년과 대학생들에게 인기를 얻느냐, 못 얻느냐로 성패가 가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저가 캐주얼 의류는 학생 용돈만으로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리했다.

“메모지에 회사 주소가 적혀 있으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해 주시면 됩니다.”

“네! 늦지 않게 출근할게요!”

박미란을 성공적으로 영입한 나는 기분 좋게 회사로 복귀했다.

“회, 회장님이 오셨습니다.”

회사에 도착하니 상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소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회장님이요? 어디 계시는데요?”

“예! 지금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한철 회장이 왜 혜성 모직에 왔을까?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설마 나를 보러 온 건가?’

내가 그 생각을 하는데 마침 노사가 말했다.

(어쩌면 혼인 이야기를 꺼내러 오셨을지도 모른다.)

“예? 혼인이요?”

저도 모르게 놀라서 되물었다.

(너도 결혼할 나이가 됐잖아?)

“……!”

결혼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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