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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8화 (18/300)

18화 원래 첫날은 다 그래

나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도 조용히 강의만 듣고 다녔지, 미팅한다든가 동아리 활동을 한다든가 그런 적은 없었다.

한마디로 사회성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드림 패션을 경영하면서 내 성격도 조금씩 바뀌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공장을 운영하면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은 물론이요, 다른 거래처 사장들과도 자주 어울려야 했다.

특히 작년부터 드림 패션은 종업원만 무려 백인 이상의 규모가 되었다.

나 혼자서 백 명의 직원을 이끌게 된 것이다.

아무리 소심한 성격을 가졌어도 겉으로나마 외향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도매상에게 말했습니다. 오더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고.”

“와, 정말요?”

“남자다우십니다!”

회식 자리에서 작년에 있었던 양승국과의 일화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직원들이 통쾌하다느니, 멋있다느니 온갖 칭찬을 해댔다.

상사라서 아부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원래라면 그렇게 행동해선 안 될 일이죠. 제가 그때 어리기도 했고, 주식으로 돈을 벌어서 경솔하게 대처하기도 했습니다.”

“와, 주식도 하시는구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주식만큼은 진짜 자신 있습니다. 제가 워낙 운이 좋거든요. 도매상 쫓아냈을 때도 오더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마침 대성 어패럴이라는 회사의 사장이 찾아오지 뭡니까? 다른 회사를 가려 했는데 실수로 찾아왔답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죠.”

“오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팍 들더라고요. 그래서 간신히 붙잡고서 계약을 따냈습니다. 이때 맺은 계약 덕에 제 회사도 몇 배 더 커졌습니다. 20명밖에 안 되던 직원 수도 150명으로 늘어났죠.”

나는 계속해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재수 없는 자랑질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내 이야기를 듣는 직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득해 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성공 스토리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상무님은 마치 드라마 주인공 같으세요.”

“그러게.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스토리야.”

“정말 부럽습니다.”

직원들은 이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완전히 이해했다.

아무 능력 없는 재벌 2세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고, 내가 서자로서 나름대로 고생하며 살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일까?

분위기는 점점 훈훈해졌다.

나를 보는 직원들의 시선도 따뜻해졌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은 직원은 열 명밖에 안 됐지만, 적어도 이들의 마음은 확실하게 얻은 듯했다.

‘이제 슬슬 간부들의 마음을 얻으러 가볼까?’

내일이면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열 명의 직원이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줄 것이다.

말도 잘하면서 통도 크고 능력까지 나쁘지 않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적어도 일반 사원이나 주임, 대리급 직원들은 나를 긍정적으로 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사는 것도 중요했지만, 중간관리자에 해당하는 과장급과 차장, 부장의 마음을 사는 것도 중요했다.

“원선무 부장이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부장님이요? 아까 집에 가셨을걸요?”

“벌써 가셨다고요?”

“예. 몇 분 전에 아무 말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자리를 뜨다니?

이건 나를 무시하는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심성보 차장이나 생산부 내에서 고가 상품을 담당하는 제조 1과의 과장인 임승택까지 자리를 비웠다.

(혜성 모직을 장악하는 것보다 생산부부터 완전히 장악해야 할 거 같군.)

동감이었다.

최진수 부사장만 신경 쓸 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런 기반이 없는 서자라서 그런지 부장, 차장급까지 나를 만만하게 여기는 듯했다.

식사 값으로 무려 10만 원이나 나왔다.

10만 원이면 저임금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었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정민 과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현금을 지불하였다.

이제 십만 원 정도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그렇게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43평짜리 강남 아파트로 귀가하였다.

“참 정신없는 하루였습니다.”

(원래 첫날에는 다 그런 거다.)

“오늘 저, 괜찮았습니까?”

(나쁘지 않았다. 회식 자리를 제안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고.)

“그렇습니까?”

노사에게 칭찬을 다 받다니.

별거 아닌데도, 괜히 뿌듯했다.

“근데 걱정입니다. 원선무 부장이 저를 좋게 보지 않는 거 같은데, 자체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반대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혜성 모직을 제대로 된 의류 회사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단순히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꿈을 알게 되면서 내가 대신 어머니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노사가 말하기를, 혜성 모직을 제대로 된 의류 회사로 발전시키려면 자체적인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처럼 인기 있는 디자인을 카피하는 식으로 제품을 팔아서는 한계가 있다고 말이다.

‘솔직히 맞는 말이지. 평화 시장의 도매상도 아니고 명색이 대기업 계열사인데 언제까지 베끼기만 할 수는 없어.’

그저 베끼기만 한다면, 성공해봤자 얼마나 성공하겠는가?

디자인.

혜성 모직에도 디자인이란 게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노사의 도움을 받아서 필수적으로 영입해야 하는 디자이너 명단을 벌써 뽑아놓은 상태였다.

하나하나가 트렌드를 이끌어 갈 디자이너들이었는데, 이들을 영입한다면 자체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고집이 세고 저를 어리게만 보는 거 같은데, 설득이 가능할까요?”

(그래도 원선무 부장은 최진수 같은 놈과 달리 정치질은 잘 안 하는 편이야.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네 말을 들어줄 거다.)

“그렇습니까?”

설득이라.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사 사정도 잘 모르는데, 설득이 쉬울 거 같지는 않았다.

‘일단 며칠만 기다려보자.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 말이야.’

조금 더 회사를 알아갈 필요가 있었다.

* * *

회식의 효과일까?

출근하니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왔다.

일반 사원이나 주임들도 거리낌 없이 인사를 해올 정도였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직원들과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문정민 과장님. 시간 되시면 상무실로 와주세요.”

어제처럼 출근하기 무섭게 문정민을 찾았다.

아직 물어볼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정민은 죄송하단 얼굴로 말했다.

“제가 출장을 가야 해서 시간이 안 될 거 같습니다.”

“아침부터 출장이요?”

“부장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작게 혀를 찼다.

느닷없이 출장이라니.

설마 나 때문에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일까?

뭐가 됐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정민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는데 말이다.

‘안 되겠다. 비서를 채용해야겠어.’

임원에게 비서는 필수.

나처럼 회사에 적응이 필요한 사람은 더욱더 비서가 있어야 했다.

마침, 비서로 뽑고 싶은 직원이 부서 안에 한 명 있었다.

이소희란 이름의 여직원이었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보니까, 머리가 좋은 데다 눈치도 빨랐다.

덤으로 얼굴까지 예뻤고 말이다.

“소희 씨.”

“예, 상무님.”

“혹시 비서에 관심 있으세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이소희는 야망이 큰 여자였다.

내가 본 게, 그리고 노사가 본 게 정확했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네! 꼭 하고 싶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당황하다가도 지체 없이 비서 되겠다고 말했다.

내가 능력 없고 백 없는 서자라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터.

어제의 회식 자리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좋습니다. 부장에게는 나중에 따로 전할 테니, 상무실로 같이 가시죠.”

“예! 알겠습니다!”

상무실에 도착하자, 나는 접이식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파가 없어서 손님 대접이 어려울 거 같습니다. 혹시 어디서 소파를 구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아, 경리부에 전해서 소파를 받아오겠습니다.”

“벌써 일을 시켜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상무님의 비서이니 어떤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열정적으로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작게 웃었다.

‘비서는 잘 뽑은 거 같군.’

기합이 너무 들어간 거 같기는 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그리고 애초에 기합 넘치는 건 나쁘게 볼 일이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은 의욕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으니까.

비서가 생기니 확실히 적응 속도가 빨라졌다.

다른 부서는 몰라도 생산부에 대해서는 거의 다 파악이 끝났을 정도였다.

“지금 제 동기들은 상무님과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저를 무슨 신데렐라처럼 생각하는 동기들도 있습니다.”

“문정민 과장이 상무님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중입니다. 상무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회사에서는 문정민 과장이 상무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상태입니다.”

“다른 부서에서도 상무님에 대해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생산부 직원들에게 찾아와서 상무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다닌답니다.”

덤으로 정보력이라고 해야 할까?

마당발인 이소희가 온갖 정보를 물어왔다.

대부분 크게 의미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사내 정치를 이해하는 것엔 큰 도움이 됐다.

“박미란 디자이너의 연락처는 구해 놓으셨어요?”

“예! 여기 적어놨습니다.”

“그러면 직접 전화하셔서 약속 잡아주세요. 이번 주든 다음 주든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나는 외투를 입으며 익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상무님, 어디 나가십니까?”

“오랜만에 공장 좀 보고 오려고요. 제 회사였던 드림 패션 공장을 말이죠.”

디자이너를 영입하기 전에 공장의 생산 능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공장이야 내가 전문가이니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드림 패션 직원들을 만나기도 하고 말이다.

“우와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보고 싶었다고요.”

자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평화 시장에서 나만큼 직원들을 챙겨주는 사장은 드물었다.

숙련된 봉제사를 객공으로 값싸게 부려먹는 곳이니 오죽하겠는가.

평화 시장에서 오직 나만이 직원을 월급제로 고용하였다.

심지어 노사의 조언을 들은 뒤로는 타깃 수당제란 이름의 성과제까지 도입했다.

나 같은 사장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전 드림 패션, 현 혜성 모직의 생산직 직원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예! 사장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저는 사장님 없어서 잘 못 지냈습니다. 흐흐! 사장님, 공장으로 돌아오시면 안 됩니까?”

“맞습니다! 사장님이 그립습니다!”

여전히 사장이라 부르는 직원들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너의 사람이다. 본사 직원들의 환심을 사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지만, 이들의 신뢰를 잃는 일도 피해야 돼.)

굳이 그런 조언이 아니어도 생산직 직원들을 잘 챙겨줄 생각이었다.

내 사람은 내가 챙겨야 하는 법이니.

“혹시 뭐 불편한 점이나 개선됐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까?”

“음, 저는 없는 거 같습니다!”

“본사 직원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게 거슬리긴 한데, 그것 말고는 딱히…….”

갑자기 혜성 모직에 합병되었지만, 직원들은 큰 불만이 없는 듯싶었다.

하기야, 불안정한 직업을 가졌다가 한순간에 대기업 직원이 되었는데, 불만을 표출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뭐 그래도 불만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 직원들이 내 눈치를 살피는 거 같으니, 종태 형에게 한번 물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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