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한우 정도는 사줘야지
‘과연 어떤 놈일지 한번 볼까?’
최진수 부사장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똑똑!
기다림의 시간은 짧았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드는 놈이군.’
비서와 함께 들어온 한성의 모습을 보고 최진수는 작게 혀를 찼다.
회장 아들이란 사실만으로도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얼굴 생김새도 남자답게 잘생겼다.
키도 자신보다 훨씬 컸고 말이다.
‘서자 주제에…….’
최진수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앉지.”
한성은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면부터 반말하는 최진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어쩔 건데?’
최진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름이 뭐였지?”
“이한성입니다.”
“그래, 한성 군이었지.”
“상무라고 호칭해 주십시오.”
일부러 군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니 한성이 바로 정정을 요청하였다.
작은 회사지만, 어쨌든 한 회사를 이끌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예민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최진수에게는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
“아, 그러지. 이한성 상무, 만나게 돼서 반갑군.”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최진수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원래 성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어도, 저건 윗사람을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시하는 태도라고 봐야 했다.
“이한성 상무, 내가 충고할 게 하나 있어 불렀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해.”
“말씀하십시오.”
“상무가 회장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나도 모르지 않아. 아마 직원들 모두가 알고 있을 테지. 하지만 알아두게. 혜성 안에서는 누구의 자식이니, 형제니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어? 회장님을 믿고 괜히 설치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야.”
최진수의 말에 한성은 미간을 좁혔다.
대놓고 ‘나대지 마라’ 소리를 들었는데 기분이 좋을 순 없을 것이다.
“제가 혹시 실수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앞으로 주의해달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적어도 이준성 전무처럼 윗사람, 아랫사람 가리지 않고 빠따 휘두를 일은 없을 테니까.”
갑자기 이준성을 언급하자 최진수는 흠칫 놀랐다.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과 이준성 전무와의 관계를 눈치챈 것처럼 보였다.
‘설마 그럴 리가.’
서자 따위가 그렇게 정보력이 좋을 리 없었다.
“흠흠. 잘 알아들은 거 같으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용건은 다 끝나셨습니까?”
“쯧! 왜 그렇게 급하게 행동해?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있으니 계속 앉아 있어.”
“……알겠습니다.”
“이한성 상무. 자네가 드림 패션의 사장이었었지?”
“예,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결코 작은 회사가 아닌데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혹시 착각하고 있는 거는 아니지? 드림 패션 말이야. 더는 상무의 회사가 아니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상무가 착각하고 있을까 봐 걱정이 돼.”
“괜한 걱정이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타깃 수당제라고 했던가? 뭔가 쓸데없는 제도인 거 같은데, 없애도 상관없겠지?”
한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모습이 화를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최진수는 그런 한성의 표정을 보고 씩 웃었다.
“타깃 수당제를 하고 나서 생산량이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직원들에게 줄 돈도 그만큼 늘었지. 만약 다른 공장들처럼 객공들을 썼으면 훨씬 더 싸게 먹혔을 거고. 무엇보다, 생산직 직원들만 성과급을 주면 사무직 직원들이 얼마나 위화감을 느끼겠어?”
“사무직에도 성과급을 주면 되는 문제 아닙니까?”
“영업이익이 얼만지 알고나 하는 말이야? 쯧쯧. 회사를 운영했다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무식하단 소리 듣지 않게 공부 좀 해야겠어.”
“…….”
“아, 그리고 공장장도 바꾸는 게 좋을 거 같던데. 김종태였던가? 나이가 서른도 안 된다지? 원래는 영업 담당이었다는데,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를 거 아니야. 공장장이란 자리는 연륜 있는 사람을 앉혀놔야 하지 않겠어?”
본래 혜성 모직에는 공장장이란 직급이 없었다.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고 하청으로 생산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드림 패션을 인수하면서 생산직 직원들이 생겨났고 공장장이란 직급도 신설되었다.
공장장은 무려 차장급 인사.
최진수로선 자신의 사람을 힘 있는 자리에 앉힐 기회였다.
“상무, 어떻게 생각하나? 내 말대로 해도 되겠지?”
“부사장님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는데, 제가 어찌 반대합니까?”
“하하하. 회장님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할까 걱정했었는데, 사회생활을 참 잘하는군!”
반색하는 최진수에게 한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사장님의 뜻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종적으로 결재하는 것은 사장님이시지 않습니까?”
한성의 말에 최진수는 코웃음을 쳤다.
“사장님이라면 뭔가 다르게 말씀하실 거 같나?”
“그냥 저는 사장님의 뜻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피식.
최진수는 한성이 같잖게만 느껴졌다.
‘믿을 게 없어서 사장을 믿네. 사장은 내 꼭두각시나 다를 게 없는데 말이야. 푸하하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물었다.
“사장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
“안국 미싱 상사에 출장 가셨습니다.”
“출장이 아니라 거기 사장이랑 술 마시고 계시겠지. 크크. 한번 전화 걸어봐.”
“예.”
사장이 전화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진수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한성을 바라봤다.
‘곧 알게 될 거다. 내가 혜성 모직 안에서만큼은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바쁜데 무슨 일이야. 회사에 뭔 일 있어?
“사장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 걸었습니다.”
-뭘 물어본다고 귀찮게 해? 부사장 선에서 해결하면 되잖아?
최진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장은 이래서 좋았다.
“이한성 상무와 상담하고 있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제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사장님을 찾더군요.”
그는 일부러 사장이 화를 내게끔 유도했다.
하지만 사장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뭐? 이한성 상무? 회장님의 자제분이라는 이한성 상무 말하는 거야?
“예, 오늘 출근하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오늘이었어? 이런! 지금 바로 가야겠네. 상무님께 잘 말씀드려줘. 내가 놀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다급한 사장의 목소리에 최진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양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마치 한성의 눈치를 보는 거 같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민제훈 사장은 혜성 그룹의 창업 공신이었다.
서자에 불과한 한성의 눈치를 볼 이유는 전혀 없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최진수가 기가 막힌 얼굴로 한성을 바라봤다.
그런데 한성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설마 둘 사이에 교감이 있었던 건가?’
뭐가 됐던 그가 그렸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쏜살같이 달려온 민제훈 사장을 보며 나는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다.
“부사장! 어딜 감히 회장님의 자제분에게 무례한 언행을 해?”
“저는 어디까지나 상급자로서 꼭 필요한 충고를 해줬을 뿐입니다.”
“충고를 왜 자네가 하냐니까! 자네가 회장님이야?”
“…….”
“그리고 공장장을 왜 자네 마음대로 바꾸려고 하나? 잘 사용되고 있는 수당제는 왜 바꾸려는 거고?”
“어디까지나 회사를 위해서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변명은 필요 없네. 생산 총괄은 이한성 상무야! 그러니 생산 쪽은 이한성 상무에게 맡기고 괜히 쓸데없는 일 벌이지 말게.”
민제훈은 누가 봐도 편애라고 생각될 정도로 강력하게 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회사의 실세인 양 기세등등하게 행동하던 최진수도 그런 민제훈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지금까지야 민제훈이 회사 업무에 관심을 두지 않아 실세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최진수는 민제훈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민제훈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깨갱거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밀어주니, 확실히 큰 도움이 되는구나.)
노사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중립파에 속하는 민제훈이 갑자기 나를 챙겨주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한철 회장의 입김이 있어서였다.
이한철 회장이 장희자 어음 사기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한 나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한 것이다.
(근데 조금 아쉽군. 민제훈 사장이 힘 있는 인사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 말에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직급이야 민제훈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사내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애초에 민제훈은 회사에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된다.
사실상 월급을 날로 먹고 있던 셈.
그러니 민제훈이 나를 지지해준다고 해서 내 위상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최진수처럼 나를 무시하던 임원이나 간부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질 뿐.
‘뭐 쓸데없는 방해를 안 받게 되는 것만 해도 어디냐.’
조금 아쉬웠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내가 담당하는 생산부만 해도 굉장한 규모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드림 패션을 인수하면서 더욱 규모가 커진 상태.
생산부만 제대로 관리해도 회사를 성장시키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생산부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다른 부서의 직원들도 자연스럽게 나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최진수도 더는 나에게 까불 수 없게 될 것이고.
“자네에게 기대가 많아. 앞으로 잘 부탁하네, 이 상무!”
나를 어지간히 좋게 본 모양이었다.
민제훈은 거의 한 시간 만에 나를 놓아주었다.
‘이것도 참 일이군.’
분명 나의 편인데도 골치 아픈 구석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2층으로 갔다.
“문정민 과장님.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옛!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문정민은 나의 호출을 듣고서 즉각 움직였다.
조금 전에는 억지로 끌려가듯 갔었다면, 지금은 무슨 몇 달 만에 산책하는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사장인 민제훈이 적극적으로 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고서 내가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오늘 몇 시에 퇴근하십니까?”
“업무를 거의 다 끝마쳐 놓은 상태라, 7시 안에는 퇴근할 거 같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그때쯤 퇴근합니까?”
“예, 일곱 시쯤에 다 같이 퇴근합니다.”
“그러면 오늘 회식 어떻습니까?”
“회식이요? 좋죠. 너무 좋습니다. 그런 것 보니 상무님 오셨는데 환영 회식을 안 할 뻔했네요! 제가 부서 사람들에게 말해놓겠습니다. 시간 비워 놓으라고.”
“억지로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만 부르면 됩니다.”
직원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갖는 회식 자리였다.
약속이 따로 잡혀있는 직원들까지 억지로 부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상무가 회식하자는데 불참할 직원은 별로 없겠지만 말이다.
“보통 회식하면 어떤 음식 드십니까?”
“세겹살(삼겹살)을 주로 먹습니다. 통닭이나 된장찌개를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소고기 먹읍시다.”
“소, 소고기요?”
“제가 쏘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회식인데 소고기 정도는 되어야 불만이 없지 않겠는가?
내가 월급을 늘려주거나 직급을 높여줄 순 없지만 적어도 이 정도는 통 크게 해줄 수 있었다.
“헉! 저희 부서 사람들 다 모으면 40명은 될 텐데요?”
“괜찮습니다. 40명이 아니라 백 명을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문정민의 눈에서 존경심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