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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6화 (16/300)

16화 나 때는 열 명도 넘었어

“여기가 혜성 모직인가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낡아 보이는군요.”

(오래됐으니까. 지어진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건물이다.)

작고 낡은 건물.

그룹에서 혜성 모직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차에서 내린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마중을 안 오는군요.”

원래라면 부서 직원 전부가 마중을 나왔어야 했다.

상무 정도 되면 그 정도의 의전은 준비하는 게 보통이니까.

하지만 어찌 된 게 의전은커녕 마중 나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지금 너를 향한 사내 여론이 그리 좋지 않다. 의전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1층 카운터로 갔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저는 이한성 상무이사입니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여직원은 내 말에 매우 놀란 눈빛이었다.

“아……. 상무실은 4층입니다.”

그게 끝인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모습을 보니 직접 안내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상무이사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푸대접을 받는 거 같았다.

“온다, 온다.”

“저 사람이야? 얼굴은 잘생겼는데?”

“뭐가 저리 젊어? 20대 중반이랬지?”

“재벌은 부럽네. 저 나이에 상무도 달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데 2층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고개를 돌리니 언제 뒷담 깠냐는 듯, 딴청부렸다.

‘무슨 왕따가 된 기분이군.’

단순히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4층에 있는 상무실을 가니 내가 처한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른 집기는 거의 없었고 책상과 의자, 전화기만 덜렁 있을 뿐이었다.

회의실로 쓰던 공간을 억지로 사무실처럼 만든 느낌이었다.

심지어 구석에는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있어서 외관이 더 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청소는 해놨나 보군. 먼지는 없어 보여.)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상했던 일인데 뭘 그리 흥분하느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회사에 다녀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비서도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좋게 생각해라. 네 사람을 직접 뽑을 기회가 생긴 셈이 아니냐? 드림 패션에서 너를 보좌했던 최미영을 불러도 좋고, 회사 내에서 새로 뽑아도 좋은 일이다.)

“비서야 그렇다 쳐도, 저를 대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까 보니 직원들도 저를 안 좋게 보는 거 같고, 임원들도 당연히 저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지 않으냐? 이준성이 수작을 부린 결과다. 아마 부사장을 시켜서 너를 따돌리라 지시했겠지. 그래야 네가 어떤 활약도 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역시 그런 거였나.

이준성,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놈이었다.

“그냥 혜성 모직을 인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혜성 그룹의 계열사가 아니었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회사였다.

영업이익이 일억도 안 될 정도였다.

아마 현금으로 10억만 있어도 인수가 가능할 테지.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있어 10억은 그리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니었다.

황 노인에게 빌린 50억이 어느덧 구십억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장희자에게 받은 돈까지 합치면 내 전 재산은 백억 이상이었다.

(나중에 네 회사가 될 텐데 왜 굳이 돈을 쓰려고 해?)

“인수하면 편하게 갈 수 있잖아요. 이준성의 지시를 받는 임원이나 직원들을 모두 자르면 되니까.”

사주에게 누가 감히 푸대접하겠는가.

다른 임원들과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일 일도 없었다.

해고하면 그만이니.

(애초에 아버지가 혜성 모직을 팔 거 같으냐? 다른 계열사와 순환 출자로 연결되어 있는데?)

“…….”

노사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하긴, 비상장 기업을 인수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대기업 같은 경우 순환 출자로 계열사들이 묶여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적어도 원래 받았어야 했을 대우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

“꿈으로 간접 경험을 하긴 했지만, 정확히 어떤 대우를 받습니까?”

(나는 혜성 건설의 차장으로 입사했다. 너는 상관이라고 할 사람이 고작해야 세 명뿐이지만, 나 때는 열 명도 넘었어.)

“끔찍하군요. 힘드셨겠습니다.”

(적응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건설 쪽은 아예 아는 것도 없어서 더 그랬지.)

그 말을 들으니 제법 위로가 됐다.

지금의 상황이 썩 좋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혜성 건설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아무튼,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적어도 사장은 너의 편이지 않으냐?)

맞는 말이다.

이준성의 졸렬한 수작 때문에 화를 낸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원래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회사를 장악해 가면 되는 일이었다.

마침 이한철 회장 덕에 혜성 모직 사장을 아군으로 둘 수 있었으니 회사를 장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종태 형을 불러오면 좋을 텐데, 그건 힘들겠죠?”

(지금은 어렵다. 벌써 인사에 관여하면 말들이 많을 테니.)

“그럼 부서의 사람들부터 제 사람으로 만들어야겠군요.”

(이왕이면 과장급을 먼저 만나 봐라. 회사 사정도 물어봐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 * *

휴식 시간이 되자 생산부 직원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 오신 상무님, 진짜 젊어 보이던데요?”

“20대 중반이시니 당연히 젊으시지.”

“근데 왜 하필 여기로 온 걸까요? 솔직히 혜성 모직은 다른 계열사에 비해 존재감이 없는 편이잖아요?”

“만만해서 그런 게 아닐까?”

“드림 패션이란 봉제 공장을 운영하셨다잖아. 비슷한 업종이니 여기로 오신 거겠지.”

한성은 그들의 직속 상관이었다.

그러니 한성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상무님, 마중도 안 나가고 쌩깠잖아요. 아까 보니까 혼자서 4층으로 올라가시던데.”

“그러게. 우리 부서라도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괜히 우리만 피 보는 거 아닙니까?”

생산부 직원들은 이한성 상무가 오늘 온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부사장이 업무를 핑계로 의전 행사를 못 하게 막았을 테니까.

“뭐 걱정할 필요 있겠어?”

모두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을 걱정할 때, 문정민 과장만은 여유로웠다.

“과장님, 혹시 좋은 정보 가지고 계십니까?”

“일개 과장인 내가 알만한 게 뭐가 있겠어.”

“그런데 왜 혼자 그렇게 여유가 있으십니까? 나중에 상무님이 이 일을 빌미로 조인트 깔 수도 있을 텐데.”

“에이. 상무님 나이가 몇이야?”

“20대 중반이죠.”

“그래, 겨우 20대 중반이야. 이 주임보다 나이가 낮다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상무라니.

제아무리 회장의 아들이라 해도 회사 생활에 적응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혜성 모직의 실세인 최진수 부사장이 적대하는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회사 생활도 처음이실 텐데, 설마 우리를 막 대하시겠어? 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실 텐데?”

“음…….”

“적당히 눈치 보면서 우리 뜻대로 요리하면 돼. 중대 행보관이 갓 전임 온 소위 다루듯 다루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이전과 달라지는 건 없어.”

문제는 자대에 갓 전임 온 소위가 군단장의 아들이라는 거지만, 문정민은 그에 대해선 큰 걱정이 없는 듯했다.

“과장님…….”

“왜? 내가 대단해 보여? 하하하! 나 정도 짬이 되면 이 정도 여유는 기본이야. 솔직한 말로, 회장님 아들이라도 20대면 우스울 따름이지.”

“뒤, 뒤에 상무님 계세요.”

“뭐라고?”

부하 직원의 말에 문정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부하들 앞에서 요란을 떨 수는 없는 일.

그는 침착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끄아악!”

태연한 척하던 문정민은 뒤에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한성의 모습을 보고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체격이 원체 큰 데다 무표정한 얼굴이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정민 과장님? 상무실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예, 예?”

“상무실로 같이 가주시죠.”

문정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갑자기 자신을 따라오라니?

실로 두렵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서, 설마 이준성 전무처럼 빠따로 때리는 거 아니야?’

아랫사람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이준성의 안 좋은 소문들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보기에는 멀쩡하게 생겼어도 한성은 이준성의 형제였다.

자신을 뒷담깠다는 명분 하나로 문정민을 두들겨 패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젠장! 내가 왜 이렇게 안일했지?’

뒤늦은 후회였다.

“안 가십니까?”

겁에 질린 표정으로 굳어있던 문정민은 한성의 재촉에 다급히 대답했다.

“가, 가겠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는 그의 모습을 부하 직원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소파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가 없네요. 불편하시겠지만 의자에 앉으세요.”

“하, 하, 하. 저는 괜찮습니다.”

문정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뒷담까다 걸려서 그런지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저는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상무로 오게 됐죠. 아, 물론 과장님도 잘 아시겠군요.”

“……그,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안 듣는 곳에선 임금님도 욕한다는데요, 뭘.”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뒷담까겠다는 이야긴가요?”

“그, 그게 아니고.”

“농담이었습니다. 과장님을 질책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리 말했지만, 문정민은 여전히 좌불안석이었다.

회장의 아들인 나와 1:1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거 같았다.

“오늘 처음 출근해서 그런지,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습니다. 매출부터 시작해서 직원들의 평균 월급, 주요 거래처 등등”

“아, 지금 자료를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자료는 굳이 없어도 됩니다. 저는 그저 과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다.

노사가 가끔 혜성 모직을 관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사가 관찰하는 것은 그룹 주요 인사들의 성품이나 업무 수행 능력이었다.

간혹, 비리 내역을 조사하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그룹의 주요 임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회사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하기 어려우시다면 일단 매출만 먼저 설명해 주세요.”

다행히 문정민은 그리 내향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계속해서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자 이내 활기찬 목소리로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매출은 별거 없었다.

겨우 20억.

영업이익은 적자가 아닌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나는 그 뒤로 더욱 내밀한 정보에 관해 물었다.

가장 힘 있는 부서는 어디인지, 부서 간의 사이는 어떠한지를.

“아무래도 가장 힘이 있는 부서는 전무실과 붙어 있는 영업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생산 계획도 다 영업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수행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다음은요?”

“경리부입니다. 자금을 관리하는 부서이니 힘이 셀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생산부군요.”

“……예, 그렇습니다.”

마지막이 바로 내가 담당할 생산부였다.

물론 나는 어디까지나 생산 총괄이었기에 영업부에도 반쯤 발을 거치고 있었다.

하지만 영업부는 위치 자체가 전무실과 붙어있었기에 내가 관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나저나 부서가 겨우 세 개뿐이라니. 이래서야 대기업 계열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규모가 큰 의류 회사였다면 기회부와 디자인을 담당하는 개발부, 마케팅부 등이 있었을 거다.

혜성 모직은 매출뿐만이 아니라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중소기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똑똑!

그렇게 한창 문정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누구십니까?”

“최진수 부사장님의 비서입니다. 죄송한데, 지금 바로 이동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사장님께서 상무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비서의 태도가 건방지게만 느껴졌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않다니.

다짜고짜 부사장의 호출 명령을 전하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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