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목표는 백억이다
“의례적인 실사도 끝이 났군요.”
(실사가 끝났으니 이제 정식으로 합병 절차를 밟게 될 거다.)
4월 중순.
드림 패션에 출근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소속이 곧 드림 패션에서 혜성 모직으로 옮겨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출근할 날이 5월 13일인데, 그때쯤이면 그룹이 굉장히 어수선하겠는데요?”
(그룹이야 어수선하겠지만, 혜성 모직은 크게 다를 게 없을 거다. 비중 있는 계열사가 아니니 말이야.)
“하긴, 그도 그렇겠습니다.”
나는 주변을 훑어봤다.
골목길이 마치 미로처럼 꼬여 있었다.
“저 근데 이쪽으로 가는 거 맞습니까?”
(쭉 가면 나온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명동까지 왔는데 정작 구경하는 거라곤 후미진 골목길뿐이라니.
“드디어 나왔네요. 저기 맞습니까?”
(맞다. 고려 기원. 내가 한 시간 전에 확인해 본 결과, 아직 황 노인은 저 안에 있다.)
다행이었다.
헛걸음은 아니어서.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3층에 도착하니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골목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는데 고려 기원만큼은 예외였다.
(연막탄이라도 깐 거 같구나.)
“뭐 어디든 사람 많은 곳이라면 다 이렇지 않습니까.”
고려 기원의 실내는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4월 치고 쌀쌀해서 환기를 안 하는 모양이었다.
(저기 창가 구석에 있는 사람이 황 노인이다.)
노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 노인의 외모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모였다.
나이는 60대 중반?
‘거물들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는데, 황 노인은 너무 평범하잖아?’
살짝 실망이었다.
하기야, 대기업 회장인 이한철 회장에게도 엄청난 무언가를 느끼진 않았었다.
장희자도 요염한 매력을 뿜어냈던 것을 제외하면 평범했고.
“지금 바로 말을 걸어볼까요?”
(아직 경기 중이니까,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해라. 황 노인의 성격이라면 괜히 말을 걸었다간 크게 화를 낼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니 주의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마침내 승부가 갈렸다.
“황인범 회장님 되십니까?”
“대국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다니. 예의를 아는 젊은이구먼.”
잠자코 기다린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미리 만들어둔 명함을 건넸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혜성 모직 상무이사 이한성.
하지만 황 노인은 내 명함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바둑 좀 하는가?”
“예?”
(얼른 할 줄 안다고 대답해!)
바둑은 군대에서 몇 번 해본 게 다인데…….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노사가 있으니 괜찮을 거 같았다.
“아, 할 줄 압니다.”
“그럼 앉게.”
“알겠습니다.”
“자네가 흑으로 해봐.”
나는 검은 돌을 들었다.
어디에다 둘지 고민하는데 노사가 한 곳을 가리켰다.
좌상귀의 소목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황 노인이 흰 돌을 움직이자 나는 노사의 조언을 듣고 다음 수를 두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대국이 이어지는데 노사가 갑자기 말했다.
(졌다고 말해라.)
상황이 어떤지도 몰랐는데 내가 어느새 졌나 보다.
“졌습니다.”
“젊은 친구가 꽤 하는군. 자세는 영 엉성한데 말이야.”
황 노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사께서 일부러 져준 걸까?’
뭐가 됐든 황 노인의 표정이 나쁘지 않으니 그걸로 됐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우리는 근처 다방으로 움직였다.
“그래. 나를 찾아온 목적이 뭔가?”
쌍화차를 한 모금 마신 황 노인이 불쑥 물었다.
“돈을 빌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끌끌. 사채업자를 찾아올 이유야 뻔한데 괜한 걸 물었군. 그래. 돈을 빌리는 주체는 자네 개인인가, 아니면 혜성 그룹인가?”
“……제가 혜성 그룹의 사람인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네가 명함을 줘놓고 왜 딴소리를 해?”
“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내 명함을 보기는 했나 보다.
“얼마를 빌리려고?”
“50억을 빌리고 싶습니다.”
“담보는?”
“혜성 건설 지분입니다. 현재 5%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50억.
만약 이 돈을 빌릴 수만 있다면 5월에 제법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장희자로 인해 주가가 폭락할 때, 전자주 주식을 사두면 한 달 안에 두 배 수익도 가능할 테니까.
“담보가 부족한데? 5%는 너무 적어. 적어도 10% 이상은 가져와 봐.”
“담보는 이거뿐입니다. 대신 제가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정보? 끌끌.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정부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혜성 그룹에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말이야.”
나는 긴장했다.
황 노인의 번뜩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꼭 정부와 친해야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네만……. 좋아. 말해보게. 일단 들어보도록 하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됐으니 팔부 능선은 넘은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본론을 꺼내기 전에 조건을 하나 달았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에 제가 제공한 정보로 손해를 만회한 것을 넘어 이득까지 보시게 된다면, 저뿐만이 아니라 혜성 그룹에도 대출해 주십시오.”
단순히 내 개인의 성공으로 만족해선 안 된다.
혜성 그룹의 회장이 될 몸이라면 그룹 전체를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 법.
그렇기에 애매한 조건 하나를 추가로 넣었다.
“어느 정도의 이득인지는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 정도야 못 해줄 것도 없지. 그러니 이제 말해보게나.”
뜸을 들이는 건 여기까지.
황 노인이 성내기 전에 나는 서둘러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동영토건, 일심제강, 삼인주택, 태원금속의 채권이나 어음을 가지고 계신다면 서둘러서 정리하셔야 합니다.”
“왜 그런가?”
“중앙수사국, 아니, 이번에 이름을 바꾼 중수부를 한번 조사해 보십시오. 그들이 아주 엄청난 것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했던 기업들이 전부 검찰 조사를 받거나, 최악의 경우 도산하게 될 만큼 엄청난 수사입니다.”
명동 큰손 4인방 중의 한 명인 황 노인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연히 대검찰청에도 긴밀한 끈을 가지고 있으리라.
내가 전해준 약간의 힌트만으로도 어음 사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될 것이다.
“끌끌. 재미있구나. 알았네. 오늘 바로 중수부가 조사하는 내용을 알아보지. 다만, 이 정보가 가짜로 판명 난다면 자네……. 크게 혼이 날 거야.”
나는 몸을 움찔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범한 노인처럼 보였던 황 노인에게서 무서운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는 않았다.
노사가 가져온 정보였다.
신뢰도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 *
(역사는 바뀌지 않았군.)
노사는 혹시 모를 나비효과란 것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1982년 5월 7일.
원래 역사대로 ‘미화 80만 불 국내외 은닉’이라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장희자가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는 내용이다.
물론 5월 7일의 보도는 서막에 불과했다.
단순한 달러 불법 소지 혐의는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이자 최대 권력형 비리로 확산하였다.
“역사가 바뀔 만큼 제가 큰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내가 아는 미래와 똑같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지금까지 나비효과가 없었던 것만으로도 기적과도 같은 일이니까.)
그 말을 들으니 괜히 불안해졌다.
내가 혜성 그룹의 미래를 바꾼다면?
장희자의 돈이나 황 노인에게 받을 돈으로 주식을 한다면 어떨까?
앞으로의 미래는 노사가 아는 미래와 상당히 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노사가 전해주는 미래에 관한 정보도 더는 신뢰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일이 최대한 늦게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앞으로는 확실한 곳에다만 투자해야 할 거 같았다.
이를테면 일성 전자 같은 곳 말이다.
따르릉!
“여보세요?”
-끌끌. 황 회장일세.
“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자네 덕분에 아주 잘 지냈네. 하하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황 노인의 밝은 목소리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 가장 기쁜 사람은 황 노인일 거다.
내 덕분에 금전적인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테니까.
“크게 손해는 안 보셨나 봅니다.”
-끌끌! 자네가 그런 정보를 줬는데 손해를 볼 일이 있겠는가? 오히려 큰 이득을 보았다네. 공매도했거든. 하하하.
공매도?
역시 황 노인쯤 되니까 공매도도 하는구나.
증권사와 연결되지 않으면 개인은 공매도할 수 없는데 말이다.
“축하드립니다.”
-덕분일세. 내, 자네에게 큰 빚을 졌어. 은혜도 입었고.
“아닙니다.”
-50억, 빌려주겠네. 이자는 시중의 은행만큼만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예정된 결과였지만,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50억이라니!
비록 장희자에게 받은 돈과는 다르게 언젠가 갚아야 할 돈이긴 해도, 기분이 전혀 달랐다.
장희자에게 받은 돈은 검찰이 무서워 당분간 꼭꼭 숨겨둬야 할 돈이었다.
반면 황 노인에게 받을 오십억은 엄연히 합법적인 돈.
지금 당장 주식에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였다.
-그리고 혜성 그룹에도 대출해 주지. 공매도로 꽤 이득을 봤으니 5백억 정도는 무리 없이 빌려줄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혜성 그룹 같은 대기업에서 5백억은 ‘고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 노인은 경제계 인사들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가 대출해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혜성 그룹의 신용도는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은 자네가 필요할 때 주겠네. 50억이든, 5백억이든 말일세.
(50억은 지금 받고 5백억은 나중에 받겠다고 말해라. 혜성 그룹이 위기에 처할 때, 네가 구세주처럼 나타나야 5백억으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노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얍삽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바로 50억을 빌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5백억은 나중에 필요할 때 말해주게나.
“감사합니다.”
-끌끌.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내가 얻은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니까.
공매도로 많이 벌기는 했나 보다.
적어도 몇백억은 벌지 않았을까?
뭐 어차피 나로서는 공매도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질투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부럽긴 하네.’
어쨌든 만족스러운 통화였다.
나는 통화가 끝나자 노사에게 말했다.
“황 노인에게 돈을 받으면 바로 주식을 해야겠군요.”
(목표는 백억이다. 반드시 백억을 채워야 해. 이번이 아니면 기회는 별로 없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굳이 나비효과가 아니더라도 작년과 같은 경이적인 수익률을 경험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움직이게 될 자금 규모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거래량은 9백만 주밖에 안 되는 시대에서 백억이란 돈은 지나치게 많았다.
이번에 크게 벌고 나면은 장기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일성 전자나 다른 전자주 그리고 제약주의 주식을 사놓고 나중을 기약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뭐 사실 나는 백억으로도 충분한 거 같지만 말이야.’
* * *
혜성 그룹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장희자 사건이 터지면서 국내 기업 대부분의 신용이 떨어진 상황.
특히 건설사들의 신용도가 크게 내려갔다.
도사한 기업도 적지 않았다.
혜성 건설이라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룹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하지만 혜성 모직만은 예외였다.
워낙 비중이 없는 계열사다 보니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에 비교적 멀쩡했다.
그러나 5월 13일.
오늘만큼은 혜성 모직도 다른 계열사들만큼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새롭게 임명된 상무이사가 출근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부사장님. 이한성 상무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서자 주제에 빨리도 출근하는군.”
혜성 모직 부사장 최진수.
그는 이한성이 곧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26살이라고 했던가? 그야말로 애송이군. 크크. 그래도 애송이 덕에 중앙으로 갈 기회가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