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예상했던 대로군
가평에 있는 2백 평 규모의 별장.
마치 왕이 사는 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별장 안에 한 여인이 있었다.
미모가 상당한 30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남자답게 생겼구나. 키도 큰 게 아주 매력적이야.”
여인, 장희자는 다리를 꼬며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간한 남자들이라면 혼이 나갈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물론 나도 그 어지간한 남자에 포함되는지라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상대는 유부녀다. 헛생각하지 말고 대화에 집중해!)
하지만 나에게는 노사가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외모를 평가하기 전에, 일단 사과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내가 그거를 안 했구나? 미안, 미안. 원체 사과라는 것을 안 해본 사람이라 서툴렀어, 내가.”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아직 몇 마디밖에 대화를 안 나누어봤지만, 상대하기가 어지간히 까다로운 여인인 거 같았다.
“좋습니다. 사과는 받은 거로 치죠. 그런데 저를 부르신 이유는 뭡니까?”
“두 가지, 원하는 게 있어서 불렀어. 원래는 하나였는데, 얼마 전에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지 뭐야?”
“어떤 거죠?”
“혜성 가. 당신이 혜성 그룹 회장의 삼남이라며?”
장희자가 마치 대단한 정보를 알아챈 듯, 한껏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하기야 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재벌 2세였으니 그녀에겐 제법 신나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요?”
“어, 이거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네? 당연히 놀랄 줄 알았는데…… 당신 참 이상해?”
“제가 원래 무뚝뚝한 성격입니다.”
“흥, 그래? 아무튼 알았어. 부정을 안 하는 걸 보면, 혜성 가의 삼남이 맞기는 한다는 거지?”
어깨를 으쓱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좋아, 그럼 내가 원하는 걸 말해줄게. 우선 첫 번째는 주식이야.”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신 증권에다 명함을 남겼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내 투자 실력이 그렇게 탐이 났나?’
굴리는 자금만 많지, 실속이 없었던 그녀로선 실력 있는 전문가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요구했다.
“주식을 잘한다고 들었어. 천만 원 미만의 소자본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억 단위를 굴리는 전주가 되었다고?”
“장 대표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호,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만데? 그래도 당신, 굉장히 흥미로워. 호재가 될 만한 갖가지 정부 조치를 점쟁이처럼 맞추던데, 혜성 그룹에서 도와준 거야?”
“제 부친이 혜성 그룹 회장인 걸 불과 며칠 전에 알았습니다. 당연히 혜성 그룹에서 지원받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여줬던 실적이 순수한 본인 실력이라는 거지?”
“예.”
짝짝!
장희자가 손뼉 치며 환호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나는 당신 같은 실력자를 꼭 만나보고 싶었어!”
“저 말고도 실력자는 많을 텐데요?”
“많기는! 쭉정이들밖에 없던데? 그리고 진짜 실력자들은 내 밑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아. 황 노인 밑에서 일하려고 하지.”
황 노인이 누구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타이밍 좋게 노사가 설명해 주었다.
(본명은 나도 모른다. 다만, 명동 큰손 4인방 중의 한 명이자 증권시장에서 가장 크게 노는 큰손으로 알고 있다.)
노사의 설명을 들으니 황 노인이란 인물이 엄청난 거물이란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명동 큰손 4인방은 재벌 회장들조차 쩔쩔매는, 이 나라 최고의 사채업자들이었다.
황 노인이란 사람도 아마 굴리는 자금이 몇천억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저 역시 장 사장님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밑천이 적어서 아쉽지 않았어? 내가 돈을 빌려줄게. 어때? 이 정도면 좋은 조건 아니야? 이자 없이 돈을 빌려줄 테니, 당신은 나에게 투자 조언을 해주는 거지.”
그녀가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나쁘지 않군. 잘만 하면 돈을 꽤 벌 수 있겠어.)
장희자에게 받는 돈은 공돈이나 다를 게 없었다.
받기만 하면 무조건 이득이라는 뜻이었다.
“얼마 정도 빌려주시겠습니까?”
“10억? 그 정도면 되려나?”
아무렇지 않게 10억을 부르다니.
역시 통이 컸다.
하지만 겨우 10억으로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족합니다.”
“흐음. 그럼 얼마?”
“30억. 30억을 주면 제가 5월에 기가 막힌 정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최소 두 배 이상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정보입니다.”
어차피 5월 초부터 사회에서 볼 일 없는 여인인데 어떤 약속이야 못하겠는가.
“두 배? 어떻게 해야 두 배를 벌 수 있지? 도대체 그 정보가 뭐야?”
“지금은 알려줄 수 없습니다.”
“흥, 그렇단 말이지?”
장희자는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봤다.
“30억이 나에게 큰돈은 아니긴 한데…… 내가 뭘 믿고 당신에게 30억씩이나 빌려주지?”
“5월 말에 40억으로 갚아드리겠습니다.”
일부로 10억을 더 얹혀서 갚는다고 해줬다.
그녀에게 10억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만큼 내가 자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말은 또 어떻게 믿고?”
“제가 혜성 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혜성 건설 지분도 가지고 있으니 40억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호호호, 그건 그러네? 재벌 2세라는 신분만큼 확실한 건 없긴 하지. 지분까지 가졌다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눈을 빛냈다.
여기서 30억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앞으로 있을 후계 경쟁에서 상당한 이점이 될 것이었다.
“좋아. 빌려줄게. 30억.”
그녀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장희자에게 받는 30억이었다.
돈을 갚을 필요가 없는, 말 그대로 공돈이었다.
‘물론 검찰에게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겠지만 말이야.’
검찰 조사가 끝날 때까지 몇 개월 정도 묵혀둔다면 그때 진짜 내 돈이 될 것이다.
“단, 이 사실을 명심해. 내 뒤에는 안기부가 있다는 사실을. 만약 내 돈을 떼먹으려 든다면 당신뿐만이 아니라 혜성 그룹까지 당하게 될 거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던 그녀는 이내 호호 웃으며 말했다.
“조금 무서웠지? 호호,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그렇게 무섭기만 한 사람은 아니니까. 반대로 나랑 한 약속만 지킨다면 내가 엄청나게 잘해줄게. 나 알지? 증권가의 대모라 불리는 사람이야. 큰손 중의 큰손이라고.”
“두 번째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사람이 뭐가 그렇게 진지해? 사적인 말은 아예 하지도 못하게 막아버리네. 당신, 연애결혼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겠어.”
“…….”
“이젠 대답도 안 하네? 뭐 좋아. 본론을 말해줄게. 두 번째 요구는 내 제안을 당신 아버지에게 전해주는 거야.”
“부친에게 전해야 할 제안이 뭡니까?”
“요즘 혜성 그룹이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지? 내가 도와줄게. 돈? 천억까지도 빌려줄 수 있어. 연 11% 금리로 2년 거치 3년 분할 상환 방식으로 말이야.”
사채시장 금리가 아무리 못해도 35%였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낮은 금리로 천억을 빌려준다고 한다.
혜성 그룹의 입장에서는 절대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혜성 그룹에 너무 유리한 조건 같습니다만.”
“대신, 빌려준 돈의 두 배에 해당하는 어음을 끊어줘.”
“……!”
(이 여자가 미쳤군. 어딜, 혜성 그룹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려 해?)
노사가 혀를 찼다.
나 역시 기가 차서 그저 헛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마지막 이야기 빼고는 소득이 나쁘지 않았군요.”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노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노사 역시도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설마 이렇게 쉽게 30억을 받아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담보도 없었고 무슨 이상한 계약서를 작성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 몇 마디로 30억을 받아냈다.
상대가 시중의 금융 기관이었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채업자였어도 이렇게 절차 없이 돈을 빌리는 게 불가능했다.
졸부나 다를 게 없는 장희자였기에 가능한 일.
“그 여자에게 30억은 아무것도 아닌 돈이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보다는,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거지.)
“결과적으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습니다. 본인 미래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말입니다.”
(원래 성공이 계속되면 과도한 자신감이 생기는 법이다.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해라.)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장희자가 조금 더 늦게 검찰에 기소되었다면 혜성 그룹도 어음 사기 사건에 연루될 수도 있었겠어. 장희자가 오래전부터 혜성 그룹을 노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저금리로 거액의 대출을 받겠다고 대출 금액의 두 배나 되는 어음을 끊어준다?
어음도 결국 빚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출 금액의 세 배를 갚아야 하는 셈이었다.
만약 장희자의 제안을 받아서 천억을 빌린다면 결과적으로 3천억을 갚아야 하는 것.
혜성 그룹이 그 빚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의 역사에선 그런 일이 없었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그런 속임수 같은 일에 놀아나지는 않겠지. 지금보다 그룹의 사정이 나빠지면 또 달랐겠지만.)
“그런 것 보니 어음 사기 사건이 터지면 혜성 그룹은 더욱더 사정이 안 좋아지겠네요.”
(사실상 혜성 그룹의 몰락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지. 장희자 사건이 터지면서 건설사들의 신용이 떨어지게 되고 결국 제2 금융권에서 750억에 달하는 단기 채권을 회수해 가니 말이야.)
장희자에게서 30억을 받아냈지만, 결코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몰락할 때, 혜성 그룹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할 것이니까.
“노사님.”
(왜?)
“제가 회장이 되기 전까지 혜성 그룹의 위기를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겁니까?”
(그럼?)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서 혜성 그룹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흠.)
노사가 턱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하나 생각한 게 있다.)
“뭡니까?”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일요일에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에게 주의를 주는 거다.)
“주의라면 어음 사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버지는 자금 압박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업 확장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적당히 위기감을 심어줄 필요가 있어. 덤으로 아버지에게 점수도 얻고 말이야.)
“음.”
(그리고 이왕 장희자와 접촉한 김에, 황 노인과도 접촉할 필요가 있다.)
“황 노인이라면 명동 큰손 중의 한 명이라던 그 사람 말씀입니까?”
(그래. 지금 시점에선 웬만한 대기업 회장보다 거물이라고 볼 수 있는 자지. 그와의 인맥이 생긴다면 혜성 그룹의 위기를 막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황 노인이 아주 약간의 금액만 대출해 줘도 혜성 그룹의 신용은 크게 올라갈 테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법이었다.
나는 혜성 그룹의 자본을 이용해서 주식이나 땅 투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노사의 방법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황 노인은 동원 가능한 자금력이 수천억에 달하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의 지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혜성 그룹의 자금난도 일시적으로는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글쎄. 한번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 같군.)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노사라면 어떤 방법이든 만들어 올 거 같은 기분이었다.
일요일이 됐다.
나는 방배동에 위치한 회장의 저택 앞에서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며 심호흡했다.
하지만 긴장한 것도 잠시, 나는 거침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한성 도련님.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중년 사내가 나를 마중 나와서는 그 같이 인사했다.
저택의 사용인처럼 보였는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공손하였다.
아무래도 회장이 주의를 준 모양이었다.
“누구십니까.”
“집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식당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역시 재벌쯤 되니 집사도 거느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넓은 복도를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꿈에서 본 얼굴이었다.
“네가 이한성이냐?”
“그쪽은?”
“뭐? 건방지게 어디서 그쪽은이야?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준성이야. 대 혜성 가의 장남이라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성격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정말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오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