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자네 미쳤나? 버르장머리 없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연한 요구를 하는 게 왜 버르장머리 없는 겁니까.”
“이 자식이 정말?”
분노하는 그와 달리 나는 태연했다.
물론 속내는 달랐다.
‘이거 진짜 잘한 짓인지 모르겠네.’
양승국은 평화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도매상이었다.
주로 도매상들에게 오더를 받는 나로선 후환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네! 그깟 얼마 안 되는 돈, 바로 입금해 주지.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아두게. 다시는 나와 거래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양승국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분노를 표출하고는 그대로 떠났다.
“이게 뭔 일이래요?”
“모르겠어. 저 양반이 갑자기 성질을 부리네?”
“양승국 그 사람, 거물 아니에요? 저렇게 싸워도 괜찮을까요.”
“몰라. 사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봉제 작업하던 직원들이 양승국의 말을 듣고 웅성거렸다.
직원 중에 양승국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오더도 양승국의 오더였다.
그러니 직원들은 걱정이 앞섰다.
(잘했다.)
“정말 잘한 거 맞습니까?”
(그렇게 들이박아 놓고 인제 와서 걱정하는 거냐?)
“후속 오더를 안 준다고 해서 욱해버렸습니다. 근데, 후속 오더야 그렇다 치고 양 사장의 인맥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깟 도매상 놈의 인맥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평화 시장에서나 조금 알아주는 놈 아니냐?)
평화 시장에서 알아준다는 게 문제였다.
“후우. 잘못하면 12월부터 공장을 닫아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평화 시장에서 오더를 못 받아도 다 방법이 있으니.)
“방법이요?”
(기다려 봐라. 올 때가 되었으니.)
올 때가 되었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우웅.
그때였다.
갑자기 자동차 한 대가 공장 앞에 멈춰 섰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공장이 호경 패션 맞습니까?”
금테 안경을 쓴 사내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물었다.
“아니요. 호경 패션이 아니고, 드림 패션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잘못 찾아온 거 같습니다.”
(내가 말한 게 바로 저 사람이다. 너는 무조건 저 사람을 잡아야 해.)
노사의 그 같은 말에 나는 다급히 사내를 붙잡았다.
“혹시 어떤 일로 호경 패션을 찾으십니까?”
“전 이런 사람입니다.”
사내가 명함을 건네주었다.
대성 어패럴 대표이사 김휘겸.
‘처음 들어보는 회사인데…….’
일단 동대문 근처에 있는 회사는 아닌 게 확실했다.
동대문 근처에 있는 회사라면 공장을 잘못 찾아올 일도 없었을 것이니.
“이번에 우리 회사가 수출을 하게 되면서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청 업체를 찾고 있는데, 주변에서 호경 패션을 추천해주었습니다.”
“하청 업체가 필요하신 거라면 저희 드림 패션과도 이야기를 나눠 보시지요. 품질과 납기는 확실하게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젊으신데, 사장이십니까?”
“예. 제가 드림 패션 사장입니다.”
사내, 김휘겸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회사 이름은 대성 어패럴. 정확히는 기억 안 나도 77년인가 78년쯤에 창업한 회사다. 그리고 올해 겨울부터 크게 성장하지. 나중에는 매출 수천 억대의 의류 수출 업체가 되고. 이번에 오더를 따낸다면 대성 어패럴이 성장하는 만큼 드림 패션도 성장하게 될 거다.)
공장을 안내하는데 노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양승국, 그놈만 아니었으면 대성 어패럴의 오더를 따냈을 텐데. 기약 없는 양승국의 후속 오더 때문에 대성 어패럴을 놓치고 말았어.)
어쩐지.
양승국을 쏘아보는 노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기계들이 독일제군요?”
“독일제가 비싸도 가장 성능이 좋지 않습니까? 품질만 보고서 구매했습니다.”
“호오.”
김휘겸은 감탄한 듯했다.
독일제라 하면 고급, 정교한 기술력, 뛰어난 품질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실제로도 크게 틀리지 않고.
물론 비싸다는 게 흠이라서 주변 공장들은 전부 국산이나 일본제를 쓴다.
인근에서 독일제 쓰는 것은 우리 공장뿐이리라.
이러니 김휘겸이 감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카시 같은 고급 원단도 봉제하실 수 있습니까?”
감탄하던 김휘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본격적으로 우리 공장의 실력을 가늠하려는 거 같았다.
‘보카시라, 가능하겠지?’
살짝 우려되기는 했다.
최근에는 저렴한 원단 위주로 오더를 받아서 고급 원단을 다루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드림 패션 재봉사들의 실력을 믿었다.
우리 재봉사들이라면 고급 원단도 무리 없이 봉제할 수 있으리라. 각 원단에 어떤 바늘을 써야 하는지 꿰뚫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예, 당연히 가능합니다.”
“그렇습니까?”
“저희 드림 패션은 다른 공장들처럼 객공 제도가 아닌, 일반 월급제로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숙련된 재봉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죠.”
“정말입니까?”
“예. 아마 재봉사를 월급제로 고용하는 공장은 별로 없을 겁니다.”
하청 위주의 봉제 공장들은 대부분이 객공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었다.
오더가 없을 때는 도저히 월급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참 대단하셨지. 제품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지현이와 내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분명 엄청난 사업가나 디자이너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의 능력은 출중하였다.
육아 때문에 빛을 못 본 게 아쉬울 따름이다.
“보면 볼수록 대단하군요.”
“감사합니다.”
“납기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김휘겸의 말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납기 일정을 묻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오더.
우리 공장에 오더를 준다는 의미였다.
예상대로 김휘겸은 오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공장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
더군다나, 첫 주문치고 물량이 상당했다.
세파레스(오버코트) 3만 장.
보통 첫 주문은 1만 장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김휘겸이 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한 거 같았다.
‘노사의 말이 맞았어. 이 사람을 무조건 잡아야 한다!’
단순히 물량만 보면 양승국과 큰 차이는 없었다.
지금까지 양승국에게 받은 물량이 5만 장 이상이었으니.
하지만 단가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거의 두 배였다.
‘운이 좋으면 10월에는 9백만 원 이상도 벌 수 있겠는데?’
공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벌었던 달이 6백만 원이었다. 이때도 밀린 대금 결제가 한 번에 정산돼서 가능했지 원래는 월 4백만 원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김휘겸의 오더를 받자마자 최대 매출을 갱신하였다.
무려 9백만 원.
직원 급료, 전기 요금, 기타 경비 등을 제외해도 남는 돈만 5백만 원이 넘었다.
이 정도면 양승국도 부럽지 않았다.
물론 그래 봤자 주식 수익에는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
(오더는 계속해서 늘어날 거다. 3만 장을 시작으로 11월쯤에 몇만 장을 더 주문하겠지. 그리고 내년이 되면 10만 장 단위로 계약하게 될 수도 있어.)
10만 장?
실로 엄청났다.
그 정도면 영업이익 천만 원도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10만 장은 너무 많았다.
우리 공장에서 그 정도의 물량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 달 생산량이 기껏 해봐야 2만 장 될까 말까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공장을 키우긴 해야겠네. 앞으로도 무조건 노사의 말을 들어야겠어.’
노사의 계획을 따르기만 한다면 드림 패션도 크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김휘겸이 갑자기 악수를 하였다.
“이한성 사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납기 일정은 꼭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한 말씀을. 저희 드림 패션은 품질과 납기는 확실하게 합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나의 모습에 김휘겸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양승국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하였다.
“대금 결제는 납기 날짜에 맞춰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공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이 대금 결제였다.
납품하고 빠르면 한 달, 늦으면 두 달에서 석 달을 기다려야 대금을 지급받는다.
아예 돈이 떼인 적도 있었고.
그러니 대금 결제를 칼같이 해주겠다는 김휘겸의 말은 나로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김휘겸이 떠나자 나는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뭔가 엄청난 걸 해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 좋냐?)
흥분에 도취된 모습을 보고 노사가 물었다.
“예, 좋습니다!”
(공장을 팔겠다는 소리 할 때는 언제고. 쯧쯧.)
혀를 차는 노사지만,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다 노사님 덕분입니다.”
(그걸 모르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다음에도 꼭 도와주십시오.”
(네가 그런 말 안 해도 알아서 도와줄 거니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스케줄을 새로 짜야 할 텐데?)
“스케줄이요?”
(대성 어패럴 위주로 납기 일정을 맞춰야 하잖아.)
“아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노사의 말이 옳았다.
지금부터 납기 일정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김휘겸의 후속 오더를 받을 때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어지간한 오더는 다른 공장에 넘겨주거나 취소해야겠군.’
대성 어패럴의 오더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설령 평판이 낮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대성 어패럴을 꽉 잡고 마리라.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거래처 사장들에게 전화를 걸기 위함이었다.
“홍 사장님, 전에 같이 하자던 스웨터 바지 봉제는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습니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나? 내가 자네를 위해 구해준 오더인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납기 일정이 바빠져서 어쩔 수 없습니다.”
-사업이 잘되나 보군. 나 참. 알겠네. 대신, 나중에 좋은 오더 들어온다면 우리 쪽에도 조금 나눠주게.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뚝.
전화를 몇 번 돌렸을 뿐인데, 진이 다 빠졌다.
역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거 같았다.
(대성 어패럴의 납기는 제때 맞출 수 있을 거 같으냐?)
“그럼요. 3만 장이야 10월 안에 맞출 수 있습니다. 근데 노사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11월만 돼도 주문량이 엄청나게 늘어날 거라고. 지금 상황에서 만 장 단위로 오더가 들어오면 방법이 없습니다. 방금 전화했던 홍 사장에게 물량을 나눠주는 수밖에.”
(아깝게 그걸 왜 나눠줘?)
“객공을 최대한 불러서 생산량을 늘리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작은 공장이니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괜히 납기 일정 못 맞추면 후속 오더도 없을 거고 말입니다.”
(흠. 생산량이 문제라는 말이지?)
턱을 쓰다듬던 노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생산량 늘리려면 객공들을 부르기 전에 공장 내부의 시스템부터 바꿔야 한다.)
“시스템이요?”
(이환, 오태호, 이정석. 이렇게 세 명이 특급 재봉사지? 이 세 사람을 앞 라인으로 옮겨. 그러면 봉제 속도가 한층 빨라질 거다.)
“그들은 고참이라서 마무리 작업을 하는 건데, 앞 라인으로 옮기면 품질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세 사람의 무기는 꼼꼼함이 아니라 날렵함이다. 손이 빨라서 특급 재봉사 소리 듣는 이들인데 마무리 작업시켜서 뭐하게?)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실력이 부족한 재봉사가 앞 라인을 맡는 바람에 항상 그쪽 공정에만 옷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뒤쪽 라인을 담당하는 재봉사들은 그동안 손가락만 빨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정석이 앞 라인을 맡는다면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참들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고참들로선 편하게 일하다가 갑자기 개고생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성과제를 도입하면 돼.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