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4화 (4/300)

4화 꺼지라고 해

다음 날.

노사의 조언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반쯤 강제로 시작하게 된 산책이었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

‘내년이 되면 혜성 그룹에 입사하게 될 텐데…….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지금 나는 근로자가 20인밖에 안 되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것도 버거운 상태였다.

그런데 혜성 그룹 같은 대기업이라니.

물론 회장이나 사장이 아닌, 임원일 뿐이지만 그래도 부담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도 노사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노사는 이미 한 번 겪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매출이 수조 원에 달하는 중견 그룹까지 경영한 적이 있었다.

내가 노사에게 의지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노사는 이번엔 또 어딜 가신 거야?’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싫다고 해야 할지.

노사는 24시간 내내 붙어있지는 않았다.

귀신이 뭐가 그리 바쁜지 틈만 나면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병원에 있을 때도 막상 내 곁에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원수 얼굴 보고 온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오늘도 아침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를 조사하고 다니는 거 같았다.

‘은행은 일단 나 혼자 갔다 와야겠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였다.

은행에 들러야 하는 만큼 평소보다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31번 고객님.”

은행에 도착해서 얼마간 기다리니 상담 창구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나 대출을 받으시겠어요?”

“5백만 원을 대출받고 싶습니다.”

“예, 고객님. 담보로 맡길 수 있는 집이나 토지가 있으신가요?”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주시겠어요?”

신청서를 적는 것으로 대출 절차를 마무리하자 노사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대출 승인이 나려면 며칠 정도 걸릴 거 같으냐?)

“아무리 빨라도 나흘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역시 80년대라 모든 게 느리군. 그럼 일단 지금 가진 현금으로라도 고림 건설의 주식을 사둬라.)

“예.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공장에 출근해야 했기에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은행 근처에 있는 태신 증권으로 곧장 이동한 것이다.

(꽤 한산하구나. 몇 년만 지나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는데 말이야.)

노사의 말처럼 객장은 한산했다.

신문에서는 주식 투자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막상 객장을 보니 그런 거 같지도 않아 보였다.

“86년부터 주식 투자 열풍이 돈다고 했었죠?”

(그래. 아기를 둘러업은 가정주부부터 소를 팔아 주식을 사려는 농부까지, 이 나라가 주식에 미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때 주식에 투자하면 돈을 많이 벌겠네요?”

(지금 네가 있는 태신 증권의 주식만 사도 대박이 날 거다. 86년부터, 절정을 찍는 88년까지 10배 이상 주가가 상승할 테니.)

나는 입을 떡 벌렸다.

10배라니.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주가 상승률이었다.

‘어떻게든 86년 되기 전까지 자본금을 불려놔야겠네. 10배를 먹으려면 말이야.’

최소가 10배라고 했다.

운이 좋으면 그 이상도 벌 수 있는 것.

상상만 해도 짜릿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기 자리 생겼다. 다른 사람 앉기 전에 빨리 앉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담 창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어떤 업무를 도와드릴까요?”

직원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이름은 정현우, 직급은 대리였다.

‘성실한 데다 고객 돈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직원이라지?’

물론 내가 알아낸 정보는 아니었다.

노사가 귀신의 몸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알아낸 정보였다.

“증권 계좌를 만들려고 합니다. 일단 100만 원을 준비해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서류를 작성해주시고 계좌에 넣으실 현금은 이쪽으로 주시겠습니까?”

계좌 설립을 끝내고서 아까 작성했던 주문표를 건네주었다.

주문표에는 고림 건설이 적혀 있었다.

“혹시 고림 건설을 매입하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정현우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이 시대의 주식 투자자들은 창구 직원에게 뭉칫돈과 도장을 맡기는 경우가 흔했다.

한마디로 일임매매(직원이 대리 투자)를 한다는 것.

그러니 나를 의아하게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확실한 정보가 있어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정현우 대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꼬치꼬치 캐묻거나 자신이 추천하는 종목을 강요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역시 어르신이 추천해준 사람답게 진중한 면이 있네.’

앞으로 내 주식매매를 담당해줄 직원인데 성격이 가벼운 것보단 무거운 게 훨씬 낫다.

태신 증권에서 주식매매를 마무리한 나는 곧바로 출근길에 나섰다.

공장은 평화 시장 인근에 있었다.

(공장이 참 작구나.)

노사는 공장을 보고서 혀를 끌끌 찼다.

20인 사업장이니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돈 벌면 공장부터 이전해라. 아주 번듯한 곳으로 말이야.)

“어차피 1년만 운영할 텐데 공장을 넓힐 필요가 있을까요.”

내년이 되면 혜성 그룹 회장이 찾아올 터.

공장도 더는 운영할 수 없게 될 거다.

그러니 공장에 자금을 투입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됐다.

(내가 말했지? 나에게 계획이 있다고. 일단 내 말대로 해.)

“알겠습니다.”

그 계획이란 게 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 뭐.’

노사가 나에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으리라.

“사장님 오셨습니까!”

“몸은 괜찮으세요?”

“쾌차해서 다행입니다!”

공장에 도착하자 먼저 출근해 있던 직원들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몇 명이 없어 보이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안 보여.)

노사의 말을 들은 나는 직원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17명.

직원이 모두 스무 명이니 결석 인원은 세 명이었다.

“몇 분이 안 보이네요.”

“이환 라인 반장이랑 태호 라인 반장은 담배 피우러 잠시 나갔습니다.”

“담배라.”

정말 담배 피우러 나간 게 맞을까?

보통은 공장 근처에서 피우지 멀리 나가지는 않는데…….

‘하아. 이 사람들이 또 그러네. 고참이라고 유세 떠나.’

고등학교 학생들도 아니고 기회만 생기면 땡땡이를 쳤다.

내가 자리를 비웠으니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이정석 반장은요?”

“아직 안 왔습니다.”

가관이었다.

아예 출근을 안 한 직원도 있다니. 그것도 한 라인을 책임지는 작업반장이 말이다.

(참 문제가 많구나. 공장이 괜히 망한 것이 아니었어.)

부끄러웠다.

노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쾌차하셨네요! 이제부터 이한성 사장님이 출근하시는 겁니까?”

그나마 다행히 담배 피우러 나갔던 직원들이 돌아왔다.

“예, 그런데 두 분께서는 어디 갔다 오셨어요?”

“자, 잠깐 담배 피우고 왔습니다.”

“다음부터는 멀리 가지 마시고 근처에서 피우세요.”

내 질책 아닌 질책에 오태호와 이환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정석 반장은 아직도 안 오는군요.”

(한 명 안 온 게 이정석이었군. 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야.)

“고참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참에 어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말씀드려서 뭐 하게?)

“잘라야죠.”

이정석은 근무 태만에 지각 상습범이었다.

특급을 자랑하던 재봉 실력도 예전만 못했고 말이다.

(너무 나쁘게 보지는 마라. 그래도 공장이 망하기 전까지 네 곁을 지켜준 유일한 직원이 이정석이다.)

“……그렇습니까?”

의외였다.

그 사람이 그렇게 의리 있는 사람이었나?

“노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 더 지켜보겠습니다.”

나는 그리 말하고는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사람이 다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납기가 바쁜데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정석의 공정은 라인 맨 끝이기도 하고.

“작업 시작합시다!”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하던 재봉사들은 내 말이 떨어지자 미적대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재봉사들이 작업을 시작하였다.

(정겨운 소리구나. 얼마 만에 듣는 재봉틀 소리인지.)

나는 듣기 싫은 소리인데, 노사는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런데 너는 아무것도 안 하느냐?)

“저도 제 할 일을 해야죠. 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말입니다.”

물론 나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지만은 않았다.

나 역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했다.

부르릉.

먼저 오토바이 시동을 틀었다.

(어디 가려고?)

“평화시장에 가서 원단 사 와야 합니다. 아까 보니까 얼마 안 남았더라고요.”

(이게 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냐?)

“직원들은 작업하기 바쁘니 손이 노는 제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쯧. 이유는 알겠지만, 폼이 안 나는구나.)

“작은 공장에서 그런 게 뭔 상관입니까.”

(빨리 성공해서 차나 사라. 보기 안쓰럽다.)

차야 나도 갖고 싶다.

그라나타나 뉴 로얄 코드 같은 차를 사면 대통령도 부럽지 않으리라.

물론 차의 가격을 생각하면 그저 꿈만 같은 이야기였지만.

공장으로 돌아오니 40대 중년 사내가 공장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고, 이 사장. 잘 지냈는가?”

나를 발견한 사내가 반갑게 인사하였다.

사내의 이름은 양승국.

평화 시장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진 도매상이었다.

양승국을 향해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야 양 사장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병원에 갔었다며?”

“조금 다쳤었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이 사장의 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지?”

툭 튀어나온 눈으로 힐끔 공장 안을 살펴보는 양승국.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열심히 작업하던 직원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또 괜한 소리 들을까 걱정한 것이다.

도매상이면서 어지간히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물론입니다. 납기는 반드시 지킬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암! 믿지, 믿고말고! 누구보다 성실한 이 사장 아닌가?”

“감사합니다. 절대 기대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팍! 팍!

든든하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는 양승국.

(어디서 친한 척이야. 입만 번지르르한 새끼가.)

노사가 형형한 눈으로 양승국을 쏘아봤다.

역시 노사도 양승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양 사장님, 혹시 전에 이야기해 주신 후속 오더는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양승국의 오더는 그리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옷을 만들어 납품하고 받을 공임에서 직원 급료, 전기요금 기타 경비를 제하면 남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승국의 오더를 받은 이유는 3만 장 이상의 후속 오더를 구두로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3만 장쯤 되면 공임이 약해도 괜찮았다.

공임이 싸도 봉제는 단순 숙련 작업이라, 같은 작업을 계속하면 생산량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 노타이 셔츠 3만 장을 말하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양승국이 뜸을 들이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뜸을 들이면 늘 대답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을 하였다.

“어허! 그렇게 보채면 정말 섭섭하네. 내가 약속을 했는데 설마 어기겠어? 조금만 더 기다려봐! 알아서 챙겨줄 테니.”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의 조금만이 계속 기한을 늘려가고 있었다.

만약 양승국이 오더를 안 준다면 12월부터는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꺼지라고 해.)

노사의 말에 몸을 움찔하였다.

(저놈 어차피 오더 안 줘. 제대로 된 성의를 안 보였다는 핑계로 말이야. 그러니 저놈한테 착하게 굴 필요 없어.)

후속 오더를 안 준다고?

그렇다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겠어.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자이기도 했고.

“더 기다리라고요? 됐습니다. 더는 오더 달라 안 하겠습니다. 그 대신, 대금 결제를 빨리해 주십시오. 벌써 두 달이나 밀리셨습니다.”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냉수를 마신 듯 시원한 기분이었다.

“뭐, 뭐? 지금 뭐라 했어?”

“돈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양승국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내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