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팬들의 바람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
6 대 6으로 이뤄진 미니 게임이었다.
선수들의 감정이라는 게 솔직히 조절하기가 정말 어렵다.
한 경기 안에서도 전후반의 리듬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게 승리의 중요한 요소가 될 정도니까 길게 말하면 입만 아픈 일이었다.
아이스크림 내기의 영향인지 선수들의 미니 게임이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삐이익!
결국 박용근은 경기를 중단시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이러다가 한 사람이라도 부상당하면 모두에게 손해다. 내일은 오전에 간단한 회복 훈련을 한 뒤에 해산하겠다.”
박용근이 말을 마치고는 바로 돌아섰다.
“아쉬운데?”
“그러게 적당히 좀 하지! 뭐 그렇게 달려들어?”
“어? 남 말 한다?”
이정렬과 신준석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공을 집어 들었고, 정지우와 박상민은 원뿔과 도구들을 챙겼다.
“들어가세요. 이제 우리가 할게요.”
“같이해. 그리고 잊지 마라. 정말 힘들고 지쳤을 때 내가 한 발 더 뛰는 것이 팀을 승리로 이끈다는 거.”
선수들 전체가 그라운드에 퍼져서 공과 도구들을 챙겼다.
김문호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되겠다, 박 감독. 원정이지만, 한번 해 볼 만하겠다.”
“동대문 1번 개, 2번 개를 약 올렸는데 말이지.”
박용근의 뒷말이 궁금한 김문호가 얼른 시선을 주었다.
“부천의 1번, 2번 개한테 손을 콱 물리는 거지.”
“하하하! 그거 통쾌하다! 자네가 어쩐 일이야? 그런 표현을 다 쓰고?”
“나도 사실 나와구치가 마음에 안 들었거든.”
기분 좋게 웃고 난 김문호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일본에 지면 비난이 대단할 거야. 거기에 애들 사기 부러지는 것도 장난 아닐 테고.”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리그와 우승, 그리고 FA컵 결승을 경험했던 애들이잖아. 오영이나 재범이도 그렇고, 범주까지, 우리 때는 상상도 못할 만큼 창의적이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
“지면 지는 대로, 이기면 이기는 대로 저 아이들에겐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우린 판만 제대로 만들어 주자. 우리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문호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대표팀이 사흘간의 짧은 훈련을 마치고 축구 트레이닝 센터를 나섰습니다.』
뉴스는 다음 날 오후에 파주에서 나서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와 다르게 일주일의 훈련을 준비한 일본 팀은 사무라이 블루가 훈련장을 찾아 응원하는 등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입니다. 기정수 기자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화면이 바뀌어서 축구장 앞에서 마이크를 든 기자가 나왔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훈련장입니다. 일본은 한일전이 끝난 직후에 바로 월드컵 출정식을 준비했을 정도로 우리와의 평가전에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니폰!’이라고 외치며 손뼉을 치는 장면이 이어졌다.
『일본은 강합니다! 반드시 한국을 이기고, 월드컵에서 결승전에 오를 거라고 믿습니다!』
일본 응원팀 중 남자 한 명이 강한 어조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올라왔다. 곱슬머리에 귀에서부터 턱을 따라 길게 수염을 기른 남자는 심지어 손날로 목을 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일본의 훈련을 지켜보는 관중 사이에서 전범기가 보이는 등, 한일전이 과열된 느낌마저 들고 있습니다. 우리 협회는 한일전에서 전범기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의사를 분명하고 강하게 전달했습니다.』
축구에 관한 보도는 거기까지였다.
출국이었다.
박용근과 정지우, 그리고 동기들은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움직였다.
몰려든 팬들과 기자들로 출국장이 북새통을 이뤘는데, 정지우와 일행은 언제나처럼 모범적인 답안을 전하고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4월 25일에 있었던 스완지와의 홈경기는 놀랍게도 4 대 0으로 끝났다.
이번 시즌 유니온 시티는 확실히 되는 팀이었다.
리그 초반에 전통의 강팀들이 이상스러우리만치 엉망인 경기력으로 순위권 바깥으로 밀려 나는가 싶더니, 중반 이후부터는 새롭게 떠올랐던 강팀들이 부침을 겪으며 아래로 밀려나고 있었다.
스완지는 어딘가 한 군데 구멍이 뚫린 팀처럼 무기력하게 달려들었고, 결국 4점을 잃은 채 경기를 마쳤다.
이정렬이 한 골, 레믹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기예르모가 전반, 후반은 얀센이 골대를 지켰다.
경기를 마친 얀센이 ‘클린 시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Ji의 도움이었다.’라고 인터뷰했는데, 그 답례로 그는 깜짝 놀랄 만큼의 한국 과자를 선물 받기도 했다.
정지우는 동기들과 함께 휘어들어 오는 공에 대한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하던 동료들이 달려들면서 리그 후반에 훈련 열기가 달아오르는 이상한 모습도 나왔다.
훈련이 한창일 때였다.
“자네가 말한 게 저건가?”
“그렇습니다.”
레드 블레이트를 방문한 쥬피터가 마틴과 함께 훈련을 지켜보았다. 날아드는 공을 향해 정지우가 악착같이 몸을 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쥬피터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일세, 마틴. 지금껏 저런 선수를 본 적이 없다네. 저 훈련이 자발적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다른 동료들이 그를 따라 저토록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지.”
고개를 끄덕인 쥬피터가 시선을 돌려 마틴을 보았다.
“저런 선수라면 믿어야지. 혹여 Ji가 다른 팀에 간다고 해도 그는 절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줘야지.”
마틴은 입술만 움직여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법 큰 규모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네. 다음 시즌, 우리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골키퍼를 보유한 팀이 될 걸세.”
쥬피터가 뜻밖의 말을 꺼내서 마틴의 웃음을 싹 지워 버렸다.
“이 모든 것을 자네가 만들지 않았나? 대신 부탁이 하나 있네. 자네도 연장 계약을 해 줄 것, 그리고 Sang과 Lee, Jun은 적당한 수준에서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이 정도일세.”
마틴은 시선을 돌려 그라운드 한쪽에서 훈련하는 한국 선수들을 보았다.
“Sang은 아무리 해도 400만 파운드(한화 68억 상당) 이상은 예상해야 할 겁니다.”
“그 정도에 Sang을 붙잡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가 아닌가?”
놀랍게도 쥬피터는 흔쾌하게 답을 전하고 있었다.
5월 1일에 있었던 맨유 원정에서 유니온 시티는 뒤늦게 일어나는 맨유의 발목을 제대로 잡아끌었다.
4위에 들어가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확보하겠다는 맨유는 초반에 환상적인 슈팅으로 골을 넣고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사고는 박상민이 터트렸다.
신준석의 패스를 받은 박상민은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그런 그를 맨유의 수비수 스몰링이 더할 수 없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발로 걸어 버린 거였다.
“미친놈!”
정지우는 순간 장난스럽게 욕을 뱉어 내고 말았다.
저 정도 걸렸으면 엎어져도 누가 뭐라 할 사람 하나 없는데, 반쯤 엎어진 상태에서도 박상민이 악착같이 골대를 향해 달렸기 때문이었다.
레믹이 페널티킥을 멋지게 차 넣어서 챔피언스 리그 계단에 반쯤 올라갔던 맨유의 발을 아래로 주저앉혀 버렸다.
맨유의 감독이 머리를 감싸 쥔 사진 아래로 ‘Sang, 맨유를 주저앉히다’라는 제목이 걸렸고, 박상민이 엎어진 채 부득부득 밀고 나가는 사진이 스포츠면을 크게 장식하기도 했다.
5월 8일 에버턴전부터 다시 묘한 긴장이 선수들 사이를 떠돌았다.
두 경기 남았다. 세 경기도, 네 경기도 아닌 두 경기.
무패 우승이라는 엄청난 기록 앞에서 얀센이 긴장을 감추지 못했고, 기예르모는 좀 더 딱딱한 표정으로 경기를 준비했다.
마틴이 망설이기는 했지만 선발은 얀센, 서브는 기예르모였다. 무패 우승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우승의 영광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거다.
“골키퍼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지키자!”
데이빗이 악을 써 댔고, 레믹이 사명감 불타는 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레드 블레이트에서 유니온 시티는 0 대 0의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한 경기 남았다. 무패 우승까지.
무섭게 뒷심을 발휘하는 첼시가 마지막 상대였다.
5월 15일, 일요일 경기를 앞둔 그 주 화요일에 정지우는 여전히 훈련을 위해 그라운드로 나섰다.
“이봐! Ji!”
공을 들고 함께 걷던 얀센이 진지하게 정지우를 불렀다.
“무패 우승이다. 유니온 시티에 오래도록 남을 경기. 난 자신이 없다.”
동료들이 혹시 들을까 해서 주변을 살피는 나이 든 골키퍼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 말을 가족에게도 했어? 딸에게도?”
“그럴 수는 없지.”
“만약 그 말을 가족에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코치와 의논해 볼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아는 얀센답게, 챔피언십에서 우리를 이곳까지 끌어 올려 준 당신답게 첼시를 틀어막아.”
얀센이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올라온 눈으로 정지우와 골대를 한 번씩 보았다.
“다음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매번 숨통을 조이는 경기를 치러야 하는데, 이 정도는 이겨 내 줘야 하지 않을까?”
“130년 만의 기록이라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돼.”
정지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는 것 역시 130년 만인 거지. 그곳에서 한 경기 한 경기를 승리하며 위로 올라갈 때마다, 그 모든 게 유니온 시티 130년 만의 기록이 돼.”
얀센은 놀란 얼굴이었다.
“설마 모든 경기를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동안, 모든 경기의 골대를 내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것도 아닐 테고.”
얀센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간단하군. 적어도 첼시와의 마지막 경기가 챔피언스 리그의 숨 막히는 경기보다는 편할 거라는 거.”
정지우는 팔을 뻗어 얀센의 어깨에 얹었다.
“멋진 모습을 보여 줘. 리그 마지막 경기를 마쳤을 때 나를 위해 검지를 들어 주고.”
“이렇게 말이지?”
얀센이 양손 검지를 하늘로 들었고, 정지우가 ‘그렇지!’ 하고 웃었다.
“뭐야? 벌써 승리의 세레머니를 연습하는 거야?”
레믹이 장난으로 건넨 말에 얀센은 주먹 쥔 팔을 높게 들어 주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그의 각오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둘이서 웃으며 골대를 향해 걸을 때였다.
“나중에 감독을 맡게 되거든 골키퍼 코치는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
얀센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고는 공을 집어 들었다.
5월 15일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에 있었던 첼시와의 원정 경기는 긴장과 흥분이 어우러진 마지막 승부였다.
『유니온 시티가 무패 우승을 기록하느냐, 첼시가 안방에서 그들의 무패 우승을 저지하느냐의 싸움입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축구를 아는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린 경기였다.
마틴은 이 경기에서 정지우까지를 서브로 내세웠다.
전반을 나선 기예르모는 다섯 경기를 채운 대신 추가 시간을 지켜 내지 못하고, 아자르에게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후반은 얀센이 맡았다.
득점에 성공하고도 첼시는 공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유니온 시티의 무패 기록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활로를 뚫어야 하는데요! 첼시 단단히 준비하고 나왔네요! 유니온 시티가 좀처럼 위로 올라올 틈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첼시의 응원가 ‘Blue flag’가 스탠포드 브리지를 가득 채운 가운데 후반 40분이 흘렀다.
『유니온 시티 팬인 듯 보입니다! 간절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소녀를 백발의 할머니가 다독이고 있습니다! 무패 우승을 간절하게 바라는 유니온 시티 팬들의 바람을 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프리미어리그 카메라는 저런 모습을 정말 잘 잡아 주네요.』
앵커와 해설자가 화면에 잡힌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직후였다.
퍼어엉!
공을 가로챈 신준석이 박상민을 향해 길게 넘겨주었다.
터억!
박상민은 가슴을 홱 돌리는 동작으로 공을 앞으로 흘렸다.
“예에에-!”
『박상민! 그대로 달립니다! 케이힐과 이바노비치 사이를! 박상민! 어깨 싸움에 밀리지 않는 박상민!』
투욱!
수비수 두 사람 사이를 뚫은 박상민이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으로 공을 흘려주었다.
튀어나온 것은 역시 레믹이었다.
그가 거짓말처럼 불쑥 달려 나와 강하고 낮게 슈팅을 날렸고,
철- 러엉!
골키퍼 쿠르투아가 꼼짝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터진 골이었다.
“예에에에에에-!”
추가 시간을 합쳐서 10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Ji! 준비해!”
하늘을 높이 나는 레믹을 뒤로한 채 마틴이 정지우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지우 선수! 우리 정지우 선수가 유니온 시티의 무패 우승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겉옷을 벗고 장갑을 낀 정지우가 그라운드로 나서자, 흥분한 관중들의 응원가가 단박에 스탠포드 브리지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