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믿어라! 너 자신을! (3)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자 모지스가 공을 향해 움직였다.
퍼어어엉!
공은 골키퍼 에어리어 앞을 향해 날아왔다.
뒤엉킨 선수들이 날아오는 방향을 차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상대 팀 선수를 밀어 대고 있었다.
휘익! 휘이익!
선수들이 몸을 띄웠는데 이번에 공을 낚아 낸 것은 무둔바였다. 오비앙이 어깨를 잡아챘는데도 그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몸을 띄웠고, 공을 따냈다.
터어엉!
무둔바의 머리에 맞은 공이 다시 높다랗게 떴다.
골대 바로 앞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 공이었다.
이건 그대로 두면 정말 위험해진다.
와락!
정지우는 공을 향해 달려 나갔다.
수비수? 상대 팀 선수?
그런 걸 볼 여유는 없었다.
오로지 높다랗게 솟았다가 떨어지는 공을 향해 달려 나갈 뿐인 거다.
화아아악!
정지우가 공을 향해 손을 쭉 뻗었을 때였다.
휘이익! 휘익! 휘이익!
3명의 선수가 동시에 몸을 띄웠고,
콰악!
정지우의 팔이 그중 한 명의 목에 걸렸다.
‘끄응!’
몸을 날렸는데 누군가 팔을 잡아챈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허리 아래가 붕 허공으로 떴는데 그건 목을 잡힌 선수, 그 선수와 머리를 부딪친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래도 공이 골대로 들어가면 끝이다.
주심이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하면 그냥 골이 되는 거다.
정지우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손을 쭉 뻗었다.
터어엉!
주먹에 맞은 공이 바깥으로 날아간 것을 느낀 직후였다.
털썩! 철퍽! 철퍼덕!
함께 뜬 4명 중 셋이 완전히 다리가 들린 상태로 그라운드에 처박혔다.
“우-!”
삑! 삑! 삑!
관중들의 탄성과 주심의 휘슬이 아스라이 들렸다.
무엇보다 숨이 턱 막혀서 당장은 숨 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세 선수가 엉켰는데요! 정지우가 달려 나간 앞으로 파예가 뛰어올랐거든요! 충분히 알았을 텐데요!』
『주심! 양 팀의 벤치에 다급하게 손짓을 합니다! 정지우 선수! 제발 큰 부상이 아니길 바랍니다!』
삑삑삑!
그 와중에 쓰러진 정지우의 앞에서 선수들끼리 몸싸움이 벌어졌다. 오비앙이 와서 정지우의 어깨를 툭툭 친 것이 문제였다.
『양 팀 선수들! 조금은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신준석과 이정렬 선수! 잘하고 있어요! 박상민 선수가 평소에는 참 과묵한데요, 동료들이 다쳤을 때 욱하는 성격이 있거든요!』
이정렬이 박상민의 목을 끌어안고도 질질 끌려가자, 그 앞을 신준석이 또 막아섰다.
“야! 지우가 너더러 한 골 만들어 보라고 했잖아! 너 퇴장당하면 다 끝이야! 제발 좀 참아! 상민아! 야!”
신준석이 양손으로 볼을 잡고서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박상민은 걸음을 멈추고 씩씩거렸다.
“정신이 들어?”
“저 새끼가 지우 어깨를 쳤잖아!”
“알아! 그래도 지우가 널 필요로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참자! 응?”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앞에서 정지우가 상체를 들고 앉았다.
전은주부터 데이지, 릴리, 메기, 신윤희가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Ji! 브레드가 말을 전해 달래! 우승 못해도 괜찮으니까 다치지 말라고! 진심이라고! 지금까지로 충분하다고 전하래!”
응원가가 중단된 레드 블레이트다.
가뜩이나 응원가를 뚫고 나오는 교장 선생님의 음성이 레드 블레이트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TV 화면에 잡힌 정지우가 스미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교장 선생님이 있는 통로를 향해 몸을 돌린 뒤에, 브레드에게 답을 하는 것처럼 양손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는 동작을 보여 주었다.
“예에에에에에에-!”
『정지우 선수! 관중들에게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까 페널티킥 막는 장면이 내일 스포츠란 메인 기사일 줄 알았더니, 이 장면이 내일 메인이 되겠네요!』
해설자의 말이 이어지면서 양 팀 선수들이 다시 자리를 잡아 갔다.
유니온 시티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통상 일요일 저녁에는 일찍 한가해지는 유니온 시티의 펍마다 한국의 호프집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예에에-!”
대형 화면을 향해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려 나왔는데, 유니온 시티의 가정집들도 그 풍경은 다르지 않았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파예의 파울이라 정지우는 신준석을 향해 공을 넘겨주었다.
콰악!
파예가 달려들었고,
콰악!
신준석이 작정한 것처럼 어깨로 그를 들이받았다.
화아악!
파예가 손을 뻗쳐 신준석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승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분위기가 밀리는 것과 마음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분풀이처럼 보였다.
콰다당!
신준석이 패대기쳐지는 것처럼 넘어졌고,
“뭐 하는 거야!”
“정도껏 해!”
우르르르!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삐익! 삑! 삑!
주심이 파예의 앞을 막아설 정도로 양 팀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골대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정지우는 신준석에게 다가가 녀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잘했어!”
그리고 고개를 돌린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애새끼들이! 우리가 무서워서 못하는 줄 알아! 부천 1번, 2번 개가 모두 여기 있는데!”
이번엔 박상민이 달려와서 신준석의 양쪽 볼을 움켜쥐었다.
“아퍼! 이! 확!”
하여간 신준석은 이런 때도 유쾌하다.
이정렬까지 달려와서 모처럼 넷이서 킬킬거리며 웃는 동안, 상황이 정리되었다.
주심은 옐로카드를 꺼내 파예에게 높다랗게 들었고, 다시 신준석을 향해서도 옐로카드를 보였다.
“젠장!”
신준석이 불만을 토해 낼 때,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마틴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억울함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이미 내려진 판정이었다.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전반이 5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신준석이 데이빗에게 공을 넘겨주었고, 데이빗은 바로 박상민에게 패스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히 거칠게 경기가 진행됩니다!』
『웨스트햄이 독하게 마음먹고 나온 모양이네요!』
『우리 선수들!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앵커와 해설자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공은 계속해서 유니온 시티 진영을 돌았다.
계획대로 전반 초반을 잘 이끌었던 웨스트햄 선수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뛰어다녔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완벽하게 몰아붙였을 텐데, 오히려 전반이 끝나 가는 게 아쉬운 상황이기도 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홈 관중들의 응원이 쏟아지는 가운데, 중앙선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공이 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삐이익! 삐익!
주심이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예에에에-!”
골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홈 관중들은 우승컵을 반쯤 받아 든 듯한 환호를 질러 댔다.
『우승의 마지막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은 상황입니다! 전반은 정지우의 원맨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다른 말을 하기 어려운 경기였구요! 정지우 선수가 빠져나가려는 우승컵의 손잡이를 꼭 붙잡고 버틴 것 같은 경기였어요!』
해설자의 답이 있을 때 TV 화면에 느린 그림이 나왔다.
먼저 신준석이 파예와 다투는 장면이 나왔고, 이어서 데니와 노블이 충돌하는 장면, 그리고 주심이 옐로카드를 드는 장면이 이어졌다.
이어서 정지우의 선방이 연달아 화면에 펼쳐졌다.
매번 같지만 이번에도 ‘예에에에에에-!’ 하는 함성이 효과음처럼 따라 나왔는데, 특히나 페널티킥 장면은 다섯 번쯤 각도를 달리하며 나왔다.
박용근을 시작으로 어깨를 걸고 응원하던 이들이 일제히 펄쩍펄쩍 뛰는 장면이 보였고, 다음으로 페널티킥을 놓친 직후에 얼굴을 길게 쓸어내리는 웨스트햄 감독의 모습도 나왔다.
마지막으로 정지우가 가슴을 두드리며 동료들에게 으르렁대는 장면이 나온 뒤에, 양손 검지를 높다랗게 드는 장면에서 화면이 잠시 고정되었다.
15분의 휴식 시간이었다.
흥분, 설렘, 긴장 등의 감정이 넓지 않은 라커룸을 가득 메운 채 파고드는 응원가와 뒤엉켰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어떤 때는 라커룸의 천장이 실제로 쿵쿵거리며 울릴 때도 있다.
응원해 주는 이들을 저토록 흥분시킨 경기를 했다는 뿌듯함과 후반에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사이좋게 선수들에게 다가섰다.
휴식 시간에 영국의 TV는 유니온 시티 곳곳에 있는 펍과 가정집들의 풍경을 돌아가며 보여 주었다. 데이지가 일하는 성 마테오 병원도 나왔다.
긴말 필요 없는 거였다.
미쳤다.
마치 축구에 미친 사람들처럼 들뜨고 흥분돼 있었다.
토마스라는 노동자의 집에 리포터가 들어섰을 때였다.
등이 굽은 백발의 할머니가 돋보기를 낀 채 리포터를 맞았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색이 완전히 바랜 유니폼, 레드 블레이트의 박물관에 있음 직한 머플러를 두른 백발의 할머니가 왼손으로 안경을 벗고는 오른손 손등으로 눈시울을 닦아 냈다.
“감격스러우신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소원이었어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경기장에 갔던 날도, 아버지의 목을 타고 레드 블레이트에 갔었을 때도,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런 날을 꿈꿨었지요.”
아들 내외가 그녀의 휘어 버린 등과 어깨를 감싸 주었고, 손자와 손녀들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Ji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에게 전해질지는 모르지만, 방송에는 나갈 겁니다!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할머니는 앞에서 허리를 안는 손자와 손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Ji! 당신은 내 영웅이에요! 우리 유니온 시티에서 당신을 험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절대 그를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밝은 얼굴이었던 리포터가 입을 삐죽이며, ‘토마스의 집이었습니다!’ 하고 인터뷰를 마쳤다.
호프집은 전반의 주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맥주를 들이켜며 건배를 외쳐 댔다.
이게 얌전히 앉아서 술을 마시면 취했을 양인데, 워낙 날뛰고 악을 쓰는 바람에 술에 취한 손님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뀐 풍경도 있었다.
사장의 옆에서 매니저가 어깨를 두르고 함께 펄쩍펄쩍 뛰고 있는 거였다.
물을 마셨고, 땀도 닦았다.
“후반에는 수비 라인을 올리자. 저쪽도 노블과 파예가 경고를 받아서 함부로 달려들지 못할 거야. 데니! 네가 좀 더 거칠고 단호하게 달려들어.”
“오케이, Ji!”
데니가 다부지게 대답할 때, 박상민과 데이빗, 이정렬과 레믹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 후반 시작과 동시에 수비 라인을 확실히 끌어 올려! 경고가 두 장인 데다 원래 쓰던 전술도 아니라서 후반은 웨스트햄도 밀릴 확률이 높아.”
정지우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한 골만 먼저 넣으면 우리의 우승이다.”
그 흔한 ‘컴온!’이나 ‘예에-!’ 하는 함성 한마디 없이 다들 눈을 번들거리며 정지우의 말을 새기고 있었다.
달칵.
그때 마틴이 들어섰다. 그는 한눈에 라커룸의 분위기를 알아챈 것 같았다.
“후반에는 밀고 올라갈 거지?”
데이빗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마틴은 안심했다는 것처럼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좀 놀라운 소식이 있는데…….”
그는 또다시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표정이었다.
“레드 블레이트 바깥에 2만 명 정도 되는 응원단들이 몰려와 있다. 아직도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경기 끝날 때쯤엔 3만 명이 넘을 거라고 추산하고 있지.”
마틴이 그라운드 방향을 슬쩍 돌아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한결같이 외치고 있다! 힘들 때면 자신들의 기운을 받아 가라고! 45분이다! 130년을 기다려 왔던 순간이 이제 45분 남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너희도! 모두 안다!”
검지로 선수들을 콕콕 찍는 것처럼 가리킨 마틴이 잠시 입을 다물고 눈빛을 빛냈다.
“부탁한다.”
착 가라앉은 마틴의 말이 선수들의 가슴에 불쑥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마틴이 나갔고,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계속해서 라커룸을 울리는 쿵쿵 소리와 우렁찬 응원가로 충분했다.
띵동! 띵동! 띵동!
후반을 알리는 벨이 울렸을 때, 몸을 일으킨 동료들이 역시나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손을 잡고 오른쪽 가슴을 부딪쳤으며, 이어서 등을 다독였다.
어쩌면 유니온 시티 130년의 역사에 가장 오래도록 남을 45분일지도 모른다.
지금 맞이하는 후반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