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49화 (249/262)

제4장. 믿어라! 너 자신을! (2)

공이 파란 잔디를 굴러서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구르는 동안, 그의 오른편에서 쿠야테가, 왼편에서는 파예가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라파엘이 이를 악물고 함께 달리고, 무둔바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뛰어왔으며, 스웰던과 신준석이 쿠야테와 파예를 붙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투욱!

에메니케가 한 번 더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공을 밀어 넣고 달렸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자세를 낮춘 채 에메니케의 발에 집중했다.

아직 아니다. 조금 더 남았다.

지금 뛰어나가면 키를 넘기는 슈팅을 막을 방법이 없는 거다.

“와아아-!”

『주춤주춤 정지우! 에메니케! 골대를 향해 무섭게 질주합니다! 에메니케!』

함성과 고함 속에서 스터드가 잔디를 밟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타이밍이다. 타이밍만 잡으면 막는다.

정지우는 에메니케의 왼발만 보았다.

투욱!

그가 느닷없이 정지우의 왼쪽으로 공을 툭 차 놓고 뛰어들었다.

에메니케의 어깨가 함께 뛰던 라파엘의 앞으로 들어왔다.

저기서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넘어지면 바로 페널티킥이다.

라파엘은 손을 들고 움찔한 채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락!

정지우는 이를 악물고 에메니케의 앞으로 뛰어나갔다.

방향을 바꾸느라 공이 좀 더 떨어졌고, 몸의 방향마저 왼편으로 돌아서 있는 틈을 노린 거였다.

휘이익!

정지우는 공의 왼쪽을 틀어막는 느낌으로 몸을 날렸다.

왼쪽을 이렇게 틀어막아서 다리 쪽으로 유도할 생각인 거였다.

그 각도로 공을 빼내면 분명 골대 밖으로 빠져나간다.

투우욱!

몸을 던진 에메니케가 오른쪽으로 공을 빼돌렸다.

‘그렇지!’

원하던 방향이었다. 이대로 가면 공은 골대 밖으로 나간다.

‘이건 안 들어가!’

각도가 전혀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그 순간이었다.

콰아악! 콰다당!

무둔바가 몸을 날렸고, 파예가 하늘로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 때 정지우는 바닥에서 바로 일어섰다.

무둔바가 벌떡 일어서서 공을 먼저 건드렸다고 양손을 공 모양으로 둥글게 돌려 보이는 순간이었다.

주심이 페널티킥 지점을 오른손으로 가리켰다.

“예에에에에-!”

『웨스트햄! 페널티킥을 얻어 냅니다!』

TV 화면에 정지우가 몸을 날린 장면부터가 천천히 느린 그림으로 나왔다.

『그냥 둬도 저건 완전히 오프사이드 파울이었거든요! 무둔바 선수! 조금만 더 냉정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선심이 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릴 정도였습니다! 느린 그림으로 봐서는 분명 공을 먼저 건드린 것 같은데요!』

분명 공을 먼저 건드렸고, 파예는 슈퍼맨을 흉내 내는 것처럼 몸을 날린 거였다.

데이빗이 다시 주심에게 달려가 분명 공을 먼저 건드렸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역시 판정이 바뀌는 법은 없는 거다.

“후!”

공을 집어 들며 정지우는 느닷없이 기분 나빴던 꿈이 생각났다.

“미안해.”

정지우의 뒤에서 무둔바가 그답지 않게 나직한 음성으로 건네는 사과가 들렸다.

페널티 지점을 향해 공을 던진 정지우는 무둔바를 향해 똑바로 걸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둔바!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한 거다! 결과는 미안할 게 없어! 만약 네가 태클을 하지 않고 우두커니 봤다면 나는 그게 더 화가 났을 거야!”

씨익!

무둔바가 하얀 눈을 잔인하게 빛내며 웃었다.

“I'm forever blowing bubbles(난 언제나 비눗방울을 불어)!”

웨스트햄의 응원단이 지금까지의 침묵을 보상받기라도 한다는 양, 엄청난 함성으로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Pretty bubbles in the air(허공을 나는 예쁜 비눗방울)!”

양 팀 선수들이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에 몰려섰고, 에메니케가 공을 들어서 배 부근에 닦은 후 페널티킥 지점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They fly so high(높이 날아)!”

메아리처럼 울려 나오는 이런 응원가는 확실히 두렵다.

골포스트 한쪽으로 걸어간 정지우는 수건을 들어 장갑을 닦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악몽을 털어 내고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말이다.

“Nearly reach the sky(하늘에 닿을 듯)!”

툭 하고 수건을 던진 정지우는 벤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And like my dreams they fade and die(그리고 내 꿈처럼 사라져 가네)!”

그때 들려온 가사가 귀에 콱 박혔다.

악몽, 꿈처럼 사라져 가는 비눗방울.

치사하지만 어쩐지 이런 모든 것들이 정지우가 지키려던 것을 한꺼번에 털어 가겠다는 운명의 계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지우는 박용근을 찾았다.

늘 벤치에 앉아서 일어서지 않던 박용근이다.

그가 정지우의 눈을 보더니 다부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태프를 향해 그는 일어서라는 손짓을 했다.

처음이었다. 이런 모습은.

박용근이 스태프들과 어깨를 맞잡고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

함성에 고개를 뒤로 돌렸던 마틴이 단단한 걸음으로 걸어가 박용근의 옆에서 어깨를 둘렀다.

그리고 그 직후였다.

홈 관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마주 잡기 시작했다. VIP석의 쥬피터도 예외는 아니어서 옆의 이사들과 어깨를 맞잡았다.

웨스트햄 선수들이 놀란 눈으로 유니온 시티 관중들을 돌아보는 앞이었다.

『굉장한 광경입니다! 유니온 시티의 벤치와 홈 관중 모두가 어깨를 두르고 정지우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컥하네요! 지금껏 프리미어리그에서 이런 응원을 받은 골키퍼가 있었나 싶은데요! 그게 우리 정지우 선수라는 게! 이렇게 고맙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전은주, 데이지, 릴리, 메기, 신윤희까지 어깨를 맞잡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괜찮다! 페널티킥이잖아!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난 네 옆에 있을 거다!’

박용근의 눈빛을 보았고,

‘지우야! 엄마잖아! 힘들고 어려울 땐 엄마한테 기대!’

전은주의 눈도 보았으며,

‘Ji!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데이지의 눈도 보았다.

‘내가 행운을 줄게! 내 행운을 다 가져도 좋아! Ji는 내게 그런 사람이야!’

릴리의 응원도 분명하게 받았다.

벤치와 관중석만이 아니었다.

통로의 앞에 있던 에이미와 스태프들 역시 어깨를 마주 잡은 채 정지우를 응원하고 있었다.

“후-!”

나쁜 꿈? 운명?

엿이나 처먹어라!

난 지켜 낼 거다!

여기서 쉽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그건 날 잘못 본 거야!

어떤 고난도 난 이겨 낼 거고, 지켜 낼 거니까!

정지우는 바로 앞에 있던 골포스트를 발로 툭 찼다.

터엉!

“예에에-!”

『정지우! 페널티킥을 앞두고 경기 전에 보이던 동작을 보이고 있습니다!』

호프집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손님들 모두가 어깨에 어깨를 두르고 TV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장진모와 부장이 외친 소리에 일요일 늦게 남아 있던 기자들과 직원들 모두가 움직였다.

다 함께 어깨를 두르기에 부장 방이 비좁았는데 그건 상관없었다.

“막아 내겠죠?”

막내 기자의 질문이 떨어질 때 정지우가 반대편 포스트를 발로 툭 찼고, 이어서 ‘예에에-!’ 하는 함성이 또 터져 나왔다.

“멋지다! 정지우!”

부장은 질문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TV 화면을 통해 나오는 모습인데도 정지우의 뒤에서 아우라가 피어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침내 정지우가 골대 중앙에 섰다.

위를 힐끔 본 정지우가 휙 하고 뛰어올라 크로스바를 툭 치는 순간에, ‘예에에에에에-!’ 하는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웠다.

정지우는 골대의 중심에서 반걸음 앞으로 나가 ‘후!’ 하고 숨을 뱉어 냈다.

허리를 낮추고,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양팔을 쭉 편 자세로 에메니케를 노려보았는데, 유니온 시티와 웨스트햄, 그 어느 관중도 응원가를 부르지 않았다.

『주심, 휘슬을 입에 물었습니다! 월드컵 결승에서 보는 듯한 긴장된 페널티킥입니다!』

삐이익!

주심의 휘슬이 고요한 레드 블레이트를 깨웠고,

주춤주춤.

공을 향해 시선을 떨군 에메니케가 천천히 움직였다.

정지우는 에메니케의 왼발만 보았다.

방향을 속일 수는 있다.

왼쪽을 가리키고 오른쪽으로 찰 수도 있고, 오른쪽을 가리키고 왼쪽으로 찰 수도 있는 거다.

발목만 본다! 발목만!

후욱! 후욱!

에메니케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박! 차박!

그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여운처럼 튀어 오르는 잔디!

바닥을 밟으며 뒤틀리는 발목!

그리고 그 앞에서 오늘의 운명을 결정지을 공만 보였다.

꿈틀대는 에메니케의 허벅지 근육이 움찔하는 순간이었다.

휘이익!

그의 왼쪽 발목이 비틀리며, 그에 따라 오른발이 짧은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왼쪽 위!

도박이었다! 이 판단이 틀렸다면 공은 정지우가 움직인 반대편 골대 안으로 허무하게 들어갈 거였다.

그의 발이 공에 닿기 직전이었다.

‘이익!’

정지우는 있는 힘껏 몸을 움츠렸다.

왼편! 위쪽!

터어어어엉!

화아아아악!

가슴을 넓게 벌렸고, 왼팔을 쭉 뻗었으며, 허리를 한껏 뒤로 제쳤다.

공이 눈앞을 지나고 있었다.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비록 공을 건드렸다고 해도 손이 공의 중심에서 빗나가면… 골이 된다.

‘아버지……!’

왜 그랬을까?

왜 박용근의 잔잔한 눈과 미소가 떠오르며, 아버지란 단어가 떠올랐을까?

‘어머니를 지키고 싶어요! 그분이 울지 않게요!’

‘이 녀석아! 우리가 네 곁을 떠날 것 같으냐?’

‘그렇지 않다는 거 믿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우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걸 막고 싶어요!’

‘이제부터 네 시대다! 난 너처럼 큰 경기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믿어라! 너 자신을! 지우야! 내 아들아!’

“끄아아!”

악착같이 손을 뻗었다.

운명이 파 놓은 함정이라도, 이 손끝으로 막아 내고 싶었다.

터어억! 털써- 억!

세상이 확 돌아왔고,

“예에에에에에에에에에-!”

아득할 정도의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완전히 뒤덮었다.

『와아아아! 정지우가! 정지우가! 페널티킥을 막아 냅니다!』

『와아! 이건! 와! 와아아! 정지- 우!』

몸을 일으키는 정지우를 향해 동료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예에-!”

미친 것처럼 고함을 지르는 스웰던,

“이 괴물아!”

이마에 이마를 마주 대고 으르렁대는 데이빗,

“우와아- 악!”

정말 괴물처럼 함성을 지르며 달려든 무둔바.

“지우야!”

이를 악물고 달려든 신준석과는 허공에 붕 떠서 가슴을 쿵! 하고 부딪쳤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악에 받친 것처럼 응원가가 터져 나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정지우의 응원가였다.

정지우가 관중들을 향해 양손을 위로 번쩍번쩍 치켜들자 레드 블레이트는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열기에 휩싸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경기에 나가면 레드는 이렇게 말했어!”

호프집은 완전히 뒤집혔다.

자빠진 테이블 옆으로 사방에 안주 접시와 안주, 그리고 맥주잔이 널브러져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와아-! 나! 미쳐 버릴 것 같아!”

사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던 매니저가 결국 사장과 비슷한 모습으로 연신 두 주먹을 위로 치켜들었다.

이런 감동이 있는 줄은 몰랐다.

왜 사장과 손님들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는지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았다.

장진모와 부장, 그리고 당직 기자들이 앞에 두었던 캔 맥주 하나를 단숨에 들이켰다.

“형! 저 친구! 정말 영웅이지 않아요?”

“누가 아니라냐! 복이다! 우리 축구의 복! 저런 선수가 빛 한번 못 보고 사라질 뻔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섬뜩하다!”

“이럴 때 정말 기자 된 보람을 느껴요! 여기!”

대뜸 새로운 맥주를 든 장진모를 부장이 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권하는 맥주를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응원가가 끝날 때쯤에는 동료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FA컵의 아스널전에서 이긴 직후처럼 보였다.

웨스트햄의 코너킥이었다.

“상민아!”

양 팀 선수들이 악착같이 뒤엉킬 때, 정지우는 다른 선수도 아닌 박상민을 불렀다.

끄덕!

녀석이 분명하게 답을 했고, 동료들도 그 이유를 모두 알아들은 눈치였다.

“누가 진짜인지 보여 주자!”

정지우가 고함을 지르며 자세를 낮출 때,

“컴- 온!”

데이빗이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고함을 질러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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