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믿어라! 너 자신을! (1)
기습적인 노블의 연결이었고, 달려든 박상민을 벗겨 낼 정도로 빠른 모지스의 패스였다.
정지우는 빠르게 공을 따라 움직였다.
박상민이 왼쪽으로 치우친 바람에 앞에는 라파엘만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쿠야테가 똑바로 달려들었다.
“헤이! 라파엘!”
비키란 말을 다 못했다. 그에게 가려져 쿠야테의 발이 보이지 않은 거다.
“우와-!”
웨스트햄 관중들의 함성이 쏟아졌고,
『라파엘이 달려들어야죠! 오오-!』
해설자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퍼어어엉!
쿠야테가 마음 놓고 갈긴 슈팅 소리가 들렸다.
왼쪽? 오른쪽?
정지우가 주춤하는 순간이었다.
벌떡!
웨스트햄의 벤치가 모두 엉거주춤 일어섰을 때, 라파엘에게 가려져 있던 공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끄으으!’
화아아아악!
정지우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공을 보고 판단했다기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한 거였다.
몸을 솟구친 정지우의 머리 저 너머에 공이 있었다.
솔직히 늦었다.
기록으로 따지면 0.3초쯤 될 거다.
그런데 그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이걸 놓치면?
어쩐지 릴리가 다시 아플 것 같고, 브레드가 위태로워질 것 같으며, 박용근, 전은주를 못 지켜 낼 거 같다.
데이지는 옆에 있어 줄 거다.
그런데 모든 것을 놓치고 데이지와 둘이 행복해지라고?
‘이이익!’
공이 손의 끝을 스칠 때 정지우는 허공에서 최대한 몸을 비틀었다.
130년 만의 우승이라고!
그걸 놓칠 것 같아?
자각!
끔찍한 통증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다.
공을 제대로 건드렸다는 의미였다.
막았다! 이건 막은 거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정지우가 고개를 홱 돌렸을 때,
“예에에에에에에에-!”
레드 블레이트를 터트릴 것처럼 커다란 함성이 그라운드로 쏟아졌다.
정지우는 벌떡 일어나 가슴의 엠블럼을 오른손으로 쾅쾅 두드렸다.
“Nobody gets the goal on my game!”
“예에에에에-!”
관중들이 또다시 함성을 지르는 순간에 라파엘이 달려와서 손을 마주쳤고, 무둔바가 번득이는 눈빛으로 뛰어와 이마를 맞댔다.
『정지우! 정지우의 말도 안 되는 슈퍼세이브!』
『와! 이건! 정말 글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선방입니다!』
TV 화면에 벌떡 일어난 쥬피터가 두 주먹을 위로 치켜드는 장면이 나왔다.
정장 차림이다. 머리마저 깔끔하게 넘긴 그가, 평소와 다르게 관중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쿠야테가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웨스트햄 벤치에서 일어섰던 이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데이지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축구를 제대로 본 건 얼마 되지 않지만, 저런 노마크 상태에서 날린 슈팅은 거의 골로 연결됐다.
빨랫줄처럼 뻗어 나간 공이 잔인할 정도로 오른쪽 골대 구석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Ji……!’
못 막을 수 있다.
정지우도 사람이니까.
다만, 지금까지 그가 이룬 공로를 봐서 너무 큰 비난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거짓말처럼 공이 날아가는 그 짧은 순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정지우만 보였다. 그래서 그가 높다랗게 몸을 날리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화아아아악!
사람이 저렇게 반응할 수 있는 건가? 그래도 되는 건가?
고양이처럼, 표범처럼, 유연하고 매섭게 공을 덮치는 정지우를 보며 데이지는 소름이 쫙 끼쳤다.
그리고,
터억! 털썩!
공을 막아 낸 정지우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에 그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멋지다! 진짜 멋지게 막았다.
도저히 못 막을 것 같은 슈팅을 막고 일어선 거다!
『정지우! 우승에서 밀려날 뻔한 유니온 시티의 목덜미를 붙잡아 되돌려 놓습니다! 다시 봐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선방입니다!』
『반응 속도라는 게 있거든요! 지금껏 중계하면서 보았던 경험으로 이건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고 여긴 슈팅이었는데요! 우리 정지우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TV 화면에 쿠야테가 슈팅을 날린 순간 몸을 띄우는 정지우의 모습이 느린 그림으로 나왔다.
호프집 앞을 걸어가던 이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도로에까지 쏟아져 나왔다. 이어서,
“정지우! 정지우! 정지우!”
영국의 레드 블레이트에 뒤지지 않을 응원도 나왔다.
“나는!”
목이 갈라져 쇳소리가 나는 주인의 외침은 차라리 한 편의 웅변 같았다.
“언제고! 어떤 모습이어도! 당신을 응원합니다!”
그의 고함을 손님들이 일제히 박수로 응원했고, 연달아 벨이 울렸다.
직원들은 아예 미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땡땡땡땡땡땡땡땡!
손님들이 돌아가며 벨을 울린 뒤에 아예 카드를 놔두고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매니저를 맡은 직원은 기가 막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지우를 팔아서 큰돈 벌기 싫다던 사장의 진지한 눈빛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카드를 재빨리 손님들에게 돌려주었다.
“오늘은 사장님이 내신답니다!”
“무슨 소리야! 왜! 내 돈은 돈이 아니야! 얼른 계산하고 줘! 경기하잖아!”
단골손님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대체 축구가 뭐기에, 정지우가 어떤 선수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매니저는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웨스트햄의 코너킥이었다.
파예가 오른쪽 코너 플래그 바깥에서 손을 들었고, 골대 앞에서 선수들이 뒤엉켰다.
“무둔바! 헤이!”
정지우는 무둔바에게 위치를 정해 주었다.
박상민, 라파엘, 무둔바가 골키퍼 에어리어 앞을 지키기 위해 웨스트햄 선수들을 악착같이 따라붙었고, 스웰던은 쿠야테와 시비가 붙은 것처럼 대놓고 어깨를 디밀고 있었다.
퍼어어엉!
선수들이 뒤엉킨 틈으로 공이 날아왔다.
휘이이익! 휘익! 휘이익!
선수들이 솟구친 위를 공이 아슬아슬하게 지나 건너편으로 떨어졌다.
퍼어엉!
공을 차 낸 것은 꼼빠니였다.
그가 기다랗게 차 낸 공이 웨스트햄 진영 중간쯤에서 바깥으로 날아갔다.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정지우의 선방이 관중들의 열기에 기름을 좀 더 부어 준 느낌이었다.
웨스트햄의 스로인이었다.
그들은 정말 제대로 준비한 흔적이 역력했다.
박상민을 제치고 패스한 것부터가 그렇다.
유니온 시티의 수비 움직임을 완벽하게 분석했고, 그에 걸맞은 전술을 집중해서 연습한 게 분명했다.
정지우는 오른손을 쥐었다 풀면서 손가락의 통증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경기에 지장은 없다.
공은 빠르게 웨스트햄 진영을 돌았다.
점유율을 높이면서 천천히 공을 돌리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조금 전처럼 기습적인 크로스나 패스를 날린 뒤에, 슈팅으로 연결할 게 분명했다.
웨스트햄은 또한 4-3-3의 포메이션을 절묘하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앞쪽의 3명과 두 번째 줄의 3명이 번갈아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4-4-2의 포메이션으로 모습을 바꿔서 레믹과 이정렬이 공을 받을 수 없도록 묶어 댔다.
리그 초반부터 이렇게 했다면 아마 4위 안에는 무조건 들었을 거다. 물론 그건 웨스트햄 사정이다. 당장은 초반부터 유니온 시티가 너무 밀리는 게 문제였다.
웨스트햄이 유니온 시티를 완벽하게 분석한 탓이 컸다.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평소대로 잘하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느냐? 아니면 웨스트햄처럼 변형을 주느냐?
정지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뛰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변형은 평소에 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야 나온다.
그러니까 웨스트햄도 어느 정도는 부담이 있다는 이야기인 거다.
일관된 모습으로 나선 유니온 시티, 유니온 시티에 맞춰서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은 웨스트햄.
콰악! 콱! 퍼억!
“우-!”
『치고 달리던 데니를 파예가 몸으로 막아섰습니다.』
슈팅 이후에 경기가 거칠어졌다.
유니온 시티다운 경기를 하겠다고 벼르던 동료들과 워낙에 피지컬이 좋은 웨스트햄 선수들이 제대로 맞붙은 결과였다.
꽈악! 타악!
손을 뻗어 붙잡고, 그걸 뿌리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콰악! 콰다당!
어깨로 들이받아서 넘어져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와락! 꽈악! 콰다당!
그러나 달려들어서 목을 낚아채는 정도는 좀 심한 거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눈을 부라리며 맞선 데니와 파예를 떨어트려 놓았다.
“참아! 데니! 가라앉혀!”
신준석이 데니의 앞을 막아서고서 말렸다.
노블과 파예는 신준석과 데니의 방향을 계속 돌파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공을 빼앗겨서 역습을 당할 것 같으면 아예 손으로 잡아채고 있었다.
『웨스트햄이 데니와 신준석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것 같네요! 벌써 세 번째거든요! 데니도 그렇지만, 신준석 선수도 파울을 조심해야 해요!』
『노블과 파예가 수시로 위치를 바꾸면서 거칠게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공을 잡은 데니의 목을 잡아채다시피 했는데, 주심! 구두 경고로 마무리합니다!』
『저렇게 자꾸 부딪치면 신경들이 날카로워지거든요. 카드 조심해야 합니다! 당한다고 생각해서 거칠게 나갔다가 오히려 카드를 받을 수 있거든요!』
충분히 옐로카드를 줄 만한 파울이었다.
그런데도 주심은 파예에게 양손을 눌러 보이는 동작을 보이는 것으로 경기를 다시 진행했다.
중앙선 부근의 오른쪽 터치라인 안쪽이었다.
데이빗이 공을 차기 위해 준비했는데, 웨스트햄 선수들은 모두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로 내려가 있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뻑뻑한 수비였다.
웨스트햄은 어쩐지 서른여덟 경기를 치르는 리그가 아니라, 한 게임마다 탈락이 확정되는 토너먼트를 치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절대로 유니온 시티에 우승을 주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반드시 정지우에게서 골을 빼앗겠다는 각오가 그들의 온몸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는 세상에서 제일 강하지!”
쿵. 쿵. 쿵. 쿵. 쿵. 쿵.
“절대 패하는 법이 없지!”
응원가는 계속 이어졌고,
“밀리지 말라고! 저들을 그라운드에 쓰러트려!”
교장 선생님의 고함도 들렸다.
퍼엉!
데이빗은 데니에게 공을 넘겼고,
투우욱!
그 공이 곧바로 이정렬에게 연결됐다.
둑을 넘친 물이 평야를 적시듯 웨스트햄 선수들이 쭉 달려 나오는 순간이었다.
투욱!
이정렬이 오른쪽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와아-!”
최종 수비수 크레스웰과 뛰어나오는 노블의 중간을 찌르는 멋진 패스였다.
데니가 공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릴 때,
와락! 콰다당!
노블이 또다시 데니의 어깨를 붙들고 매달렸고, 둘이 동시에 엉켜 넘어졌다.
삐이이익!
“우-!”
“더러운 짓으로 레드 블레이트를 모욕하지 마!”
교장 선생님의 고함이 대뜸 달려 나온 다음이었다.
주심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노블이 양손을 모아 억울함을 표시하는 동안, 그의 동료들이 주심 앞을 막아서며 경고를 줄 정도는 아니라고 호소했다.
그런다고 판정이 달라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주심이 높다랗게 옐로카드를 들어 보인 뒤에 노블의 등번호 16을 옐로카드의 뒷면에 적어 넣었다.
‘조금만 더!’
이제 카드 한 장이다.
정지우는 수비 라인과 그 앞에 선 박상민, 데이빗의 간격을 보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웨스트햄의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약간 바깥이었다.
박상민이 데이빗과 함께 웨스트햄 진영 중간까지 나가 있었고,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에 꼼빠니와 이정렬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데니가 그 오른쪽에서 어슬렁거렸다.
『골대를 바로 노릴 수도 있겠네요! 레믹이 좋아하는 위치거든요!』
『이정렬이 골대 바로 앞에서 옥보나와 다투고 있습니다!』
레믹이 바닥에 내려놓은 공을 바라볼 때였다.
삐이익!
주심이 짧게 휘슬을 불었다.
와락! 꽈악! 콱!
옷을 붙들고, 어깨로 밀어 대고, 상대 선수를 힘껏 밀치거나 뿌리치는 동안,
퍼어어엉!
레믹이 길게 휘어들어 가는 킥을 날렸다.
스웰던과 라파엘, 무둔바와 신준석의 포백이 중앙선 부근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휘익! 휙! 휘이익!
양 팀 선수들이 뒤엉켜 뛰어올랐고,
터어엉!
공은 옥보나의 머리에 맞고 밖으로 튕겨 나왔다.
포백이 중앙선까지 올라가는 이유는 이렇게 튕겨 나오는 공을 잡아 주기 위해서인 거다.
공을 받은 무둔바가 여유 있게 왼편의 꼼빠니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퍼어엉!
꼼빠니는 공을 받자마자 다시 골대를 향해 크로스를 날렸다.
휘이이익!
그러나 공이 너무 깊게 들어갔다.
높다랗게 솟구친 아드리안이 공을 잡았고,
와락! 와락! 와라락!
그가 앞으로 달리는 것과 동시에 웨스트햄 선수들이 일제히 정지우를 향해 뛰었다.
정지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니온 시티의 역습을 웨스트햄이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거였다.
다급하게 포백이 물러났고, 박상민과 데이빗이 악착같이 뛰었지만 분명 한 걸음 늦었다.
휘이이이익!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 앞에서 아드리안이 던진 공이 중앙선 앞까지 날아왔다.
터억! 툭!
공을 잡은 오비앙이 툭 차 놓는 동작으로 단숨에 무둔바를 제치자,
“예에-!”
와락!
무둔바와 라인을 맞추고 있던 에메니케가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