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47화 (247/262)

제3장.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2)

짧고 강렬한 요구를 남기고 마틴이 라커룸을 나선 다음이었다.

“Ji! 그라운드의 지배자답게 경기를 앞둔 우리에게 한마디쯤 해 주지?”

데이빗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샘이나 비아냥이 아닌 우승을 코앞에 두고 책임감과 긴장에 얼어 버린 얼굴이었고, 진심으로 무언가 데이빗 자신과 동료들을 북돋워 주었으면 하는 눈빛이었다.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쿵. 쿵. 쿵. 쿵. 쿵. 쿵.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우리는 세계 최강 팀)!”

쿵. 쿵. 쿵. 쿵. 쿵. 쿵.

“The world has ever seen(세상에 나왔던 팀 중에서)!”

응원가가 파고드는 라커룸이었다.

정지우는 마틴을 흉내 내는 것처럼 앉아 있는 동료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다들 유니온 시티 선수가 아닌 것 같아.”

이건 또 뭔 소리야?

동료들의 표정이 꼭 그랬다.

“FA컵 우승, 커뮤니티 실드. 우리, 그런 경기를 앞두고도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잖아!”

그건 또 뭐, 그렇지!

이상하게 레믹은 표정만 봐도 그의 생각이 바로 읽힌다.

“뭐가 무서워? 고작 리그 6위 팀인 거잖아! 우리는 선두고! 우리가 긴장할 필요가 있어?”

스웰던이 눈꼬리를 기다랗게 올리며 강렬한 미소를 그려 냈다.

“그런데 솔직히 나도 좀 떨려! 실수할까 봐. 그래서 난 솔직히 오늘 레믹과 이정렬이 한 다섯 골쯤 넣어 줬으면 좋겠어! 맘 편히 우승하고 싶어서!”

“우-!”

동료들이 장난기 가득 담긴 탄성을 터트렸다.

“무패 기록? 그런 건 상관없어! 그냥 명예일 뿐이잖아!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우리, 우리다운 경기를 하자! 철강의 도시, 유니온 시티답게!”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정지우는 검지로 관중석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를 응원하는 저 소리를 들어 봐! 우리가 언제 130년 만의 우승을 만들어 보겠어? 그런 팀을 찾기가 더 어려울걸?”

동료들 전체가 픽 하고 웃었고, 레믹은 콧물이 튀었는지 손등으로 코를 쓱 문지르고 있었다.

“웨스트햄? 나는 우리 동료들이 저들보다 더 미친 황소들처럼 달려왔다고 믿어! 우리가 더 거칠게 뛰는 팀인 걸 알고 있고! 그리고 절대 이걸 잊지 마!”

정지우는 오른손에 든 골키퍼 장갑을 얼굴 앞으로 들었다.

“Nobody gets the goal on my game!”

누구도 내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다!

정지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무둔바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번들거리는 눈, 불끈 쥔 주먹, 커다란 덩치. 마치 정지우와 싸우려고 일어서는 선수처럼 보였다.

“예에-!”

그런데 그는 터무니없는 함성을 내뱉고는 정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꽈아악! 쿵!

“그래! 우리다운 경기! 강하고 힘 있는 경기로 웨스트햄을 눌러 주자고!”

데이빗이 고함을 지르며 일어섰다.

“예에-!”

“컴온-!”

선수들이 일제히 일어나 손을 맞잡으며 가슴을 부딪쳤다.

그 와중에 시선이 마주친 데이빗은 고맙다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띵동! 띵동! 띵동!

벨이 울렸다.

정지우는 숨을 나직하게 토해 내며 골키퍼 장갑을 단단하게 손에 끼었다.

“가자!”

데이빗이 동료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라커룸의 문을 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우리는 세계 최강 팀)!”

쿵. 쿵. 쿵. 쿵. 쿵. 쿵.

“The world has ever seen(세상에 나왔던 팀 중에서)!”

지금껏 통로를 꽉 채우며 기회를 엿보던 응원가가 삽시간에 라커룸을 차지하고는 귀청을 찢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자그락! 자그락!

정지우는 박상민의 뒤에서 통로로 나섰다.

“안녕?”

“안녕? Ji?”

에스코트 아이의 손을 잡은 정지우는 그라운드를 향해 섰다.

우승이다. 오늘이 리그 마지막 경기가 아니더라도.

‘어머니.’

정지우는 통로를 향해 들어오는 빛을 보며 가슴속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이 경기를 정말 보여 드리고 싶어요. 관중석에 있을 데이지도요. 사랑해요. 그리고 정말 보고 싶어요.’

왜 그런지 모른다.

그런데 통로의 입구를 통해 길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보는 순간, 저 빛이 어머니가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웨스트햄 선수들이 자꾸만 힐끔거리는 앞에서 정지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통로의 앞에서 스태프들이 나갈 타이밍을 확인하느라 자꾸만 바깥쪽으로 시선을 줄 때였다.

“지우야! 지금 따귀 한 대 때려 달라면 정말 때릴 거지?”

박상민이 몸을 돌리며 던진 질문이 날아왔다.

“제대로 한 대 갈겨 줄게. 이 꽉 깨물어!”

“됐다! 내가 알아서 정신 차릴게.”

둘이서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스태프들이 그라운드로 나가라는 신호를 주었다.

“후!”

시작이다. 우승을 향한 경기가.

자그락! 자그락!

앞쪽 선수들이 걸어 나간 직후에,

“예에에에에에-!”

관중들의 함성이 빛을 타고 통로로 쏟아져 들어왔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경기에서 우리 선수 네 명이 모두 선발로 나섰습니다!』

『그렇네요! 이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유니온 시티는 승점 1점을 확보해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 짓거든요!』

『지금 화면에 나오는 분이 쥬피터 구단주입니다. 오늘 유니온 시티의 홈구장 레드 블레이트는 모든 좌석이 다 팔렸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100여 명의 취재진으로 인해 프레스룸을 급하게 준비했을 정도로 취재 열기가 뜨겁습니다!』

공을 집어 든 주심을 따라 그라운드에 나서자 ‘예에에에에-!’ 하는 함성이 정지우를 덮쳤다.

에스코트 아이를 앞에 세운 정지우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벤치를 바라보았다.

‘감독님!’

박용근과는 둘만 아는 미소를 주고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지우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전은주는 경기 시작 전인데도 이미 붉어진 눈으로 정지우를 향해 손뼉을 치고 있었다.

“Ji! Ji!”

그리고 그 옆에서 릴리가 양손을 흔들어 댔다.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나 한국 다녀왔어! 코! 리! 아!”

정지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일 때 메기는 눈시울을 훔쳤다.

우승을 앞둔 경기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정지우를 보자 전은주처럼 벌써 감정이 벅차오른 모양이었다.

정지우는 시선을 돌려 데이지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요! 잘해 낼게요!’

‘믿어요! 믿을게요!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난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데이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서 가슴 앞으로 들어 보였다.

『양 팀 선수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웨스트햄입니다! 웨스트햄은 다른 팀과 달리 4-3-3의 포메이션으로 나섰습니다.』

『중간을 좀 더 단단하게 잠그겠다는 의도로 보이네요. 박상민과 이정렬의 활동량을 중간에서 막아 내고요. 앞쪽 세 명의 선수 중 좋은 위치를 차지한 선수가 누구든 득점을 만들어 내겠다는 선택으로 보입니다.』

아드리안

안토니오 리드 옥보나 오비에너자 크레스웰

쿠야테 오비앙 노블

모지스 에메니케 파예

캐스터가 선수들을 소개할 때마다 해당 선수가 화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가슴을 쭉 폈다.

『이어서 유니온 시티입니다! 유니온 시티는 오늘도 역시 4-2-3-1의 포메이션을 택했습니다!』

『지금껏 잘해 왔으니까 굳이 변동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카알을 대신해서 오른쪽 날개로 데니가 나온 것이 좀 다르네요.』

레믹

꼼빠니 이정렬 데니

박상민 데이빗

스웰던 라파엘 무둔바 신준석

정지우

앵커가 ‘골키퍼 장갑은 정지우가 끼었습니다!’라고 소개했고, 화면에 서 있던 정지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뒷짐을 지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

호프집은 말하면 입만 아픈 상황이었고, 어지간한 아파트, 상가들에서 비슷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정지우! 정지우! 정지우!”

호프집 사장이 유독 심한 건 있었다.

간단한 행사가 끝났고, 데이빗이 주심에게 움직였다.

그가 시선을 주자 정지우는 오른손 엄지로 본부석을 바라본 상태에서 왼편 골대를 가리켰다.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네 명이나 있어서 그런지 프리미어리그 경기인데도 묘하게 긴장됩니다!』

『화면에 박용근 감독의 모습도 나오네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 경기에 우승을 확정 짓는다면 대한민국 축구를 확실히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될 거예요!』

『일본이 많이 샘내고 있지 않습니까?』

앵커의 질문을 해설자는 가벼운 웃음으로 받았다.

데이빗은 동료들 전체를 유니온 시티 진영 한가운데 모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순간이 없으면 오히려 서운했을 거다.

다 같이 옆에 있는 동료의 어깨에 팔을 얹고 상체를 숙였다. 방송 카메라 두 대가 선수들 틈을 찍으려 애썼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는 세상에서 제일 강하지!”

쿵. 쿵. 쿵. 쿵. 쿵. 쿵.

“절대 패하는 법이 없지!”

엄청난 응원가 덕분에 어지간한 고함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우리의 목표는 유니온 시티다운 경기다!”

데이빗은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함을 질렀다.

“철강 노동자의 도시! 130년 동안! 우승을 해 보지 못한 몇 개 안 되는 팀!”

고함은 계속 이어졌다.

“후회 없이 뛰자! 우리답게! 우리에게 미친 골키퍼가 있다는 것을 믿고! 물러서지 말고 달려들자!”

“컴온-!”

몸을 일으킨 직후에 데이빗이 정지우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을 마주 잡고 오른쪽 어깨를 툭 부딪쳤다.

짝짝짝짝짝짝짝짝!

관중들이 기대에 찬 박수를 보내 줄 때 정지우는 골대를 향해 걸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홈 관중들이 어깨에 어깨를 걸고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응원가를 보내고 있었다.

낡은 체크무늬 셔츠, 오래된 청바지.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의 모습을 가장 단적으로 표시하는 복장이었다. 그런 차림의 관중들이 양팔을 옆 사람에게 걸고 자리에서 뛰며 목청껏 함성을 지른다. 그렇게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은 거고, 그들이 얼마나 승리를 원하는지를 알려 주는 거였다.

골대로 다가간 정지우는 왼쪽 포스트 앞에 섰다.

‘잘 부탁한다! 최선을 다할게!’

터엉!

“예에-!”

뜻밖의 장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TV 화면은 온통 포스트를 확인하는 정지우를 가득 담아 내고 있었다.

반대편 포스트로 걸어간 정지우는 다시 발로 포스트를 확인했다.

터엉!

“예에에-!”

함성이 좀 더 커졌다.

중앙선에 나뉘어 선 선수들과 심판들, 양쪽 벤치, 관중들, 그리고 TV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정지우의 이 모습을 지켜보는 그 중심에 정지우가 있었다.

골대의 중앙으로 움직인 정지우는 크로스바를 한 번 보고는 훌쩍 몸을 띄웠다.

터억!

“예에에에에에에-!”

홈 관중들이 미친 듯한 함성을 보낸 다음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주심이 휘슬을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이익!

“예에에-!”

『경기 시작되었습니다! 웨스트햄, 에메니케! 오비앙에게!』

『계속해서 0 대 0 무승부의 살얼음판을 걷다시피 한 유니온 시티에게 오늘 경기!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자칫해서 패하기라도 하면 긴장이 풀어질 수도 있구요, 패배로 인한 상실감을 돌이키기에 남은 일정이 별로 없어요!』

『웨스트햄! 공을 돌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양쪽 날개를 보세요! 쿠야테와 모지스가 위아래로 포지션을 빈번히 바꾸고 있구요, 노블과 파예가 또 위아래로 움직이며 유니온 시티 수비를 흔들거든요!』

『유니온 시티를 상대로 반드시 골을 기록하겠다는 웨스트햄! 이번 시즌 현재 순위 6위를 기록하고 있는 강팀입니다! 다시 공을 받은 오비앙! 노블에게 돌려줍니다!』

이정렬과 레믹이 좌우로 움직이면서 웨스트햄의 패스를 방해하려 애썼는데 아직 효과는 없었다.

“데이빗! 헤이! 데이비- 잇!”

정지우는 데이빗을 불러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앞쪽을 가리켰다.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에 현혹돼서 데이빗의 위치가 왼쪽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투우욱!

공은 오른쪽의 파예에게 날아왔다가 다시 바로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노블에게 연결되었다.

빠르고 정확한 패스였다.

정말이지 준비를 많이 했구나 하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우리는 세계 최강 팀)!”

쿵. 쿵. 쿵. 쿵. 쿵. 쿵.

“The world has ever seen(세상에 나왔던 팀 중에서)!”

응원은 잠시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준석아! 야! 신준석! 야!”

그래서 어지간한 고함으로는 동료들을 부르기도 어려웠다.

신준석을 좀 더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움직이게 했을 때였다.

퍼어엉!

오른쪽에서 달리던 노블이 느닷없이 왼편 구석을 향해 강하게 공을 날렸다.

터억! 투욱!

가슴으로 공을 받은 모지스가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 모서리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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