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45화 (245/262)

제2장. 간질간질하다. (2)

다음 날, 회복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바로 마틴을 찾았다.

노크를 한 정지우가 들어서자 마틴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책상 앞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홍차? 물?”

“괜찮습니다.”

정지우가 의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닌 것 같고?”

“최근 경기에 대해 의논하고 싶습니다.”

“음!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난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 괜찮다면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정지우는 맨시티전에서부터 느꼈던 불안감, 최근 성적, 그리고 동료들의 움직임에 대해 먼저 말을 전했다.

그리고 수비에 너무 치중하고 있어서 자칫 무너지게 된다면 걷잡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는 말을 진솔하게 건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야기가 끝난 다음이었다.

마틴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조카를 바라보는 삼촌 같은 미소를 먼저 보여 주었다.

“박 감독님이 자네가 올지 모른다고 하더군.”

그러고는 뜻밖의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자네가 보고 느낀 것이 맞아. 의도적으로 나와 박 감독님은 필드 선수 전체를 수비에 맞춰 달리게 하고 있었지.”

‘뭐야? 감독님은 알고 계셨던 거야?’

그런데 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한국으로 갔을까?

“감독이란 자리는 쉽지 않지. 더구나 130년 만의 우승을 눈앞에 둔 리그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나?”

“충분히 이해합니다.”

마틴은 책상 왼편에서 경기 일정표를 꺼내 정지우의 앞에 내밀었다.

“환상적인 시즌이다. 우리가 영국 축구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으니까. 15일에 뉴캐슬, 19일에 크리스탈 팰리스전을 끝내면 FA컵과 유로파 리그 경기 덕분에 우리는 4월 3일까지 휴식을 얻지.”

정지우도 아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저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답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환상적인 시즌이다. 우리 선수들 전체가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달리고, 결과도 만족스럽지. 이건 우리가 잘해서만 된 건 아니고, 맨유, 첼시, 리버풀이 리그 시작과 동시에 무너진 덕이 크다.”

“그렇죠.”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만약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면 정지우가 이토록 무실점 경기를 만들어 내기는 어려웠을 거다.

“거기에 자네 덕분에 박용근 감독님과 세 명의 한국 동료들이 합류해 준 것이 컸지. 특히 Sang은 내가 본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확신할 정도다.”

정지우는 가벼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선수들 전체가 발전했다. Lee와 레믹의 뛰는 거리가 리그 시작 때와 비교해서 35퍼센트가량 늘었고, 우리 선수들 경기당 뛰는 거리는 프리미어리그 3위 수준이다.”

많이 달린다고만 느꼈지, 지금 듣는 수치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선수들이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선수의 수준은 아니다. 물론 실력만으로 놓고 봤을 때 자네와 Sang은 제외되겠지만.”

책상 위에 올린 두 손을 맞잡아 깍지를 낀 마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 말대로 한 경기만 삐끗하면 130년 만의 희망이 기분 좋았던 꿈을 꾼 것으로 끝나게 되지. 나는 우리의 왕성한 활동량으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본 채로 마틴이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자네지. 자네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 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우승 확률을 높이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무승부? 지루한 경기?”

마틴이 목표를 확인하는 것처럼 연달아 질문을 던진 다음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들이 130년의 우승을 이뤄 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겼고, 나와 스태프들 전체는 리그 후반에 가장 믿을 수 있는 부분이 자네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근 우리의 회의는 어떻게 하면 자네의 부담을 더 줄여 줄 수 있는가에 집중되고 있지.”

확실히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선수건 선발이 되고 싶고, 그렇지 않다면 교체라도 그라운드에 들어가길 원하지. 멋진 활약을 보이고 싶고, 관중들이 열광할 경기를 펼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본 채로 마틴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

“130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기 위해선 그런 것들을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겠나?”

“코치, 그렇다면 상민이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내렸을 때부터 이런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요?”

마틴은 묘한 미소를 먼저 보여 주었다.

“요즘 경기를 분석하면서 나도 가끔 소름이 돋는다. 이 상황을 가장 정확히 예상했고, 선수들 전체의 활동량을 늘려 놓았던 박 감독이 후반의 전술을 제시한 장본인이다.”

기가 막힌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올라왔는데 표정을 수습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놀랐다.

“자네가 맨시티전에서 이걸 깨달았다는 것을 굉장히 뿌듯해하더군. 그냥 두라고, 자네가 어느 정도를 알고 찾아올 때까지 지켜보자고 하더군. 난 솔직히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실제로 항복한다는 의미처럼 마틴은 양 손바닥이 보이도록 두 손을 들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영국 팀의 국가대표 감독을 맡는다면 난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만은 절대 피하고 싶을 거다. 자네와 Sang도 무섭지만, 박 감독은 정말 소름 끼칠 정도거든.”

고맙다.

아버지 같은 박용근을 이렇게 평가해 주어서.

그리고 자랑스럽다.

정지우라는 선수를 길러 준 사람이 바로 그 박용근이라는 사실이.

“지루하고 답답하겠지. 자네를 믿고 달려들면 승점 3점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Ji, 만약 지난번처럼 우리 선수 누군가의 실수로 실점을 허용하고, 그래서 패하게 된다면 그땐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맞아야 할지 몰라.”

말을 마치는 순간에 마틴은 몸을 기울여 책상 한쪽 서랍에서 플라스틱 커버를 꺼냈다.

사그락.

그가 오른손으로 커버 안에서 티켓 형태의 용지를 집어서 정지우 앞으로 밀어 주었다.

양이 제법 됐다. 대략 20장 정도 될 것 같았다.

시선을 내려 내용을 살피던 정지우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몰랐나? 우리 구단 직원들은 베팅한 내용을 이렇게 신고한다는 걸. 승격 기념으로 스태프와 구단 직원들이 베팅한 거지. 어때? 130년 만의 우승이라는 게 실감 나나? 5천 배의 배당을 우리의 관중과 스태프에게 선물하는 일이다.”

마틴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5천 배가 얼마나 되는 배당인지 나도 실감이 안 난다. 그러나 누군가 130년 만의 우승 값어치를 돈으로 따지라고 한다면 5천 배쯤 되는 배당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오는 것을 보며 정지우는 퍼뜩 최면에서 깨는 느낌이었다.

“자네에게 모든 것을 걸어서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고민했을 때 자네 말고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난 직후였다.

“이봐, 그라운드의 지배자. 이제 남은 경기를 모두 틀어막아서 우리에게 130년 만의 우승을 선물해 주겠나?”

진지하고 간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정지우가 바라보는 앞에서 마틴은 분명하게 답을 원하는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마틴이 옅게 웃었다. 그리고 부탁한다는, 약속한다는 의미처럼 손을 내밀었다.

악수가 아니라 동료들끼리 나누는 것처럼 손을 세워 붙잡는 거였다.

꽈악!

손을 마주 잡자 마틴이 정지우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아! 부탁이 하나 더 있네!”

이건 농담이 좀 섞였다.

“우승이 확정된다면 말이지, 박 감독님에게 달려간 뒤에 나에게도 좀 달려와 주겠나? 어쩐지 너무 부러워서 말이지.”

정지우는 실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약속하겠습니다.’ 하고 답을 했다.

밀린 숙제를 모두 한 것처럼 후련한 심정으로 마틴의 방을 나선 정지우는 기분 좋게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

3월 15일의 상대는 뉴캐슬이었다.

강등의 악몽에 시달리는 뉴캐슬의 저항은 대단했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 선수들 전체의 활동량도 그랬고, 특히 경기 후 기립 박수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박상민의 활약 덕분에 뉴캐슬은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경기를 바라보는 정지우의 마음가짐 말고는.

거짓말처럼 불안함이 사라졌고, 좀 더 단단하게 골대를 지킬 수 있었다.

“라파엘! 헤에- 이! 헤이!”

지금은 정지우의 고함이 커질수록 수비수들의 눈빛이 번득인다. 정지우의 고함이 위기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을 동료들 전체가 알아보기 때문이었다.

경기 종료 막바지였다. 그것도 추가 시간 막바지.

소름 끼치도록 날카롭고 기습적인 슈팅이 유니온 시티의 골대 구석을 파고들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그 순간에 ‘이 경기는 이렇게 유니온 시티가 지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의 슈팅이었다.

정지우마저 역동작에 걸린 상태였다.

그러나 고양이처럼 튀어 오른 정지우가 공을 걷어 내며 그라운드에 떨어졌을 때, 레드 블레이트가 터져 나갈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려 나왔다.

코너킥을 무둔바가 높다랗게 걷어 냈고, 이어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무승부였다.

“예에에에에에-!”

우승까지 승점 4점을 남겨 두게 된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은 승리를 향한 함성을 질러 댔고, 강등을 향해 반걸음을 내디딘 뉴캐슬 관중들은 마지막 슈팅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흘 뒤의 크리스탈 팰리스전 역시 무승부로 끝났다.

느닷없이 강등권 범위로 떨어진 크리스탈 팰리스의 분투 역시 유니온 시티는 효과적으로 막아 냈다.

이번 경기의 기립 박수는 이정렬이 받았다.

원래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박상민 때문에 그라운드에 서너 명의 박상민이 있다는 우스갯말이 나오는 유니온 시티였다.

그런데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는 3명의 이정렬과 3명의 박상민이 있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정지우마저 이정렬을 향해 박수를 보냈을 정도로 이날의 그는 대단했다.

“무슨 짓이야?”

신준석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고,

“좋은 거 있으면 나눠 먹자.”

하고 정지우가 농담을 건넸다.

승점 3점 남았다.

그동안 계속 바라고 떠들었던 우승이 실제로 손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카운트다운처럼 우승을 향해 1점을 악착같이 건져 냈다.

처음엔 지루해하던 관중들도 선수들의 진심을 알아본 느낌이었다.

경기 내내 들소처럼 뛰어다니는 선수들, 특히 저렇게 뛰고 견딜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리는 박상민과 이정렬의 헌신이 막연하던 우승을 점점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뉴스는 연일 유니온 시티의 행보를 보도했다.

꾸역꾸역 승점 1점을 확보하는 것이 현명한 전술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무패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4월 3일 사우샘프턴의 경기를 하루 앞둔 날, 박용근과 전은주가 집으로 돌아왔다.

인사를 마쳤을 때 박용근이 먼저 씨익 웃었고, 정지우가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전은주와 동기 3명이 왜 저러나 했는데,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4월 3일 사우샘프턴의 경기 역시 0 대 0 무승부로 끝났다.

우승까지 남은 승점 2점.

관중들이 펄쩍펄쩍 뛰며 흥분했고, 엄청난 보도진이 경기가 끝난 후 믹스트존으로 몰려들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무둔바였다.

그는 팔꿈치에 맞아 눈이 붓고, 목덜미 여기저기를 긁혔으며, 심지어 상의가 늘어질 정도로 과격했던 사우샘프턴의 거친 공격을 악착같이 틀어막았다.

정지우와 무둔바가 서로 머리를 잡고 이마를 마주 댄 채로 으르렁거리는 장면만 네 번이 나왔고, 그중 하나는 스포츠면의 가장 앞을 커다랗게 차지했다.

경기가 끝난 라커룸의 분위기는 의외로 묵직했다.

이제 두 경기 남았다는 중압감이 조금씩 내리는 눈처럼 선수들의 어깨에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정지우가 맨시티전에서 느꼈던 불안함이 이제야 동료들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느낌이기도 했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겠지?”

데이빗이 독백처럼 정지우를 향해 건넨 질문이었는데, 묵직해진 라커룸에서 동료들 전체가 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정지우는 천천히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마치 마틴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30년 만에 우승을 선물해 준 주장, 130년 만에 우승을 만들어 낸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 스태프.”

정지우는 나직하고 힘 있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130년을 응원하며 우승을 기다린 관중들이 있지. 그들에게 우승을 선사하는 거다. 지금껏 잘해 왔어. 그리고.”

정지우는 검지와 중지를 들어 보였다.

“이제 두 경기 남았다. 주장! 우리 잘할 수 있겠지?”

데이빗이 볼을 씰룩이며 일어나 정지우의 손을 잡고 어깨를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예에에-!”

라커룸에서 느닷없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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