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누가 더 마음이 급할까? (1)
『맨시티! 유니온 시티의 미드필드를 제대로 틀어막고 있습니다!』
『그렇네요! 그동안 유니온 시티를 상대하는 팀들은 약속한 것처럼 4-5-1의 포메이션을 택했었는데요, 오늘 맨시티가 유니온 시티의 빠른 공격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네요.』
『아무래도 진눈깨비가 내린 그라운드 사정도 한몫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요, 박상민이나 레믹, 이정렬을 견제하면서 카알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것이 꽤 효과를 보고 있어요. 유니온 시티가 함부로 달려 나오지 못하면서 전반적으로 맨시티가 여유를 가지고 있거든요.』
기세를 탄 맨시티를 막아 내기 위해 동료들이 무식할 정도로 뛰어다녔다.
경기마다 누군가 상대 팀에게 흔들리는 선수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오늘의 구멍은 카알이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전담 마크맨처럼 악착같이 야야투레를 따라다녔다.
카알을 따돌리려고 애쓰던 야야투레가 옆에서 달리던 페르난지뉴에게 패스했다.
“와아- 아!”
이정렬이 가로챌 뻔했던 공이 아슬아슬하게 실바에게 넘어갔다. 그가 공을 잡는 순간에 박상민이 곧바로 달라붙었다.
투우욱!
공은 다시 뒤편에 있던 오타멘디에게 넘어갔다.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밟을 때마다 철벅이는 소리가 울려 나왔고, 패스 다섯 번에 한 번은 누군가 미끄러졌다.
결정적인 기회를 매듭짓지 못한 맨시티가 분위기를 이어 가기 위해 애썼는데, 이후로 유니온 시티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제대로 뚫지는 못했다.
분무기로 뿌리는 듯한 비가 이마를 타고 눈과 얼굴을 적시고 있어서, 제대로 된 슈팅이 날아오지도 않았는데 골키퍼를 하기에 몹시 힘겨운 경기였다.
마틴은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있었다.
그나마 맨시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 내는 것은 온전히 정지우의 지시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반에도 수비만 하다가는 결국 위험한 순간을 맞게 될 수밖에 없다.
카알이 약점이다.
애초에 그를 노렸을 수도 있고, 꼼빠니와 카알 쪽을 노렸는데 마침 카알이 뚫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를 데니로 바꾸면 맨시티는 어떻게 나올까?
바꾼다면 교체 시점은?
맨시티 역시 카알의 교체를 예상할 거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용근이 있다면 어떤 전술을 그려 낼까?
어지간해서 선수 교체를 하지 않는 그의 전술을 이어 가고 싶었다. 한국의 국가대표 감독을 맡은 그처럼 선수에게 신뢰를 주는 감독이고 싶다.
마틴은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전반에 실점하지 않는다면…….
오늘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도 나쁘지 않겠다는 계산이었다.
『선수들이 힘겨워 보입니다.』
『더운 날 내리는 시원한 비는 오히려 뛰는 데 도움이 되는데요, 오늘은 아무래도 많이 힘들 겁니다.』
이정렬이 공을 가로채서 앞으로 길게 찬 직후였다.
삑!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어 전반 종료를 알렸다.
정지우는 라파엘과 무둔바의 손을 툭 쳐 주고는 통로를 향해 걸었다.
죽어라고 달려서 겨우 틀어막은 전반이었다.
젖은 옷, 차가운 기온, 발을 내디딜 때마다 튀는 물, 마치 전후반을 모두 뛰고 연장전을 준비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최근 경기력이 좋아졌다고 자신 있게 달려들었는데 결과는 엉뚱했다. 하여간 이렇게 멱살을 잡혀 끌려가는 경기는 진이 빠진다.
라커룸으로 들어간 정지우는 우선 유니폼을 벗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새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필드 점퍼를 입었는데 몇몇 동료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모두 지친 얼굴이었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정지우는 한쪽에 준비된 뜨거운 물을 컵에 따라 마셨다.
계속 뛰었던 필드 선수는 땀이 더 나기 때문에 찬물을 마시지만, 골키퍼처럼 움직임이 덜한 포지션은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뜨거운 물을 마신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박용근 감독이라면 이렇게 지친 선수들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정지우가 다 마신 물 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달칵.
마틴이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잘해 줬어.”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선수들에게 말을 건넸다.
“원정 경기다. 날씨나 그라운드 상황도 그렇고.”
그는 다독이는 듯한 표정과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의 패턴은 단순하지. 단단하게 수비하고, 기회가 생기면 빠른 역습으로 점수를 낸다. 솔직히 이런 단순한 전술로 여기까지 온 것이 신기할 정도다.”
마틴은 레믹에게 걸어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른 전술이 있나? 어때, 레믹?”
답을 못한 레믹이 다음 말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마틴을 보았다.
“우승까지 승점 11점이 필요하다. 토트넘이 제 풀에 무너진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을 바라는 건 좋은 자세가 아니다.”
그는 레믹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레믹, 공을 잡으면 거리에 상관없이 중거리 슈팅을 노려. 꼼빠니와 카알도 마찬가지고. 상대의 엉덩이가 뒤로 빠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그러다 골이 들어가면 더 좋고.”
레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한 다음이었다.
선수들의 시선을 붙잡은 마틴이 정지우에게로 움직였다.
“이런 상태에서는 Ji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오늘은 남은 10명 전체가 Ji에게 도움을 주는 게 좋겠다. 후반에 상대의 전술 변화가 있을 경우, 그라운드의 판단은 Ji에게 맡긴다. 다들 Ji가 지시하는 바를 따라 주도록.”
말을 마친 그는 손뼉을 커다랗게 치는 것으로 시선을 다시 한 번 당겨 갔다.
“우리가 우승에 가장 가까이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전하는 팀이다. 방심하지 마라. 세 경기만 연패하면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온다.”
주변에 있던 선수들의 어깨를 툭툭 쳐 준 마틴이 라커룸을 나섰다.
정지우는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멋진 격려 같지만, 어쩐지 전반에 지친 선수들의 맥을 좀 더 빼놓은 느낌이었다.
이런 날은 차라리 유니온 시티답게 화끈한 경기를 펼치라고 악을 써 주는 것이 훨씬 효과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었다.
띵동! 띵동! 띵동!
후반을 알리는 벨 소리에 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는 어렵다.
그렇다고 감독의 지시가 있었는데 정지우가 느닷없이 밀어붙이라고 악을 쓸 수도 없는 거다.
통로에 나선 정지우는 앞에 있던 박상민의 등을 두드려 녀석을 불렀다.
“상민아, 후반에는 공격 쪽 볼 배급에 좀 더 신경 써.”
그렇게 되면 수비가 불안해진다. 그래서인지 박상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경기에서 지면 맨시티도 맨유에 4위를 내줄 위험이 있으니까 패배를 각오하고 달려들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까 아예 먼저 때린다는 생각으로 위쪽에서 막아 줘.”
“그래.”
이런 날은 정말이지 운칠기삼이라고 할 만큼 엉뚱한 슈팅에 골이 나온다. 실바를 풀어 놓았을 때 괜찮을까 하는 염려를 담은 얼굴로 박상민이 답을 했다.
삐이익!
『후반입니다! 레믹! 이정렬에게! 이정렬! 박상민에게 공을 연결합니다!』
『아직 양 팀 모두 교체 선수는 없거든요. 70분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줘서 득점을 노릴 것 같은데요, 이런 때 교체는 사실 카드 게임 같아서 누가 먼저 패를 보이느냐가 승부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박상민! 벌써 데이빗, 카알, 이정렬, 꼼빠니까지 네 명의 선수와 공을 주고받으면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유니온 시티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박상민이었다.
녀석이 중심에서 공을 지켜 주자 유니온 시티의 움직임에 숨통이 트였고, 그만큼 맨시티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퍼어엉!
박상민이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공을 날렸다.
빠르게 달려든 레믹이 힘껏 슈팅을 날렸는데, 공은 높다랗게 떠서 관중석 한중간으로 날아갔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레믹이 박상민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자 원정 관중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공연히 공을 잡으려다가 빼앗기느니, 지금처럼 엉뚱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단숨에 슈팅을 날리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을 인정한 박수였다.
지면 우승이 위태로워지는 유니온 시티, 패배하면 4강을 빼앗길 수 있는 맨시티, 양 팀 모두 살얼음판 위에서 뛰는 느낌의 후반이었다.
리그 경기는 어디나 비슷했다.
초반은 분위기를, 중반은 목표를 위한 승점을, 막판은 그동안 쌓았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뛴다.
대신 이런 경기는 선수들이 치열하게 달리는데도 구경하는 사람은 별 재미없는 축구, 딱 그런 경기가 된다.
그치지 않는 진눈깨비, 질퍽거리는 그라운드, 힘겹게 달리는 선수들의 거친 호흡, 잠시도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응원과 함성, 그리고 탄성.
상황을 바꾸기 위해 먼저 교체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맨시티였다.
『맨시티! 야야투레와 델포를 동시에 아웃시키고, 페르난두와 이헤아나초를 투입합니다. 후반 시작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입니다.』
『두 선수가 유독 지친 모습이었거든요. 후반 들어서 유니온 시티의 움직임을 다시 한 번 막아 보겠다는 의도 같네요!』
건너편에 서 있는 맨시티의 골키퍼 하트와 정지우가 계속해서 움직이며 수비수들에게 고함을 질러 댔다.
한 방이다. 딱 한 방.
힘겹게 달리는 경기라 한 방 얻어맞으면 우르르 무너져서 대량 실점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우리 선수들이 뛰는 영국 프로 축구는 일단 시선이 간다.
당연하게 우리 선수들의 멋진 활약을 기대하게 되고, 이어서 승리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그동안 시간이 맞지 않았던 탓에 오랜만에 호프집에 모인 손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소위 뻥축구인 거다.
그나마 전반에는 정지우의 선방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팀이든 공을 잡으면 뻥뻥 내질러서 급한 슈팅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이 씨! 오른쪽이 완전히 비었잖아! 아니, 나도 보는 저걸 못 봐? 그냥 툭 차 주면 완벽하게 열릴 텐데, 왜 저렇게 뻥뻥 내지르지? 하! 박상민이 쟤도 가끔 시야가 너무 좁아!”
“지시가 있었겠지. 맨시티도 똑같이 그러잖아!”
“내 말이! 이건 뭐 비기겠다고 작정한 팀처럼 절대 파고들지를 않잖아! 실바도 그래! 전반에 좀 설치더니 지금은 그냥 공만 넘기는 거 아냐!”
축구를 제법 봤다는 남자 손님들의 불평이 군데군데에서 터져 나왔다.
“이거 이래서 일본하고 평가전 피하는 거 아냐? 사실 일본하고 객관적으로 붙으면 장담하기 어렵잖아!”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고작 한 경기인데! 진 것도 아니고, 죽을 쑨 것도 아닌데! 이럴 때일수록 더 악착같이 응원해야지!”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공은 계속 중앙선을 넘어 다니고 있었다.
후반이 15분쯤 남았을 때 비가 그쳤다.
좋아진 것은 전혀 없고, 바람이 불 때마다 섬뜩섬뜩한 느낌만 들었다.
오늘 축구는 완벽하게 실바와 박상민의 대결처럼 보였다.
누가 중앙에서 공을 더 잘 지켜 내고, 또 누가 제대로 된 한 번의 킬패스를 찔러 넣을 수 있는가를 겨루는 경기.
그러기 위해서는 지친 동료들을 잘 이용해야 하고, 경기 전반을 읽는 눈이 있어야 하며, 상대 팀의 마크맨을 따돌려야 하는 거다.
공이 아웃된 직후였다.
“허억! 허억!”
평소와 다르게 박상민이 무릎에 손을 올리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녀석은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찾았다.
‘다르다! 확실히 달라! 어떻게 해 보기가 어려워!’
‘잘하고 있으면서 왜 그래! 버텨! 얼마 안 남았다!’
‘버티는 거 말고 이겨 보고 싶어.’
마음은 안다. 이해도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렇게 지켜 내는 것만 해도 충분히 인정해 줄 수 있을 만큼 맨시티는 강팀이었다.
“맨시티! 워- 오오! 맨시티! 워- 오오!”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맨시티 관중들이 줄기차게 응원을 펼쳐 대는 동안 시간이 또 흘렀다.
추가 시간 3분을 알릴 때까지 아구에로의 중거리 슈팅 한 번, 이헤아나초의 헤더 한 번, 그리고 실바의 크로스를 받은 페르난지뉴의 슈팅이 있었고, 유니온 시티는 레믹이 두 번, 이정렬이 한 번 날린 중거리 슈팅을 만들어 냈다.
위협적인 찬스라기보다는 젖은 그라운드가 줄 행운을 바라는 슈팅이어서, 정지우나 하트 모두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삑! 삑! 삐이익!
그리고 마침내 힘겹고 지겹던 경기가 끝났다.
『경기 끝났습니다. 유니온 시티와 맨시티의 경기는 0 대 0 무승부로 양 팀 모두 승점 1점씩을 가져가는 경기가 되었습니다.』
『무난한 결과네요. 이렇게 해서 유니온 시티는 자력 우승까지 승점 10점을 남겨 두었구요, 맨시티는 5위인 맨유의 추격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따돌릴 수 있었어요.』
수건을 어깨에 걸친 정지우는 동료들, 맨시티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며 벤치를 향해 걸었다.
승점 10점 남았다.
마지막 경기까지 모두 비겨야 겨우 만드는 승점.
토트넘이 남은 경기를 모두 이긴다고 가정했을 때의 점수라서 그들이 비기면 8점으로 내려가고, 질 경우에는 7점으로 내려간다.
제발 좀 져라!
그들이 막판까지 멋지게 달려와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환상적인 승부를 내는 거, 정지우는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다.
누가 더 마음이 급할까?
쫓는 토트넘과 쫓기는 유니온 시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