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40화 (240/262)

제9장. 우승은 실리다. (1)

월요일 오전, 박용근은 전은주, 이정렬의 부모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했다.

“설날인데…….”

“다녀오세요. 떡국 안 먹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 사람이 내내 얘기 다 해 놓고 또 그런다.”

아쉬워하는 전은주를 정지우와 박용근이 달랬다.

근처에 신윤희가 있고, 구단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거다. 거기에 선수 생활 짬밥이 한두 해가 아니어서 동기들끼리 일주일가량 지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정렬이 특히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것에 만족해했다.

박용근과 전은주가 싫다거나, 부담스럽다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커다란 집에 동기 넷만 남게 되자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생활인데도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심정이기도 했다.

“너희들아! 너희는 내가 줄 즐거움을 믿느뇨?”

고등학교 합숙 때 보았던 신준석의 모습이 나온 이유도 그래서인 것처럼 보였다.

“상민이 너는 내일부터 훈련에 합류하리로다.”

박상민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어 댔다.

실제로 녀석은 다음 날인 화요일부터 훈련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

한국에 도착한 박용근은 당장 공항에서부터 달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책임을 안 맡았다면 모를까, 대한민국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기자들을 피하는 건 바른 자세가 아닌 거다.

“이번 방문의 목적을 먼저 좀 말씀해 주십시오!”

“월드컵 본선이 1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기술 위원들과 의논해서 월드컵을 책임질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선발할 예정입니다.”

“선발 기준이 있다면 알려 주시겠습니까?”

“소속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 위주로 선발할 예정입니다. 그 외에도 소속팀에서의 활약은 부족하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가 있다면 선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겠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앞에서 박용근은 분명하게, 또렷하게 소신을 밝혔다.

“감독님! 일본이 공식적으로 친선전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는 협회 부회장이 박 감독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까지 친선전을 피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거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용근이 던진 시선에 김문호는 일단 넘기고 보라는 투로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라면 비행기 안에 있을 때인 모양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는 데다, 그런 말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외국 기자들, 특히 중국과 일본 기자들까지 모두 있는 자리다. 그런데도 한국 기자는 마치 못된 녀석을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억울한 음성을 토해 냈다.

스포츠부 기자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경기 결과나 에이스의 활약 등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일 말이다. 자존심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그래서 박용근이 무언가 따끔한 한마디쯤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기자의 얼굴에 담뿍 담겨 있었다.

“일본의 본선 진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일본은 J리그를 통해 육성한 선수층이 두껍고, 그 결과로 해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는 세계적인 선수들이 많다고 봅니다.”

한국 기자들의 표정에 실망감이, 일본 기자들의 얼굴에 자부심과 그러면 그렇지 하는 거만함이 피어올랐으며, 중국 기자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말을 마친 박용근이 몸을 돌렸고, 김문호와 협회 직원이 그를 안내했다.

이정렬의 부친과 모친은 이미 다른 길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박용근과 전은주는 협회에서 준비한 승합차에 올라 공항을 빠져나왔다.

“피곤할 텐데 바로 호텔로 갈까?”

“그거 협회비로 지급하는 거 아냐? 그럴 필요 없이 우리 집사람도 내려 줄 겸해서 우리 집으로 가지? 오래 사람이 안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린 집이 편해.”

김문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부천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내내 선수 선발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거 미안해서 어쩝니까?”

“괜찮아요. 집 청소를 오래 못해서 그게 죄송하죠.”

세 사람은 일단 부천의 박용근 집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빌라가 잔뜩 껴안고 있던 외로움을 느닷없이 열린 현관문으로 내던지며 사람들을 반겼다.

창문을 먼저 열었다.

다음으로 박용근이 커다란 가방을 안쪽에 넣는 동안, 전은주는 물을 끓였다.

박용근과 김문호가 탁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이거 좀 봐.”

서류철에서 A4용지 두 장을 꺼낸 김문호가 박용근 앞으로 내밀었다.

“A매치 기간에 경기를 피하게 되면 포인트를 잃을 수 있다는 내용이거든. 뒤에 우리말로 옮겨 놓은 거. 그래, 그거. 아무래도 일본 애들이 장난친 거 아닌가 싶은데?”

박용근은 말없이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급한 대로 동남아시아 팀들이나 이번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한 팀 중에 몇 개 골라 볼 테니 한번 고민해 봐.”

김문호의 제안에도 박용근은 답이 없었다.

***

화요일부터 다시 훈련이 이어졌다.

레드 블레이트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관중석에서 훈련을 지켜보았고, 통로로 향하는 정지우와 박상민, 그리고 동기들과 동료 선수들에게 사인지를 디밀었다.

유니온 시티는 어렵게 출발한 팀이다.

20개 팀에서 19위쯤 하는 성적을 거둘 거고, 그래서 이번 시즌이 끝나면 바로 챔피언십인 2부 리그로 돌아갈 거라고 예상했던 팀이기도 하다.

금전적으로도 그리 넉넉한 팀이 아니었다.

덕분에 스쿼드가 빵빵한 팀들, 특히나 몸값 비싼 선수들이 드글드글 벤치를 달구는 팀에서는 얻기 어려운 이점이 있었다.

빤한 선수들이 빤한 포지션으로 줄기차게 경기를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동료들끼리 눈만 봐도 무얼 원하는지 척척 알게 되었다는 거였다.

정지우를 비롯해 최근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 박상민, 이정렬, 신준석이 거들먹거리지 않는 것도 팀 분위기를 이끄는 데 분명하게 한몫했다.

남은 승점은 11점이다. 프리미어리그 우승까지.

4경기를 이기면 토트넘이 남은 경기를 전부 이기고 달려와도 유니온 시티의 우승을 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해 보자는 의지가 팀 전체에 가득 깔려 있었다. 리버풀전에서 두 번째 골을 양보한 레믹의 활약과 아스널전에서 이정렬이 만들어 낸 두 개의 어시스트는 이런 바탕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Ji! 나도 캘바이탕.”

데이빗과 레믹이 갈비 수프라고 부르던 갈비탕을 제대로 부르며, 커다란 그릇 가득 국물과 갈비를 담아 왔다.

“한국 음식은 몸이 좋아지는 느낌이야. 요리법도 다양하고.”

함께 식사하며 다음 경기를 의논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박용근은 국가대표 선발 명단을 발표했다.

모두 30명을 선발했고, 훈련 과정을 지켜보고 최종 엔트리 23명을 선발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연하게 정지우를 비롯한 동기 3명이 포함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예선을 뛰었던 선수들 역시 모두 명단에 들었다.

발표회장에서 박용근은 먼저 선수 선발 기준을 알려 주었고, 다음으로 명단을 발표했으며, 이어서 질문을 받았다.

딱히 흠 잡힐 일 없는 명단이었다.

게다가 새로 감독이 된 박용근을 당분간만이라도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배려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당연한 것처럼 라커룸에서 정지우와 동기들에게 온 소포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가끔은 기쁜 마음으로 과자를 나누어 먹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자 맛에 빠진 마틴을 비롯한 스태프들도 자주 찾곤 했는데 과자의 양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데이빗과 레믹이 과자를 들고 엄지를 치켜든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이후로 두 사람에게도 엄청난 양의 과자가 날아와서 유니온 시티 동료들과 스태프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한국의 국민 팀 유니온 시티였다.

한국 시간으로 2월 14일 일요일 밤 9시였다.

FA컵 등의 일정 탓에 새벽에 경기가 이어지다가 모처럼 이른 시간의 중계인 데다, 명절이 있었던 주의 마지막 날이라 분위기도 좋았다.

호프집은 당연하게 손님들로 가득 찼다.

신기한 일이다.

한국 선수가 4명이나 주전으로 뛰는 팀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가장 바싹 다가서 있다는 사실은.

“이럴 줄 알았으면 유니온 시티 우승에 베팅하는 건데 그랬어!”

“로또 번호 미리 아는 거랑 같은 말이지! 솔직히 유니온 시티가 우승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어? 괜히 배당이 5천 배가 넘는 게 아니잖아!”

“그렇다는 거지! 너는 왜 그렇게 뾰족하게 그래!”

맨시티와의 경기를 앞두고 일찌감치 자리한 손님들이 유니온 시티의 성적을 두고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야! 나온다!”

9시가 되자 TV가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비춰 주었다.

『양 팀 선수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홈 팀 맨시티의 선발 명단입니다.』

캐스터가 포지션과 이름을 소개하는 동안, 해당 선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프리미어리그 특유의 장면이 화면 가득 담겼다.

하트

사발레타 오타멘디 데미첼리스 콜라로프

실바 페르난지뉴 야야투레 델포 스털링

아구에로

『맨시티 역시 유니온 시티를 상대로 4-5-1의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이어서 유니온 시티 선수 명단입니다.』

레믹

꼼빠니 이정렬 카알

박상민 데이빗

스웰던 라파엘 무둔바 신준석

정지우

『골키퍼 장갑은 정지우 선수가 끼었습니다.』

마지막에 정지우의 모습이 나오자 박수와 함께 가벼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유니온 시티는 아예 스쿼드가 굳어진 느낌입니다.』

『워낙 선수층이 빤하니까요. 세계적인 선수들, 특히 몸값 비싼 선수들이 가득한 프리미어리그에서 이번 시즌 유니온 시티의 돌풍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박용근 감독은 아직 한국에 있어서 오늘 경기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양 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가장 앞에서 나온 주심이 받침대 위에 올려진 축구공을 집어 들었고, 그 뒤를 따라 선심과 부심, 이어서 아이들의 손을 잡은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섰다.

『우리 선수들이 완벽하게 주전으로 자리하지 않았습니까?』

『굉장한 일입니다. 최근 K리그에 여러 나라의 스카우터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아마 정지우를 비롯한 우리 선수들의 활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단한 행사를 마친 뒤에 데이빗이 주심에게 다가가 진영을 결정했다.

정지우의 선택은 오른쪽이었다.

맨시티의 홈구장이다.

그들의 응원가 ‘Blue moon’이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다.

응원가는 솔직히 리듬이나 박자 따위 따지지 않는다.

그저 목청껏 외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고, 그렇게 만들어진 함성이 상대 팀을 누르고, 홈 팀에게 힘을 실어 주는 거였다.

양 팀 선수들이 포지션으로 움직이는 동안, 정지우는 곧바로 골대로 향했다.

터억.

‘잘 부탁한다.’

승점 11점이다.

토트넘이 무서운 기세로 추격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정말이지 다 된 밥에 코 빠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터억.

골포스트를 발로 확인한 정지우가 중앙에 서서 훌쩍 뛰어올랐다.

“예에에-!”

이게 의도한 건 아닌데 크로스바를 건드리는 순간에 함성이 터져 나와 상대 팀의 응원가를 자연스럽게 정리한다.

쿵. 쿵. 쿵. 쿵. 쿵. 쿵.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팀! 절대 지는 법이 없지!”

함성을 물고 유니온 시티의 응원가가 달려 나왔다.

“후우-!”

정지우는 숨을 커다랗게 뱉어 냈다.

구름이 잔뜩 끼어서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날씨였다.

삐이이익!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맨시티의 선공입니다! 아구에로! 야야투레에게!』

『이번 시즌의 특징이라면 이상하게 맨유나 맨시티, 아스널, 첼시, 리버풀 등과 같은 강팀들이 초반에 힘을 못 썼다는 거거든요. 올라갈 팀은 올라가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이번 시즌에는 제대로 통하지 않네요.』

『첼시는 한때 강등을 염려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아스널이 4위를 하는 것이 이제는 과학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아스널은 이번 시즌에도 4위를 굳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7위 바깥으로 밀려난 맨유가 꾸역꾸역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요, 초반에 강팀들이 스스로 무너진 것도 유니온 시티의 돌풍에 도움을 주었을 거예요.』

맨시티가 공을 돌리는 동안 레믹과 이정렬, 꼼빠니와 카알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라파엘! 헤이! 헤이!”

정지우의 고함을 들은 라파엘이 시선을 돌렸고, 바로 라인을 수정했다. 자세하게 지시하지 않아도 라파엘은 정지우의 동선을 바로 이해했고,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들었다.

무패 우승은 명예고, 우승은 실리다.

당장 중계권료만 해도 그렇다.

50퍼센트는 20개 팀이 골고루 나눠 갖고, 남은 것 중 25퍼센트는 중계된 횟수에 따라 지급하며, 다시 남은 25퍼센트는 1등부터 20위까지 성적에 따라 지급하는 거다.

당연하게 유니온 시티가 중계권료를 가장 많이 받는 팀이 되는 거다.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130년을 기다렸던 우승이 승점 11점을 앞둔 상황이었다.

유니온 시티 원정 관중들의 함성이 선수들에게 분명하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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