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36화 (236/262)

제7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기를. (2)

피르미노가 엠레찬을 향해 공을 차 주면서 기대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양팔을 뻗은 리버풀 관중들이 ‘바람을 뚫고 걸어라! 비를 뚫고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네 심장에 희망을 담고! 너는 결코 혼자 걷지 않는다!’라는 특유의 응원가를 불러 댔다.

레드 블레이트에 울려 퍼진 리버풀의 응원가가 급류처럼 그라운드로 쏟아져 내려와 선수들을 휩쓸었다.

이런 응원은 리버풀 선수들을 기운 나게 하고, 그에 맞서야 하는 유니온 시티 팀 선수들을 짓누른다.

이미 상대에 대해 알 만큼 아는 팀들의 대결이었다.

투욱! 툭!

엠레찬이 왼쪽 헨더슨에게 넘겨준 공이 꼼빠니를 피해 다시 엠레찬에게 돌아왔다.

퍼어엉!

그리고 엠레찬은 반대편에서 달리던 루카스를 향해 깊게 공을 찔러 넣었다.

『데이빗! 루카스의 앞을 막아섭니다! 루카스! 랄라나에게!』

“와아-!”

『박상민이 오히려 랄라나를 바싹 따라붙었습니다! 거칠게 뿌리치는 랄라나!』

퍼엉!

『박상민을 마크할 거라 예상했던 랄라나 선수가 오히려 박상민을 피해 공을 뒤로 돌립니다!』

『박상민의 저런 움직임이 상대 팀 선수들이나 벤치에는 정말 힘든 요소일 거예요. 저러다가 불쑥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거든요.』

『클라인! 골키퍼 미놀레에게 공을 돌립니다! 유니온 시티! 경기 초반부터 엄청나게 강력한 전방 압박을 펼칩니다!』

정지우는 공을 따라 움직이며 경기에 집중했다.

홈경기를 맞아 초반부터 밀어붙이라는 벤치의 요구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미드필드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면 당연하게 수비 라인이 위로 올라가 줘야 하고, 그만큼 실점의 위험이 커진다.

밀고 올라간 수비 라인이 패스 한 방에 뚫리면 남는 건 골키퍼밖에 없는 거다.

“준석아! 야! 신준석!”

정지우는 손을 입에 대고 커다랗게 신준석을 불렀다. 그리고 시선을 돌린 녀석에게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노리는 7번 밀너를 가리켰다.

퍼어엉!

리버풀의 수비수 로브렌이 길게 찔러 준 패스를 꼼빠니가 커다랗게 걷어 냈다. 공은 왼쪽 사이드라인으로 나갔고, 리버풀의 스로인이 주어졌다.

『좀처럼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양 팀입니다.』

『리버풀이 신중하게 경기를 운영하고 있거든요. 중앙에서 공을 소유하고 차근차근 닦아 나오는 분위기네요. 공격에 실패해도 유니온 시티의 빠른 역습에 당하지 않겠다는 계산인 것 같습니다.』

리버풀의 클라인이 던져 준 공을 엠레찬이 받았다.

그는 바로 헨더슨에게 공을 차 주었고, 헨더슨은 오른쪽에 있던 랄라나에게 패스해 주었다.

『랄라나! 밀너에게 패스! 밀너! 신준석의 앞을 달립니다!』

투우욱!

“와아- 아!”

밀너가 신준석과 무둔바의 사이로 공을 툭 차 놓고 빠르게 뛰어들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돌파였다.

자세를 낮춘 정지우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무둔바가 위치를 차지했고, 데이빗과 박상민이 이미 들어와 있으며, 라파엘과 스웰던은 리버풀 선수들을 따라붙은 다음이었다.

툭툭!

“와아- 아!”

패스할 곳이 마땅치 않은 밀너가 골대로 똑바로 달려왔다.

보기엔 멋지지만, 슈팅 각도가 점점 줄어드는 거였다.

오른쪽에서 치고 온다.

오른발을 이용해 감아 차든가, 1.5미터 정도 공간을 노리고 왼발로 슈팅하는 게 최선이었다.

투욱!

정지우의 7미터쯤 앞에서 밀너가 공을 밀었다.

다음은 슈팅인 거다.

정지우는 허리를 잔뜩 낮췄다.

어디?

콰아악!

그가 오른발로 공의 앞을 디뎠다.

왼발 슈팅이었다. 그렇다면 감아 찰 수는 없다. 당연하게 오른쪽을 노릴 거였다.

퍼어어엉!

오른쪽 골대를 향해 날아오는 공을 향해 정지우는 두 손을 쭉 내밀었다.

터어엉!

“예에에-!”

튀어 나간 공을 신준석이 기다랗게 차 냈다.

녀석이 걷어 낸 공은 중앙선 부근에서 아웃됐다.

반대편에서 기다렸던 엠레찬과 랄라나가 양손을 들며 아쉬움을 토해 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무둔바가 다가와 악수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고, 정지우가 그 손을 툭 쳐 주었다.

수비수는 뚫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위치만 제대로 잡아 주면 실점의 위험이 줄어든다. 골키퍼가 원하는 동선을 막아 주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래서 호흡을 오래 맞춘 포백은 함부로 교체하지 않는다.

정지우는 다시 골대 중앙에서 경기장 안쪽을 노려보았다.

멋진 플레이를 선보이지 못해도 괜찮다.

밋밋하게 막아도 상관없다.

골을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골키퍼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다.

『전반을 통틀어 양 팀의 유일한 슈팅이었습니다!』

『각도가 부족했거든요. 슈팅보다는 골대 중앙으로 넘겨서 피르미노나 랄라나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밀너는 슈팅을 선택했네요.』

리버풀의 스로인이었다.

공은 루카스를 거쳐 수비수 사코에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중앙의 랄라나에게 연결되었다.

랄라나는 공을 잡기 무섭게 엠레찬에게 넘겼다.

『유니온 시티가 나쁘지는 않은데, 밀너의 슈팅 이후로 리버풀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점유율도 리버풀이 조금 더 높게 나오네요. 이정렬과 박상민이 중앙의 랄라나와 피르미노를 묶어 준 덕분에 아직은 팽팽한데요, 지금처럼 공격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면 유니온 시티가 몰릴 수 있어요.』

고작 슈팅 한 개였다. 그런데 그 슈팅 이후로 경기 분위기가 리버풀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리버풀의 패스가 살아나는 게 눈에 확실히 들어왔다. 정지우가 노려보는 앞에서 불쑥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넘어왔던 공이 빠르게 뒤로 돌아가곤 했다.

퍼어엉!

루카스가 대각선 왼편에 있던 헨더슨에게 길게 공을 넘기면, 헨더슨은 뒤따라오던 클라인에게 패스해서 템포를 죽였다.

그다음 클라인에게서 움직인 공이 로브렌, 사코를 거쳐 빠르게 오른쪽으로 움직였고,

퍼어엉!

다시 왼편의 엠레찬에게 옮겨 갔다.

당장 골대를 위협하는 공격이 펼쳐진 건 아니다.

그러나 공의 방향에 따라 유니온 선수 전체가 조금씩 좌우로 휘청이고 있었다.

이렇게 흔들리다 보면 공을 따라 한쪽으로 쏠릴 때가 나온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수비수들이 쏠린 반대편으로 공이 날아온다.

리버풀은 결정적인 한 방을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 가는 느낌이었다.

몰라서 당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패턴의 일종이었다. 박상민과 이정렬, 데이빗과 카알이 악착같이 공을 뺏기 위해 달려드는 이유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인 거였다.

“라파엘! 헤이! 라파엘!”

정지우는 라파엘과 무둔바의 위치를 계속해서 잡아 주었다. 중앙의 두 명마저 흔들리면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다.

툭툭!

왼쪽에서 공을 잡은 헨더슨이 마침내 스웰던의 앞으로 달려왔다.

‘온다!’

스웰던에게 막힌 헨더슨이 페널티 에어리어 모서리를 향해 공을 흘렸다.

투욱.

엠레찬이 공을 잡았고, 박상민이 그 앞을 막았다.

퍼어엉!

엠레찬의 선택은 오른쪽을 달리는 루카스였다.

무둔바까지 왼편으로 쏠린 상태였다.

골대를 향해 달려오던 루카스를 신준석이 막아서는 순간이었다.

투욱!

“예에에-!”

루카스는 신준석의 오른쪽으로 공을 흘렸다.

밀너가 또다시 공을 잡았다.

퍼어어엉!

정지우가 위치를 잡아 줄 틈도 없이 공이 날아왔다.

『밀너! 크로스!』

골키퍼 에어리어 바깥이라 달려 나갈 수도 없었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공을 따라 움직이며 허리를 잔뜩 낮췄다.

루카스와 신준석이 맞붙었고, 라파엘이 엠레찬을 안다시피 밀쳐 내는 앞이었다.

그때 헨더슨이 불쑥 튀어 올랐다.

『오오!』

누군가 그를 잡아 줬어야 했다.

저렇게 혼자 마음 놓고 뛰어오르게 두면 안 되는 거였다.

어디로 공이 처박힐지, 어느 구석을 파고들지 모른다.

이럴 때면 세상이 아득해지면서 솟아오른 헨더슨이 하늘을 가득 채운 것처럼 커다랗게 보인다.

터어어엉!

헨더슨의 머리에 공이 맞는 그 순간이었다.

‘끄응!’

화아아아악!

정지우는 높다랗게 몸을 날렸다.

판단? 그건 거 모른다. 그냥 몸이 움직인 거다.

그리고 매번 말하지만 이럴 땐 공만 보인다.

세상에 공과 정지우만 있는 거다.

『오오오-!』

벌떡 일어난 리버풀의 벤치, 반쯤 몸을 일으킨 리버풀의 응원단, 손으로 얼굴을 가린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 리버풀 선수들과 뒤엉킨 채 시선을 주는 동료들.

정지우는 오른쪽을 파고드는 공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축구다.

손을 사용하지 않은 채 상대 팀의 골대에 공을 많이 넣은 팀이 이기는 경기.

‘브레드, 혹시 우리 팀의 우승에 베팅했어요?’

5살 때부터 이 경기를 지켜보며 유니온 시티의 우승을 그려 온 노동자, 브레드. 그에게 있어 축구는 아버지가 데려다준 새로운 세상이었고, 그의 인생이었고, 그의 가족 모두와 함께 나눈 추억이고, 삶인 거다.

철강 노동자가 5살 때부터 지니고 살았던 소망.

‘꼭 가지고 있어요.’

정지우는 몸을 비트는 것처럼 악착같이 손을 뻗어 냈다.

‘내가 지켜 낼 거니까!’

터어억! 털썩!

“예에에에에에에에-!”

『슈퍼! 슈퍼! 슈퍼세이브!』

바닥에 떨어진 정지우의 시선에 골대 바깥을 구르는 공이 들어왔다.

홈 관중들이 터트린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터트릴 것 같았다.

“이 괴물 같은 골키퍼!”

몸을 일으키자 무둔바가 하얗게 변한 눈으로 달려와 정지우의 머리를 당겨 자신의 이마에 붙였다.

“지우야!”

흥분해서 다가온 신준석과 동시에 뛰어올라 어깨를 부딪쳤다.

『정지우! 실점의 위기에서 유니온 시티를 강제로 끌어냅니다! 레드 블레이트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정지우의 선방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거든요! 울컥한데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정지우의 선방이 느린 그림으로 나왔다.

『저 상태에서 몸을 날렸습니다! 저 정도로 코너를 파고들면 알아도 못 막는 건데! 신장 187의 정지우가 저런 헤더를 막아 냅니다!』

해설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악을 써 댔다.

리버풀 선수들이 코너킥을 준비하는 동안이었다.

“자리를 잡아 줘! 헤이! 데이빗! 데이빗!”

정지우는 손뼉을 쳐 가며 고함을 질렀다.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공격을 주도하는 것은 리버풀인데 레드 블레이트에 울려 퍼진 것은 유니온 시티 관중들의 함성이었다.

호프집에는 사장 혼자 있었다.

새벽 4시 45분 경기라 2시쯤 영업을 마쳤고, 직원들마저 들여보낸 다음이었다.

생맥주 한 잔, 간단한 마른안주를 앞에 두었던 사장은 앞으로 든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TV에서 나오는 해설자의 외침과 응원단의 함성이 자꾸만 그의 피를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정지우가 장갑을 끼우며 자세를 잡는 앞에서 양 팀 선수들이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뒤엉켰다.

『리버풀의 코너킥입니다!』

『헨더슨도 그렇구요! 뒤쪽에 있는 사코를 경계해야죠!』

루카스가 손을 높게 들었다.

퍼어어엉!

그리고 그는 곧바로 길게 공을 넘겼다.

빠르게 날아온 공이 골대를 지나쳐 왼쪽으로 날아갔다.

정지우가 왼쪽으로 몸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리버풀의 수비수 클라인이 그대로 달려들며 슈팅을 날렸다.

퍼어엉!

왼쪽으로 몸을 기울인 정지우가 얼른 팔을 당겼다.

“우-!”

이미 밖으로 나가는 공에 굳이 손을 뻗을 이유는 없는 거였다.

『유니온 시티! 완벽한 실점 위기를 넘깁니다!』

『이번 시즌 유니온 시티의 돌풍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슈퍼세이브입니다! 왜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정지우 선수에게 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는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선방이구요!』

정지우가 공을 잡아 골대 앞에 놓았을 때였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유니온 시티의 선수 교체입니다. 카알을 빼고 데니를 집어넣습니다!』

『오른쪽 밀너를 좀 더 확실하게 막을 필요가 있다고 본 것 같네요.』

그때 방송 카메라가 벤치 위쪽의 관중석을 보여 주었다.

『우리 선수들 가족인 것 같은데요?』

『그렇네요. 신준석 선수 누나구요, 그 옆쪽으로 이정렬 선수 부모님이네요. 가운데가 박용근 감독 부인이구요.』

화면이 다시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오는 데니로 바뀌었다.

지금 멀리 차 주었다가 공을 뺏기면 괜히 리버풀의 기세만 살려 주게 된다.

투욱!

정지우는 데이빗을 향해 공을 차 주었다.

피르미노와 루카스가 달려들자, 데이빗은 바로 라파엘에게 패스했다.

툭! 툭!

라파엘에게서 무둔바에게 움직였던 공이 다시 신준석에게 넘어갔다.

투우욱!

신준석의 선택은 데이빗이었다.

피르미노와 루카스가 다시 데이빗에게 달려들 때,

투욱!

데이빗은 박상민에게 공을 차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