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기를. (1)
주말에 경기가 있어서 박용근은 월요일인 오늘 쉬었다.
정지우가 동기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정렬의 부친과 모친이 이미 와 있었다. 박용근의 덤덤한 표정과 달리 이정렬의 부모는 편치 않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정지우부터 박상민, 신준석이 인사했고, 소파에 함께 앉았다.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색하고, 뻑뻑한 만남이었다.
이정렬이 가장 힘들 거다.
돕고 싶었다. 녀석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도록.
화제를 바꿀 겸, 하고 싶었던 말을 할 겸 해서 정지우는 박용근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감독님.”
박용근은 시선만 들었다.
정지우는 어제 경기에서 보았던 관중들의 모습, 그리고 오늘 병원에서 만났었던 브레드의 이야기를 덤덤한 목소리로 먼저 전했다.
“저는 잘 모르지만, 팬들이 주는 성원이 부모님이 주는 애정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감독님과 어머니가 제게 보여 주신 애정 같은 느낌이요.”
전은주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정지우를 보는 앞이었다.
“감독님, 저 월드컵 나가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박용근은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고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알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혹시 박용근을 위해 저러는 건 아닌지, 정지우가 진심으로 나가고 싶은 건지, 혹은 말대로 월드컵에 나갔다가 상처받지는 않을지에 대해서.
“감독님, 저 진심으로 월드컵에 나가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진심이냐?”
“예. 저를 응원해 주는 분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박용근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전은주를 찾았다.
“여보? 우리 맥주 있나?”
“몇 병 있을 거야.”
전은주와 정지우, 박상민이 움직여서 맥주 4병과 사람 수만큼의 잔을 가져왔다. 당연하게 다들 잔을 앞에 두었고, 맥주를 따랐다.
“아버님, 월드컵에 나가 볼 생각입니다. 협회나 우리 축구 팬, 국민들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가능하다면 여기 이 녀석들 데리고 가 보겠습니다. 앞에 있었던 일 모두 이 잔에 털고 앞으로 정렬이 지켜봐 주십시오.”
박용근이 이정렬의 부친을 챙겨 준다는 것쯤 대강 알아챌 나이들은 되는 거다. 그래서인지 이정렬의 부친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정렬을 슬쩍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뭔가 긴 이야기를 할 듯했던 그가 짧은 인사를 전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합류하게 될 선수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대한민국 축구를 위해 헌신과 노력을 부탁하마. 자! 그런 의미로 건배하자!”
박용근이 잔을 내밀었고, 다들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고작 맥주 한 잔이다.
그런데 그 한 잔을 마신 뒤에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확실히 풀렸다.
사흘 뒤에 FA컵 예선이 있었고, 상대는 토트넘이었다.
골키퍼는 얀센이, 그 외의 포지션에는 그동안 기회를 얻지 못했던 선수들이 나섰다.
서브 골키퍼인 정지우가 지켜보는 앞에서 유니온 시티는 0 대 1로 패했다. 그러나 동료들의 플레이는 놀라웠다.
프리미어리그 선두라는 자부심, 그동안 주전 선수들이 보여 주었던 악착같은 플레이와 헌신들이 자연스레 서브 선수들에게 전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나 얀센의 선방이 가장 눈에 띄었다.
마틴은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이전 FA컵 경기에서 정지우가 불을 지르더니, 이제는 얀센마저 상상하지 못했던 선방을 보인 거였다.
경기 막판에 나온 실점은 사실 얀센이 못했다기보다는 행운이 토트넘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유니온 시티는 1.5군인 데 반해, 토트넘은 주축 선수들이 모두 나선 경기에서 나온 0 대 1 패배라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비록 패배했고, FA컵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관중들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경기를 마친 선수들을 격려해 주었다.
박용근은 FA컵 전에 김문호와 여러 차례 전화를 나눴다.
[고맙다! 박 감독! 정말 큰 결심 한 거야! 지우가 물건이다! 천하의 박용근이 이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
김문호의 말에 박용근은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내가 이쪽에서 발표할까? 아니면 자네가 협회에서 발표해 줄래?”
[박 감독, 내가 영국으로 갈 거야. 이곳에서 자네를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발한다고 발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뒤에서 속닥거린 것으로 보일 염려가 있어.]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있어?”
김문호의 뜻은 안다. 그러나 박용근은 어쩐지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 내키지는 않았다.
[사람 생각이 어디 다 같나? 우리가 박 감독의 결단을 요청하러 가는 거라고 발표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래야 다른 말이 그나마 줄어들어. 내가 대놓고 졸랐고, 자네가 결단을 내린 거! 알겠지?]
“자네가 곤란해지지 않겠어?”
[나더러 안 간다고 난리야, 이 사람아! 장진모 기자가 분위기 잡아 준 게 워낙 좋았어. 내가 영국에 안 가는 게 자네를 시샘해서 그런다는 소리까지 나와.]
“서운하지 않아? 자네도 욕심이 있을 거 아냐?”
김문호가 픽 하고 웃었다.
[난 예선 통과한 거로 충분해. 내 능력은 거기까지야. 부탁한다, 박 감독. 지난번 예선전처럼 피 끓는 축구 한번 다시 보여 줘.]
박용근의 나직한 웃음이 답이 되었다.
1월 24일 일요일에 스토크 시티를 불러들인 유니온 시티는 또다시 3 대 0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났을 때, 영국 언론에 정지우의 기사가 커다랗게 실렸다.
‘유니온 시티의 키퍼와 그의 동료들. 홈 관중을 감동시키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브레드를 병문안 간 정지우와 동료들의 사진이 실렸고, 병원에 가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정지우를 본 뒤에 브레드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릴리의 이야기를 참고로 넣었고, 병원에서 찍은 사진은 브레드의 동료들이 전화기로 찍은 사진이라는 부연 설명까지 넣었다.
마지막 내용이 압권이었다.
<‘브레드, 혹시 우리 팀의 우승에 베팅했어요?’라고 질문했던 Ji가 퉁퉁 부어 있는 브레드의 손을 잡고 다음같이 말했다고 한다. ‘꼭 가지고 있어요. 날 믿구요.’
Ji의 선방이 그들의 응원단에게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다른 어떤 선수보다 관중들을 존중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의 나라 한국에서 월드컵 대표팀에 그를 원하는 이유 역시 단순히 실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골키퍼와 그의 동료들에게서 프로 선수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모습을 배운 것과 같다.>
기사는 곧바로 한국에도 올라왔다.
댓글 반응은 어마어마했다.
대개는 김문호가 서둘러 박용근을 찾아가서 그에게 국가대표팀을 맡겨야 한다는 쪽이었다.
1월 30일에 FA컵 경기 일정이 잡혀 있어서 2월 3일까지 여유가 있었다.
그사이를 이용해 김문호와 송인수가 박용근을 찾아 영국으로 날아왔다. 엄청난 숫자의 한국 기자들이 함께 움직였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외국 기자들이 박용근과 김문호의 면담 결과를 기다렸다.
특히나 본선에 진출한 나라들, 그중에서도 아시아 국가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김문호와 송인수가 묵는 호텔의 객실이었다. 박용근과 김문호, 송인수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발표하실 시간입니다.”
“그럴까요?”
“그런데 이 발표문 누가 만들었습니까?”
“제가 적었습니다.”
“그렇군요. 자, 그럼 나가시죠?”
답을 한 송인수가 몸을 일으켰고, 박용근과 김문호가 뒤를 따랐다.
그리 크지 않은 호텔이다.
기자회견장을 따로 만들기 어려운 규모라 식당 일부를 임시로 바꾸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촤자자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자작!
세 사람에게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가 달려들었다.
중간중간에 자리 잡은 방송용 카메라, 그리고 주변을 가득 메운 기자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박용근 감독에게 우리 축구 팬들의 요구와 협회의 의지를 분명하게 설명했고, 월드컵 본선에서의 헌신을 당부했습니다. 결과는 박용근 감독이 직접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송인수의 설명 이후에 A4용지를 손에 든 박용근이 기자들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먼저 부족한 저를 기대해 주신 축구 팬들과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김문호 위원과 송인수 위원에게서 우리 축구의 현실을 분명하게 들었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제안받았습니다.”
촤자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자자작!
박용근이 A4용지를 들여다보자 또다시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저는 감사하고 송구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월드컵 본선 경기를 마칠 때까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겠습니다.”
촤자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작!
통역을 통해 발표를 전해 들은 외국 기자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박용근을 보았다.
“부족한 능력이나마 우리 축구에 도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용근의 발표가 끝나자 사방에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월드컵 본선까지라고 하셨는데 다른 조건도 있나요?”
“선수 선발에 관한 전권을 받았습니다.”
“박 감독님! 정지우 선수나 유니온 시티의 우리 선수들을 선발하실 건가요?”
“빠른 시일 내에 여기 계신 두 분의 도움을 받아 명단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진 몇 개의 질문에 답을 한 박용근이 자리에서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기자회견이 끝났다.
발표회장에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장진모는 여유만만이었다.
박용근과의 단독 인터뷰 약속이 있었고, 그 뒤로 정지우와 박상민, 이정렬, 신준석과의 인터뷰 약속도 잡아 두었기 때문이다.
2월 3일에 유니온 시티는 레드 블레이트에서 리버풀을 맞았다. FA컵 일정이 중간에 있어서 한국에서는 수요일 새벽 4시 45분에 중계됐다.
솔직히 시청률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박용근의 소식 때문인지 반응은 뜨거웠다.
쿵. 쿵. 쿵. 쿵. 쿵. 쿵.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팀! 절대 지는 법이 없지!”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의 응원가가 먼저 나왔고, 이어서 리버풀의 그 유명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이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웠다.
강한 남자들의 팀이 맞붙는 대결이었다.
경기에 나서기 전, 라커룸의 분위기는 단단했다.
FA컵 경기에서 1.5군이 보여 주었던 멋진 플레이에 자극받은 덕분이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틴이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리버풀이다. 이어서 우리는 우리의 우승을 막기 위해 기다리는 맨시티와 아스널을 연달아 상대해야 한다.”
마틴이 버릇처럼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중반을 넘었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우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될 것이고, 무패 우승을 만들어 내는 초석이 되는 거다.”
마틴이 검지로 라커룸 천장을 가리켰다.
“오늘 경기가 끝났을 때, 레드 블레이트에서 리버풀의 응원가가 들리지 않게 만들어 주길 바란다. 병원에 있는 우리의 영원한 관중 미스터 브레드를 위해서라도.”
말을 마친 그가 정지우를 바라보고는 라커룸을 나섰다.
감독이 다지고 나간 다음이라, 이럴 때 선수들끼리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눈빛을 나누며 각오를 다지는 정도로 충분한 거였다.
벨이 울렸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통로로 나섰다.
FA컵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상대하기 두려웠었던 팀, 리버풀이 지금은 유니온 시티의 무패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드는 팀이 되었다.
처음엔 정지우만 힐끔거리던 상대 팀 선수들이 지금은 박상민, 이정렬, 레믹을 살핀다.
정지우는 통로의 입구를 향해 서서 에스코트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 네 명이 모두 선발입니다. 박용근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맡게 되어서 저 네 명에게 거는 기대가 한결 커졌습니다. 부상 조심하고 이대로 실력을 키워 나갔으면 싶습니다.』
『리버풀! 4-5-1의 포메이션입니다. 프리미어리그 팀 전체가 유니온 시티를 상대하기 위해 4-5-1 포메이션을 함께 발전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리버풀이 어떤 경기 운영을 보여 주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우선 예상할 수 있는 것이 20번 랄라나가 박상민을 밀착 마크하는 것 정도가 되겠구요, 중앙을 단단하게 한 뒤에 역습 위주로 공격을 전개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동전 던지기에서 리버풀이 공을 택했다.
정지우는 바로 벤치를 바라보고 왼편 진영을 선택했고, 곧바로 골대를 걸었다. 그러고는 골포스트를 발로 확인했고, 중앙으로 나와서 크로스바를 건드렸다.
투우욱!
“예에에에에에-!”
처음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다음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았는데, 지금은 상대 팀 선수들과 주심까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삐이익!
주심의 휘슬로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