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그동안의 성적으로 다 증명했잖아! (2)
쿵. 쿵. 쿵. 쿵. 쿵. 쿵.
“Wild Sang!”
또다시 박상민의 응원가가 빌라 파크에 울려 퍼졌다.
세 골을 잃은 애스턴 빌라는 25번 카를레스 길을 빼고 39번 제스테트를 새롭게 투입했지만, 그는 경기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역시나 유니온 시티가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경기였다.
후반에도 정지우는 달랑 두 번 공을 만졌다.
애스턴 빌라가 높다랗게 찬 공을 달려가서 받은 게 한 번, 그리고 중거리 슛인지 센터링인지 모를 아예우의 킥을 그대로 가슴에 안은 거 한 번.
쿵. 쿵. 쿵. 쿵. 쿵.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이! 굿바이!”
잔인한 응원가가 빌라 파크에 울려 퍼졌다.
홈 관중들과 선수들에게 더없는 모욕이 될 테지만, 이것이 영국 축구고, 이런 응원이 영국 리그다. 저런 응원가가 싫다면 이기면 된다. 거칠게 달려들든, 테크닉을 발휘하든, 상대 팀보다 골을 많이 넣으면 되는 거다.
삑! 삑! 삐이익!
“예에에에에에-!”
마침내 경기가 3 대 0으로 끝났다.
정지우는 먼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고, 다음으로 주변에 있던 애스턴 빌라 선수들과 가볍게 손을 맞잡은 뒤에 벤치로 향했다.
속된 표현으로 동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거저먹은 경기였다.
흡족한 표정의 마틴, 이런 일방적인 승리가 감격 그 자체인 팀 닥터 스미스, 그리고 이제는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태프들.
모두 함께 벤치 앞에서 원정 관중들을 향해 박수로 감사함을 전했다.
라커룸에서 샤워를 마친 정지우가 통로를 빠져나와 버스로 향할 때였다.
“Ji! Ji!”
익숙한 고함이 바리케이드 바깥에서 들려왔다.
시선을 돌린 앞에서 빌의 아버지 토미가 있었다.
그는 자꾸만 오른손을 귀와 입에 올렸다. 얼핏 보기에 전화를 해 달라는 의미처럼 보였다.
통로에서 개별 행동을 하는 건 금지된 사항이었다. 정지우는 확실하게 시선을 준 후에 버스에 올랐다.
경기가 끝난 시간이 밤 9시였고, 버스에 오른 시간은 이미 10시 30분이었으며, 집에 도착하자 얼추 자정이었다.
토미의 번호를 찾은 정지우는 잠시 고민했다.
전화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는데, 반대로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간절해 보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뭐, 해 달라고 한 거니까.
마음을 정한 정지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이 세 번쯤 울린 다음이었다.
[Ji?]
분명하게 전화를 기다린 음성이었다.
“맞아요. 토미, Ji예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전에 우리 집에서 동료들을 만난 적이 있잖아.]
토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중 브레드란 친구가 있었거든. 그 친구가 금요일 작업 도중에 사고가 있었어.]
“저런! 안 된 일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그 친구를 한번 찾아봐 줄 수 있을까?]
뜻밖의 부탁이어서 정지우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알아. 경기 일정이 빡빡한 거랑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는 거, 그리고 이런 부탁이 Ji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도.]
“토미! 그런 건 아니구요. 병문안을 말하는 거죠?”
[미안해, Ji. 그 친구의 상태가 심각해. 그런데 그의 바람이 Ji를 다시 한 번 보는 거라서. 동료들이 구단에 문의했더니 개인적인 청을 들어주기는 곤란하다고 하고…….]
정지우는 잠시 일정을 생각했다.
사흘 뒤의 FA컵에는 분명 얀센이 선발이라고 들었다.
“병원은요?”
[성 마테오 병원.]
뜻밖에도 데이지가 있는 병원이었다.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이 정도라면 그다지 크게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내일 오전에 회복 훈련이 있어요. 그거 끝나고 들를게요. 대략 오후 2시쯤 될 거예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토미가 느닷없이 소리치듯 말하는 바람에 정지우는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빌은 잘 지내요? 샌디는요?”
[우린 잘 지내! 그리고 유니온 시티의 경기가 있는 곳에 항상 있고.]
몇 마디 안부를 전한 정지우는 전화를 끊었다.
이정렬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처음엔 잘 모르겠더니 요즘은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것이 힘겨운 일이 됐다. 솔직히 정지우에게 함께 지내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볼까도 싶었다. 정지우와 박상민만 사는 거라면 묻지도 않고 그리 들어갔을 거다. 그러나 결국은 전은주가 이정렬을 챙기는 꼴이 된다.
유정호와 신윤희 사이에서 불편해하는 신준석을 꼬드겨서 함께 지내볼까 싶기도 했다.
집으로 올라간 이정렬은 키를 찾아 문을 열었다. 그러곤 놀란 얼굴로 좁은 거실을 바라보았다.
“이제 오냐?”
부친과 모친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셨어요?”
이정렬은 불편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움직였다.
“이놈아! 몇 달 만에, 그것도 한국에서 온 아버지를 보고 고작 그 인사 하나 하고 들어가?”
“아버지, 저요…….”
“나도 다른 말 안 해! 네가 옳다는 거, 그동안의 성적으로 다 증명했잖아! 그렇다고 아비를 아예 안 볼래? 전화 한 통 없이 그렇게 살 거야?”
이정렬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꾸 없이 서 있었다.
“후우.”
그의 부친이 대놓고 한숨을 내쉴 때였다.
“정렬아.”
식탁으로 움직였던 그의 모친이 한약이 담긴 듯한 잔을 건네주었다.
“다른 생각 말고 오늘은 푹 자. 아버지랑 엄마, 한 열흘 있다가 갈게. 그리고 내일은…….”
이정렬의 모친이 흘깃 소파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독님께 가서 인사도 드리마. 얼른 마셔. 경기 끝난 날이니까 우선 자. 응?”
“아버지, 저 정말 다른 곳에 이적 같은 거 안 해요.”
이정렬의 말이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부친이 볼을 씰룩이며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이정렬은 한약을 쭉 들이켜고는 ‘저 들어가요.’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자식 놈 완전히 잃었나 보다.”
“다 큰 애잖아! 당신이 잘못한 거 알겠다면서? 사과한다면서? 그런데 왜 애한테 자꾸 뭐라고 해! 왜!”
모친의 사나운 대꾸를 마지막으로 대화가 끝났다.
방으로 들어간 박상민은 책상에 두었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30분 전까지 전화가 3통이나 왔었다.
부친의 몸이 불편한 탓에 이런 시간에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른 박상민이 얼른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잠시 뒤였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 상민이요!”
[그래! 상민아! 우리 축구 봤다.]
“무슨 일 있어요? 거기 지금 새벽 아니에요?”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셔서.]
전화기 너머에서 ‘여기요. 상민이요.’ 하는 음성이 들렸다.
[상민이냐?]
“예, 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지. 네 덕분에 매일매일 호강이다.]
박상민은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피곤할 테니까 얼른 말하고 끊자.]
“괜찮아요! 아버지! 혹시 필요한 거나 불편한 거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
박상민의 부친은 반 박자쯤 뜸을 들인 뒤에 말을 건넸다.
[오늘 세 골 넣은 거 말이다. 네가 잘하긴 했다만, 혹시 잊고 있었다면 내일이라도 꼭 감독님께 고맙다는 인사 드려라. 지우에게도 인사하고. 이 말 하려고 전화했었다.]
“예. 그럴게요, 아버지.”
박상민은 쑥스럽고 민망한 얼굴로 책상을 보았다.
아버지는 늘 이런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해트트릭을 보고 자랑스러워서 전화했다고 해도 되는데 꼭 적당한 핑계를 대고 딴소리를 한다.
하여간 아버지와 아들은 이런 모양이었다. 마음은 있는데 이상하게 전화기를 들면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그럼 피곤할 테니까 얼른 자.]
“예. 아버지도 쉬세요.”
느닷없이 인사가 오간 뒤에 전화가 끊겼다.
다음 날, 회복 훈련과 개인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최근 워낙 빠르게 스태프들이 늘고 있어서 낯선 인물들이 자주 보였다.
“점심 먹고 병원에 들렀다 갈게.”
“야! 단체 미팅 좀 하자니까!”
“그런 거 아냐.”
“아니기는!”
짓궂은 표정으로 달려드는 신준석에게 토미와의 전화 내용을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같이 가자. 어차피 우리도 집에 가서 당장 할 일도 없고.”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나섰고,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이정렬이다. 당연하게 셋이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아버지랑 어머니 오셨어.”
이정렬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았다. 병원 들렀다가 인사드리러 갈게.”
“그러지 마. 오늘 감독님께 인사드리러 가신다니까 그때 뵈면 되지.”
이정렬의 심정을 대강은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먼저 인사드리는 게 맞아. 병원에서 우선 집에 들렀다가 바로 건너갈게. 정렬아.”
정지우가 말끝에 불렀고, 이정렬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미안한 표현인데, 계실 때 잘해. 이적 문제로 아버지도 감독님이나 우리 보기 부끄러우실 텐데 오신 거잖아. 너 보고 싶으셔서 그런 거 아냐? 이제 와서 이적하라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옳다는 건 성적으로 증명됐다고 하시긴 하던데…….”
“그럼 됐잖아.”
밥그릇으로 시선을 떨구는 이정렬의 등을 박상민이 툭툭 다독였다.
“아버지들이 원래 그러시잖냐. 기운 내라.”
뭔가 더 말하고 싶은데 표현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박상민의 격려를 보았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월요일이다.
그런데도 성 마테오 병원에 들어섰을 때 토미와 동료들 열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Ji?”
그들은 정지우를 보고 감격했고, 함께 온 박상민과 신준석을 보고 놀라는 얼굴이었다.
“우선 병실로 가죠.”
“고마워. 이쪽이야.”
우르르 3층으로 올라갔다.
릴리가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병문안을 위해 성 마테오 병원을 찾았다.
착잡한 마음으로 병실 앞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복도에서 안을 들여다보자 부인인 듯한 덩치 커다란 여자가 먼저 움직였다. 전은주 나이쯤 돼 보였다.
“고마워요.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정지우는 말없이 그녀를 안고 다독였다.
“Sang하고 Jun은 알죠?”
정지우의 소개에 박상민과 신준석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고, 넷이서 함께 병실로 들어섰다.
“7미터 난간에서 떨어졌어.”
머리와 가슴, 다리 한쪽을 붕대로 칭칭 감은 환자 앞에서 그의 부인이 나직하게 건넨 설명이었다.
힘겹게 눈을 뜬 브레드가 정지우와 동기들을 보고는 확인하는 것처럼 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브레드, 이쪽은 Sang, 그리고 여긴 Jun.”
“알아, Ji. 나, 두 사람이 어떻게 영국으로 오게 되었는지도 다 알아.”
갈라진 음성을 타고 답이 건너왔다.
“우리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 레드 블레이트에 들렀었어. 내가 다섯 살 때. 그때부터 내 바람은 늘 프리미어 선두를 달리는 유니온 시티였거든. 우리 집사람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Ji 덕분이야.”
“난 그냥 팀원 중 한 명인 거예요. 동료들이 잘해 줬고, 또 멋진 응원을 펼쳐 주는 응원단이 있어서 더 힘을 낼 수 있었구요.”
“그렇지 않아. Ji가 활약하고 나서 우리 팀에 전에 없던 열정과 투지가 생겼잖아. 그걸 우리 모두 알아.”
통증이 계속 몰려오는 모양인데도 브레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Ji, 최소한 이번 시즌만이라도 우리 팀을 지켜 줘. 그런 다음에는 당신이 어딜 가든 평생 응원할게.”
“브리스톨 시티로 가도요?”
“오우! Ji! 그건 절대 안 되지!”
유니온 시티의 영원한 앙숙, 철강 라이벌 브리스톨 시티의 이름이 나오자, 브레드가 놀라고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겉모습은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워 보이는데도 말이다.
박상민과 신준석은 물론이고, 그의 부인마저 웃을 정도였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무엇이 이들에게 이런 응원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브레드는 정지우를 보며 희망을 얻고 싶은 모양이었다.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에서도 그의 마지막 바람은 정지우가 유니온 시티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브레드, 혹시 우리 팀의 우승에 베팅했어요?”
“물론이지. 우리는 나와 에밀리가 각각 했어.”
정지우는 퉁퉁 부어 있는 브레드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꼭 가지고 있어요. 날 믿구요.”
“오오-!”
박용근의 나이쯤 돼 보이는 남자가 바보처럼 눈물을 달았다. 그에게는 상금보다 정지우가 장담하는 우승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