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32화 (232/262)

제5장. 믿음과 신뢰,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3)

큰 스코어 차로 진 경기나 엉망인 경기에 실망할 수는 있지만, 언제고 응원을 멈추지 않는 관중들이다.

하얗게 센 머리칼과 두툼한 안경, 주름이 가득한 노부부가 보내 주는 박수를 보며 정지우는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대로 유니온 시티가 주저앉는다면 지금의 기록은 달콤했던 한때의 추억이 될 것이고, 다음 시즌에도 지금처럼 상위권을 유지한다면 전설의 시작으로 기록될 거다.

‘정지우 선수, 난 늘, 언제나, 그리고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응원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지우의 귓가에 호프집 사장의 음성이 맴돌았다.

유니온 시티의 경기와 굳이 핑계를 대자면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예선전이 전부인데도, 그와 그 가게에 있던 이들은 진심으로 정지우를 응원해 주고 있었다.

국가대표팀 감독을 원했던 박용근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이 바로 그런 이들을 감동시킬 승리를 만들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경기가 늦게 끝난 데다 힘겨운 경기여서 정지우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장진모는 연달아 또 다른 기사를 올렸다.

그는 본선에 진출한 우리나라 팀의 경쟁력을 사회부 기자답게 냉철하게 평가했고, 더 늦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주말에 정지우와 동기들, 유니온 시티의 동료들이 출연한 무리한 도전이 방송되었다.

사흘 걸러 경기가 연속된다.

토트넘과의 경기가 끝난 이틀 뒤가 토요일, 그리고 다음 날은 애스턴 빌라와의 경기가 잡혀 있었다.

박용근은 토요일 점심 무렵, 김문호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지우가 동료들을 부른 게 신의 한 수야.]

“무슨 소리야?”

[동료들이 한 말과 게임 설명을 영어로 한 거. 매력 터졌다고 방송 나오고 또 난리도 아니야. 인터넷에 박 감독에게 국가대표팀을 맡겨야 한다고 서명하는 곳도 생겼어.]

박용근은 방문을 향해 슬쩍 시선을 주었다. 점심 준비를 돕느라고 정지우와 박상민이 식탁에 있었다.

“김 감독, 자네 뜻은 알겠어. 외국인 감독들의 입장이나 우리 축구의 위기도 분명히 알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경기들을 연속해서 감당해야 하는 아이들이 흔들릴 수도 있어.”

[알지! 그걸 왜 몰라? 그런데 지금도 늦었다, 박 감독. 할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결정해서 분위기를 잡는 게 중요해.]

김문호의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박용근이 빨리 결정할수록 제자들 역시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거였다. 솔직히 정지우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남은 세 제자는 잠시라도 흔들릴 수 있었다.

“알았어. 주말 경기 치르고 마음 정해서 전화하지. 일정이 꼬여서 경기가 몰려 있거든. 마음 못 잡았다가 자칫 부상이라도 생길까 봐 그것도 염려돼.”

[흠.]

아쉬움이 묻은 김문호의 숨소리 이후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에 통화가 끝났다.

“여보! 점심!”

전은주의 음성이 먼저 들렸고,

“감독님! 점심 드세요!”

정지우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자식 같다. 전은주가 낳지 않았지만, 정지우는 정말 쑥쑥 커 가는 아들놈 같다.

박용근은 입가에 올라온 웃음을 감추며 식탁으로 움직였다.

“뭐야?”

“지우랑 상민이가 비볐어. 얘들은 왜 이렇게 비비는 걸 좋아하나 몰라.”

“어머니? 모르셨어요? 감독님께서도 좋아하세요?”

정지우의 말에 전은주가 ‘당신이?’ 하는 시선을 던졌다.

“합숙 때면 감독님이 하루에 한 번은 비비라고 시키셨는데요? 저희는 그래서 버릇 든 거고요.”

“얼른 먹자!”

박용근이 식탁에 앉으며 식사가 시작됐다.

“한국에 방송 나왔다던데 소식 들었냐?”

“상민이가 이따가 다운받기로 했어요.”

“그래? 상민아, 나도 꼭 보여 줘?”

“예, 어머니.”

일요일 경기가 현재 리그 최약체인 애스턴 빌라와의 경기라 전날인데도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이상하게 안 되는 시즌이 있다.

그럴 때면 무슨 짓을 해도 팀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고, 잘해 보자고 달려든 직후에 꼭 골을 먹거나 심지어 자살골이 나오기도 한다.

애스턴 빌라의 현재 승점은 11점이었다.

막말로 강등권 기차에 한 발 올린 것과 다름없어서 남은 경기를 전승으로 이끌지 않는 한, 리그에 남기는 쉽지 않은 처지였다.

저녁을 먹었고, 경기에 관해 몇 마디 의논을 나눈 뒤 잠자리에 들었다.

잉글랜드 버밍엄의 빌라 파크에서 벌어진 원정 경기였다.

FA컵을 버리고 리그 경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유니온 시티는 리그 최하위 팀을 상대로 나름 최상의 스쿼드를 내세웠다.

리그 최하위를 상대로는 반드시 승점 3을 거머쥐어야 한다.

다른 팀들도 애스턴 빌라에게서는 승점을 챙겨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승점들이 모여서 여유를 만들어 주는 거다.

『애스턴 빌라! 오늘 4-3-3의 포메이션입니다!』

『이번 시즌 애스턴 빌라, 처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승리한 경기가 단 세 경기입니다. 득점은 7점이구요, 실점은 벌써 33점이나 됩니다.』

『이 정도면 다른 팀에게 득점 자판기라고 불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전에 QPR이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1승도 거두지 못했던 기록이 있는데, 이번 시즌 애스턴 빌라가 그 기록을 넘보고 있습니다.』

캐스터의 말에 해설자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섰다.

『유니온 시티, 우리 선수 네 명이 모두 선발입니다. 부상에서 돌아온 꼼빠니가 왼쪽 공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사흘 뒤에 토트넘과 FA컵 경기가 있거든요. 유니온 시티는 리그에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이네요.』

양쪽 포스트를 발로 확인한 정지우가 중앙에서 훌쩍 점프해서 크로스바를 건드렸다.

“예에에에에에-!”

『정지우! 오늘도 어김없이 경기 시작 전에 골대를 터치했습니다.』

정지우가 몸을 돌려 경기장을 둘러볼 때 주심이 휘슬을 기다랗게 불었다.

애스턴 빌라의 선공이었다.

짧은 두 번의 패스가 애스턴 빌라의 진영에서 돌았다.

강팀일수록 선수들의 볼 간수 능력이 뛰어나다.

슈팅인가 싶을 정도로 강한 패스, 그런 패스를 멋지게 발아래 잡아 두고 상대 팀 선수를 따돌리는 동작, 손으로 주고받는 것보다 빠르게 연속되는 짧은 패스.

그런데 애스턴 빌라는 짧은 패스 두 번 이후에 어디로 공을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느낌이었다.

레믹과 이정렬이 코자크와 아예우에게 달려들자 공은 아예 애스턴 빌라의 골키퍼 번에게 날아갔다.

『4-3-3은 딱히 공격수를 내세우지 않는 제로톱 방식이거든요. 수비에 집중해서 실점을 막고, 기회를 봐서 앞의 세 명 중 한 명이 원톱의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건데요.』

“우-!”

애스턴 빌라의 골키퍼 번이 레믹을 겨우 피해 공을 빼내자 아쉬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레믹, 부지런히 뜁니다!』

『박상민 선수의 영향일까요? 이정렬과 레믹 선수가 활동량이 부쩍 늘었거든요. 그 덕분에 유니온 시티는 전방 압박이 엄청난 팀이 되었습니다. 상대 팀의 공격을 앞 선에서 막아 주거든요.』

애스턴 빌라는 척 보기에도 길을 잃은 팀처럼 보였다.

그라운드는 절대 좁지 않고, 그 어떤 선수도 공보다 빠를 수는 없다. 선수들이 포메이션을 유지하며 패스만 잘 연결해도 충분히 안정을 찾을 텐데, 애스턴 빌라는 패스의 연결이 영 시원치 않았다.

결국 레믹과 카알에게 밀린 수비수 시소코가 기다랗게 차 낸 공이 터치라인 바깥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신준석이 공을 받아서 터치라인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휘익!

녀석의 선택은 데이빗이었다.

데이빗은 공을 받아서 박상민에게 연결했고, 박상민은 바로 꼼빠니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꼼빠니! 다시 박상민에게! 박상민! 라파엘! 다시 박상민!』

『공을 저렇게 돌리는데도 애스턴 빌라가 넘어오질 않네요! 승리보다는 무승부를 통해서라도 승점 1점을 확보하겠다는 절박함이 애스턴 빌라의 경기에 확실히 보입니다!』

박상민을 중심으로 공이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한순간,

투우우욱!

박상민이 애스턴 빌라의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을 향해 공을 길게 찔러 넣었다.

“예에-!”

공은 카알이 잡았다.

그가 빠르게 페널티 에어리어로 방향을 틀 때였다.

콰아아악!

43번 시소코가 양발을 들어 카알의 발을 비트는 거친 태클을 날렸다.

“아악!”

삐이이익!

커다란 함성 속에서 카알의 비명이 분명하게 들렸다.

『주심!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시소코가 양손을 들어 억울함을 호소했고, 동료들이 주심에게 달려갔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파울이었다.

『큰 부상이 아니길 바랍니다.』

『발바닥을 들고 달려들었어요. 어떡해서든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저런 위치에서 프리킥을 준 데다 경고까지 받아서 손해가 훨씬 더 많은 파울입니다.』

팀 닥터 스미스가 카알을 부축해서 그라운드 바깥으로 나갔다. 키커는 꼼빠니였다. 그가 파울 위치에 공을 내려놓자 주심이 성큼성큼 걸어서 수비가 설 위치를 지정해 주었다.

『좋은 위치에서 유니온 시티의 프리킥입니다.』

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애스턴 빌라 선수들은 악에 받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거칠게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게 달려들었다.

양 팀 선수들이 뒤엉킨 순간이었다.

삑! 삑!

주심이 휘슬을 불어 레믹과 중앙 수비수 오코레를 불렀다.

그는 양손 검지를 들어 바깥으로 벌리는 동작으로 더 이상 거친 몸싸움을 하지 말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다고 몸싸움을 안 하면 여기는 영국이 아닌 거다.

공격수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기회를 노렸고, 수비수들이 그들을 붙잡고 매달렸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길게 울린 다음이었다.

퍼어어엉!

꼼빠니가 부드럽게 휘어 들어가는 킥을 날렸다.

양 팀 선수들이 뒤엉킨 채 공을 따라 움직였고, 기회를 잡은 것은 이정렬이었다.

휘이익! 터어엉!

그러나 이정렬의 머리에 맞은 공은 크로스바를 훌쩍 넘어 바깥으로 나갔다.

이정렬은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점프를 위해 달리는 녀석의 상의를 잡아당긴 것이 레믹이었기 때문이다.

레믹은 미안하고, 이정렬은 아쉬운 장면이었다.

뒤엉킨 상태였다.

레믹은 앞에 있던 선수가 애스턴 빌라의 선수라고 생각해서 상의를 당긴 것일 텐데, 하필이면 공을 제대로 노린 이정렬인 거였다.

『카메라가 레믹을 비춰 줍니다! 이정렬의 상의를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훨씬 좋은 헤더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쉽게 뛰어올랐을 테고, 좀 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공을 보내긴 했을 것 같네요.』

비록 실패했지만, 이정렬의 헤더는 유니온 시티의 공격에 분명하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박상민! 길게 찔러 준 공! 레믹!』

『걸렸어요! 쏴야죠!』

퍼어엉!

“우-!”

『레믹의 슈팅! 애스턴 빌라의 홈구장 빌라 파크의 크로스바를 스치고 나갑니다! 아무래도 또 색이 벗겨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후로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박상민은 이 경기에서 완벽하게 빛나는 선수였다.

중앙에서 수비수 사이로 찔러 주는 패스, 왼쪽에서 봤는데 어느새 오른쪽에서 공을 몰고 있었고, 고개 한 번 돌리고 나면 중앙에서 레믹과 2 대 1 패스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라운드에 박상민이 다섯 명쯤 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애스턴 빌라가 박상민을 저대로 두면 정말 힘겨운 경기가 될 것 같네요! 워낙 활동량이 많은 선수기도 했지만, 오늘은 아예 최고입니다!』

해설자의 설명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이정렬이 찔러 준 공을 레믹이 오른쪽으로 흘렸고, 공을 잡은 카알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을 향해 툭 하고 찔러 넣었다.

“예에에-!”

박상민이었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가장 유심히 살피는 정지우마저도 언제 또 저기 갔었지 싶을 정도였다.

툭툭!

박상민은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곧바로 달려들었다.

레믹, 이정렬, 그리고 꼼빠니가 공을 받기 위해 뛰어들어서 애스턴 빌라의 수비수들이 순간적으로 그 3명에게 쏠렸다.

박상민은 오른발잡이다.

거기에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해 치고 달린다.

애스턴 빌라의 수비수들은 박상민의 오른발 각을 막아 놓고 달려들지 않았다.

‘패스하지 마! 그냥 바깥으로라도 차!’

어설프게 패스하려다간 공을 빼앗기기 좋았다.

정지우가 노려보는 앞에서 박상민이 느닷없이 왼발로 슈팅을 날렸다.

‘상민아?’

역동작이었다.

퍼어엉!

중심을 잃은 녀석이 옆으로 그라운드를 한 바퀴 구를 때, 공은 골대 구석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화아아악!

놀란 애스턴 빌라의 골키퍼가 몸을 날렸다.

그러나 수비수에 가려서 제대로 못 본 데다, 골포스트를 스칠 정도로 방향이 좋았다.

퉁퉁 튕기며 굴러간 공이 거짓말처럼 골키퍼 번의 손을 스치고 그대로 골대로 굴러 들어갔다.

“예에에에에에에-!”

벌떡 일어난 박상민이 정말 골이 맞나 하는 것처럼 골대를 향해 목을 빼서 확인한 뒤에, 양팔을 벌린 자세로 홈 관중들 앞으로 달려 나갔다.

레믹과 이정렬, 꼼빠니가 뛰어가 그의 머리를 감쌌고, 데이빗과 수비수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일제히 달려갔다.

『전반 내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박상민! 애스턴 빌라가 꽉 움켜쥐고 있던 승점 1점을 끝내 뺏어 냅니다!』

애스턴 빌라의 감독 대행이 양손에 얼굴을 묻는 장면이 화면에 가득 올라왔다.

『오른발잡이거든요. 수비수들이 박상민 선수의 오른발만 주시하며 각도를 잡았구요, 거기에 박상민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리고 있어서 순간 방심한 것도 있었어요! 박상민! 왼발로 골을 만들어 냈어요! 정말 칭찬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박상민! 아버님이 자랑할 만한 아들입니다!』

슈팅을 날린 박상민이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해 옆으로 구른 뒤,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느린 그림으로 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