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31화 (231/262)

제5장. 믿음과 신뢰,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2)

이틀 동안 박용근은 리저브 팀을 지도하며 지냈고, 정지우와 동기들은 토트넘전에 대비한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토트넘과의 경기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오전 훈련을 마친 정지우가 점심을 먹을 무렵, 장진모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에이미를 통해 출입증을 얻은 그는 당당하게 식판에 음식을 쌓아서 정지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걸 다 드실 수 있어요?”

“왜 그래요? 나, 한 번 더 먹을 겁니다.”

정지우와 동기들이 놀란 얼굴로 웃을 때였다. 장진모가 안주머니에서 A4용지를 꺼내 정지우에게 건넸다.

“기자가 되고 나서 단 한 번도 기사를 미리 보여 준 적은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정지우 선수와 박 감독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거요.”

정지우는 서류를 집지 않았다.

“읽어 보고 마음에 걸린다고 하면 그 기사 안 올리겠습니다. 공연히 내 욕심에 정지우 선수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말을 마친 장진모가 갈비탕에 밥을 부어 넣은 뒤였다.

“안 볼게요. 옳다고 생각하시면 기사로 올리세요. 장 기자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기자회견도 했을 텐데요.”

밥그릇을 내려놓은 장진모가 말없이 정지우를 보았다.

“정지우 선수도 필요하다고 적었습니다.”

그럴 것 같았다. 장진모의 눈빛이 그랬다.

“정지우 선수, 나가고 싶지 않은 경기를 억지로 나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읽어 보라고 한 겁니다. 우선 박 감독님만 모실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요.”

그동안 계속 생각했었고, 고민했었던 내용이었다.

“알겠습니다.”

“뭐예요? 그게 다예요?”

정지우는 씨익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럼 이건 내가 알아서 하죠.”

장진모는 내려놓았던 종이를 다시 품에 넣고 숟가락을 들었다.

“여기 음식 맛이 죽여줍니다.”

그는 곧바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많이 먹는 장진모.

저녁을 먹고 나서였다.

10시쯤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그때 박용근의 전화기가 울었다.

“누구야?”

“김 감독이시네.”

방에서 나온 전은주가 궁금한 얼굴로 박용근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여보세요? 어, 김 감독. 어쩐 일이야?”

박용근의 눈이 훌쩍 시계로 달려갔다.

“몰라. 여기 오긴 했는데 오늘은 다른 곳에서 묵는지 들어오지도 않았고. 기사? 기사를 쓴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정지우와 박상민이 ‘그건가 보다.’ 하고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알았어. 내가 확인해 보고 전화할게.”

박용근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장 기자가 우리 이야기를 올렸단다.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한국 시간으로 새벽에 올라온 건데도 그 기사 때문에 난리라는데?”

당연하게 다 같이 서재로 움직였다.

컴퓨터를 켠 박용근이 메인 포털 스포츠 칸을 클릭하자 바로 기사가 보였다.

<박용근 감독은 더 이상 책임을 피해서는 안 된다.>

정지우는 고개를 모니터로 불쑥 디밀었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기사는 우선 축구 협회 관계자라는 표현으로 김문호 감독의 말을 전했다.

박용근과 제자들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외국인 감독의 영입이 어려워진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장진모는 영입 대상 감독들이 내걸었다는 조건들을 설명했다.

정지우, 박상민, 이정렬, 신준석의 대표팀 선발, 그리고 박용근 감독의 코칭스태프 합류가 그 조건들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장진모는 박용근 감독이 이번 월드컵을 맡아야 한다고 적었다.

협회와의 갈등도 짧게 언급되었는데 문제를 일으켰던 협회장과 임원들이 처벌받은 지금, 언제까지 책임을 피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박용근 감독이 당했던 일들로 우리는 그에게 책임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축구다. 협회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이들이 애썼던 것처럼 이번엔 박용근 감독이 나서 주길 바란다. 우리는 2002년처럼 가슴 벅찬 우리 축구를 희망한다.>

다 같이 기사를 읽고 난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보, 댓글도 보자.”

전은주의 요구에 박용근이 무거운 표정으로 마우스 휠을 움직였다. 비난이나 반대 의견을 덤덤히 받아들이려는 심정이 그의 눈에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정지우는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김정아~서은&서희❤ : 나와 줘- 요오!

주군ㅋ네오스 : 장진모 기자님 멋쟁이~ 감독님이 하셔야지. 키즈들 데리고 ㅠㅠㅠㅠ.

장광현 : 조만간 세계가 놀라게 되겠군.

호갱팬더 : 호갱 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켈리퍼 : 정말 감성팔이……. 내가 박용근이면 국대 안 한다.

AoAPink : 월드컵 나가겠네 ㅋ.

...(-1)... : 무능한 축협 같으니! 아직 제대로 아무것도 수습 못했다는 이야기잖아! 이래 놓고 막상 나가서 4강 이상 못하면 난리 치며 또 덤벼들려고 하겠지. 내 편견일까요?

이지환영사술 : 낚시성 기사 제목, 현실감이 쫘악!>

대략 내용은 이런 식이었다.

아직 분명하게 분위기가 형성되지는 않았는데, 기사가 올라온 시간이 새벽인데도 한 시간 조금 넘어서 댓글은 이미 2천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상한 일도 있었다.

무거웠던 박용근의 표정이 댓글을 읽으며 풀리고 있다는 거였다.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달라는 직접적인 내용은 없는데도 말이다.

박용근은 먼저 박상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희는 알고 있었지?”

녀석이 고개를 떨구며 뒤통수를 긁는 바람에 그렇다고 말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가 돼 버렸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월드컵 나가고 싶었어요.”

정지우의 말을 들은 박용근은 먼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 이 녀석! 솔직히 말해.”

더는 감출 수도 없고, 더 이상 감추기도 싫었다.

정지우는 장진모와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박용근은 덤덤했고, 전은주는 놀란 얼굴이었다.

“상민이, 정렬이, 준석이는 분명 월드컵 대표팀에 뽑힐 거다. 하지만 지우야, 네가 싫은 걸 나 때문에 하지는 마라. 널 위해 뛰어. 널 위해 사는 법도 익혀. 그게 내가 바라는 거다.”

아버지가 있다면 꼭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을까.

찢어진 눈, 험상궂은 얼굴, 그라운드에 있어서 항상 검게 탄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금의 박용근이 보여 주는 눈빛과 음성이 바로 아버지가 보여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감독님께서 지녔던 꿈을 이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구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의논하면서 한국의 호프집에서 뵈었던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선물과 편지 보내 주시는 분들도 요.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면 경기에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과가 안 좋을 때 받을 데미지도 생각해야지.”

“굳이 월드컵 경기가 아니더라도 경기에 나선 선수와 스태프는 결과에 따라 비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지 하는 눈빛으로 박용근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회는 협회나 관계자가 주는 게 아니라 축구 팬들이, 국민들이 주는 게 아닐까요? 그런 자리에 감독님과 나가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감독님께 어떤 축구를 배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늘었는지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예, 감독님.”

거기까지였다.

그날 밤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13일의 토트넘과의 원정 경기는 야간 경기로 치러졌다.

역시나 4-5-1의 포메이션을 들고 나온 토트넘은 무서웠다.

『토트넘! 유니온 시티를 상대로 농구나 핸드볼 경기를 펼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네요! 레믹, 박상민, 카알, 꼼빠니를 일대일로 마크하고, 거기에 남은 선수들이 지역 방어를 하고 있어요! 젊은 선수들이 아니라면 절대 하기 어려운 전술입니다.』

만약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분명 질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힘겨운 경기이기도 했다.

『토트넘! 이 경기가 리그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뜁니다! 공수의 전환이 정말 빠릅니다!』

『막아야죠! 일단 잘라 내야죠!』

『에릭센! 슈- 웃! 정지우! 결정적인 슈팅을 또 막아 냅니다! 정지우의 선방이 없었다면 승부가 일찌감치 갈렸을 정도로 토트넘 매서운 경기를 선보입니다!』

『지금까지 유니온 시티를 상대로 한 팀들은 모두 4-5-1 포메이션을 사용했거든요. 오늘 토트넘은 그 포메이션에서 어떻게 해야 유니온 시티를 더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지를 확실히 보여 주네요!』

젊은 선수들은 확실히 달랐다.

그들은 강력한 체력을 바탕으로 후반 들어서도 달리고, 또 달렸다.

올라올 때면 거의 전원이 밀고 올라왔고, 조금이라도 기회가 생기거나 혹은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 바로 슈팅을 날렸다.

『저렇게 슈팅으로 마무리를 지어 버리니까 유니온 시티는 역습을 만들 기회가 없어요. 공을 가로채도 토트넘이 바로 태클로 저지하거든요. 벌써 옐로카드를 세 장이나 받았는데, 이건 아무래도 벤치에서 주문한 것 같네요.』

그렇게 뛰었는데 토드넘은 득점을 얻지는 못했다.

정지우에게서 골을 빼앗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토트넘 선수들을 좀 더 공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라멜라! 유니온 시티의 오른쪽을 파고듭니다! 케인에게! 케인, 흘려주고! 알리! 알리 슈웃!』

『걸렸어요! 오오오-!』

“예에에-!”

『슈퍼세이브! 정지우! 후반에만 세 개의 선방입니다!』

『이건 정말! 저런 코너로 들어오는 공은 알려 줘도 못 막을 거 같은데! 정지우 선수!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선방입니다!』

리버풀전에서 얻은 교훈이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덕분에 동료들이 악착같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후반이 거의 끝나고 대기심이 추가 시간 3분을 알리는 보드를 들었을 때였다.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토트넘은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 비해 힘이 남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공을 잡은 케인이 정지우의 왼쪽으로 공을 툭 차며 데이빗을 벗겨 냈다.

퍼어어엉!

『케인! 슈웃!』

추가 시간이라 마음이 급했을 거다.

내내 몰아붙이고 있었으니 어떡해서라도 골을 만들고 싶었을 거다.

기다렸었다.

중거리 슈팅이라 여유 있게 대비할 수 있었다.

화아악!

몸을 날린 정지우는 공을 잡기 무섭게 앞으로 달렸다.

『정지우! 앞으로 달립니다!』

“와아- 아!”

옐로카드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알리를 무둔바가 멋지게 막아 냈다.

“상민아!”

휘이이이익!

정지우가 힘껏 던져 준 공을 박상민은 방향만 틀었다.

『신준석! 오른쪽에서 공을 잡습니다!』

퍼어어엉!

신준석은 대각선 너머로 기다랗게 공을 찔러 넣었다.

“예에에에에-!”

꼼빠니의 자리에서 달리는 것은 이정렬이었다.

『이정렬! 안으로 치고 달리는 이정렬!』

퍼어엉!

『이정렬! 슈웃!』

강한 슈팅이었다. 그러나 케인의 슈팅처럼 거리가 있어서 요리스의 손에 걸리고 말았다.

요리스가 쳐 낸 공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레믹이 귀신같이 나타나서 무릎 높이의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레미- 익!』

터어- 엉!

솔직히 발로 찼어야 하는 공이다. 그런데 타이밍을 못 맞춘 레믹이 몸을 바닥에 처박는 것처럼 날린 거였다. 그 바람에 공이 그라운드에 튕기며 높다랗게 튀어 올랐다.

화아악!

그리고 몸을 던진 요리스를 훌쩍 넘어서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철렁!

“예에에에에에에-!”

『레믹! 후반 추가 시간에 결국 골을 만들어 냅니다!』

『남은 시간이 1분도 채 되지 않아요!』

『유니온 시티! 승점 3점을 주머니에 넣고 움켜쥐었습니다! 1분만 버티면 완벽하게 가져가는 승점입니다!』

경기가 다시 진행되자 토트넘은 더욱 격렬하게 달려들었다.

삐이익!

『유니온 시티! 두 명의 선수를 교체합니다! 꼼빠니를 대신해서 맥슨을 오랜만에 출전시키고, 카알 대신 데니를 집어넣습니다.』

꼼빠니와 카알이 손을 위로 들고 박수를 치며 천천히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토트넘의 스로인! 라멜라! 케인에게!』

콰아악! 콰다당!

삐이이익!

『스웰던! 거친 파울! 유니온 시티 선수 중 처음으로 경고를 받습니다!』

삐이익!

『유니온 시티! 마지막 남은 교체 카드를 사용합니다! 이정렬을 빼고, 대신 23번 수비수 멜스를 넣었습니다!』

『시간을 벌기 위한 교체 같네요. 지친 이정렬 대신 수비수를 넣어서 어떡해서든 승점을 지키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 급한 토트넘이 파울 지역에서 공을 기다랗게 찼을 때였다.

삑! 삑! 삐이이익!

“예에에에에-!”

주심이 경기를 끝내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경기를 마친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손뼉을 치며 벤치 앞의 원정 응원단 앞으로 움직였다.

관중들은 양팔을 뻗은 채 승리를 기뻐했고, 스태프들은 선수들과 함께 박수로 관중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늘 보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정지우는 관중들과 스태프들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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