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30화 (230/262)

제5장. 믿음과 신뢰,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1)

홍보실로 급하게 들어온 에이미가 우선 직원들을 살폈다.

정지우에게 실수한 것이 있느냐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아는 건 없는 거다.

“Ji! 무슨 일이야? 홍보실에서 혹시 인터뷰를 요청한 직원이 있었어? 혹시 그랬다면 그건…….”

“에이미.”

변명처럼 말을 쏟아 내던 에이미가 고개를 기울이며 정지우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한데 한국에서 신청 온 방송 프로그램을 주선해 줄 수 있을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어렵지만, 30분 내외면 동기들하고 함께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지우가 느닷없이 프러포즈를 했어도 에이미는 지금처럼 멍한 표정을 짓지는 않을 거다.

“어려워? Lee가 아는 분에게 부탁할까?”

“후! 잠시만! 잠시만, Ji! 그러니까……. 한국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는 거지? 그것도 Lee, Sang, Jun과 함께?”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미의 눈에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이게 눈물을 보일 정도의 일인가 싶었지만, 에이미의 포지션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움직인 에이미가 책상에서 협조 요청서를 들고 왔다. A4 용지로 대략 30장 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난 봐도 몰라. 에이미가 꼭 들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며?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오오!”

이번엔 로또에 맞은 사람처럼 보였다.

“고마워, Ji! 홍보팀에 있으면 아쉬울 때 서로 도움 주는 곳이 항상 있거든! 정말 고마워! 내가 이 중에서 한 곳을…….”

“세 곳 정도까지는 괜찮아.”

에이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장 기자님께 연락 좀 부탁해. 집에 가기 전에 만날 수 있는지?”

“물론이야! 잠시만!”

에이미가 전화기를 들었고, 바로 통화했으며, 30분을 기다려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이지.”

정지우는 분명하게 답을 해 준 뒤에 라커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쥬피터는 느긋한 눈길로 맞은편에 앉은 남자 둘을 바라보았다.

“MENI의 투자금에 대해 배상을 해 드리지요.”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수를 희생해 가면서 투자를 진행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이후의 배상 절차는 이 친구와 의논하기 바랍니다.”

쥬피터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변호사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Ji와 박 코치, 그리고 그의 동기들에게서 믿음과 신뢰,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오래도록 우리 유니온 시티의 가장 중요한 팀 정신이 될 것이며, 또한 우리 팀의 가치로 남을 것입니다.”

“회장님? 이런 문제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투자는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투자자들은 MENI과의 소송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선수들의 명예를 위해 배상을 택한 겁니다.”

날카로운 쥬피터의 눈빛에 하얀 머리의 남자는 대꾸조차 못했다.

“세계 유수의 팀들이 Ji를 노리고 있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우리와 함께 전설을 이어 갈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지우에 대한 소유권까지 강력하게 주장한 쥬피터가 다리에 올린 손을 맞잡았다.

원래 마틴의 버릇이었는데 어느새 쥬피터가 따라 하고 있었다. 이미 결심이 굳었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꾸물대던 두 남자가 결국 방을 나섰다.

“후우-!”

쥬피터는 길게 숨을 내쉬었고, 변호사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서둘러서 Ji와의 새로운 계약을 완성해야겠군.”

“계약서는 내일 준비됩니다.”

“좋아.”

자리에서 일어난 쥬피터가 책상으로 움직였다. 그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메모리된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다.

“오늘 Ji의 컨디션은? 불편한 점은 없었나? 좋아. 그는 원래 요구가 없는 선수다. 그가 보여 준 헌신과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을 먼저 준비해 주는 마음가짐이 필요해.”

다짐처럼 말을 전한 쥬피터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프리미어리그는 무섭군. 스태프를 30퍼센트나 증원했는데도 여전히 사람이 부족하다고 난리이니.”

“중계권료가 많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덩치가 이렇게 급하게 커져도 되는가 싶어. 챔피언십 1년 예산이 두 달도 되기 전에 사라지고 있지.”

“수입은 그보다 크지 않습니까?”

쥬피터가 재미있다는 것처럼 창을 바라보았다.

“프리미어리그로 올라오고 나서는 어쩐지 내가 아는 유니온 시티 팀이 아니란 생각도 하곤 하지. 그러나 이것이 발전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회장님이 말한 팀의 가치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쥬피터가 창으로 시선을 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지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어서 박상민과 이정렬, 신준석, 그리고 늘 무뚝뚝한 박용근을 생각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유니온 시티는 확실히 행운을 거머쥔 거였다.

***

장진모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정말 그런 인터뷰를 하겠다는 겁니까?”

“방송 출연도 부탁해 놨는데요?”

“허허.”

믿기지 않는다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내가 전하긴 했지만 이렇게 단숨에 결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정지우 선수가 말을 바꾸기도 쉽지 않을 거구요. 이렇게 합시다.”

장진모는 고개를 들어 생각을 잠시 정리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느닷없이 이런 발표를 하면 혼자 다 해 먹느니, 박 감독님이 박용근 키즈를 이용해 한국 축구판을 거머쥐려고 한다느니, 말들이 나올 겁니다.”

정지우는 절대 이런 생각 못한다.

“방송은 그냥 편하게 나갑시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은 내가 기사로 만드는 것으로 하지요. 시간이 아쉽지만, 자칫하다간 좋은 의도를 오해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장진모가 무척 고마웠다. 그래서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어렵네요.”

“이래야 박 감독님께서 편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야죠.”

“햐! 덕분에 그 핑계로 당분간 여기서 버틸 수도 있겠는데요. 거기에 월드컵 출전 독점 인터뷰까지?”

장진모의 넉살에 둘이서 비슷하게 웃었다.

에이미가 잡은 첫 방송은 ‘무리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통보 이틀 후에 촬영 일정이 잡혔다.

구단의 협조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출연료가 제법 커서 정지우는 물론이고 동기들 모두 놀랄 정도였다.

“무리한! 도전!”

기존의 출연자들이 호들갑을 떨며 방송을 시작하고 레드 블레이트를 소개했다.

동료들이 죄 벤치 근처에 앉아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뒤가 보이시죠? 여기가 그 유명한 레드 블레이트! 유니온 시티의 홈구장입니다! 새해를 맞이해 무리한 도전이 엄청난 분들을 모셨습니다!”

시간을 길게 끌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골키퍼! 정지우 선수!”

정지우가 앞으로 나가자 출연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정지우는 우선 출연자들과 인사했고, ‘시청자분들께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하는 권유에 ‘안녕하세요? 정지우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이어서 박상민, 이정렬, 신준석의 순서대로 소개가 있었다.

웃기는 건 동기들을 소개할 때마다 벤치와 관중석에 앉은 동료들이 요란하게 반응한다는 거였다.

출연은 분명 30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장진모와 에이미, 홍보 스태프들이 시계를 들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인사와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촬영이 잠시 중지되었을 때 스태프와 출연자들의 표정이 정말 급해 보였다.

“정지우 선수, 미안합니다. 이 게임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인사와 인터뷰에만 20분을 넘게 썼다.

그러니 높다란 곳에 과자를 매달아 놓고 입으로 따 먹는 게임을 하기에 10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조금 편안하게 하죠. 그리고 괜찮다면 이 게임에 우리 동료들이 함께해도 될까요?”

“예에?”

담당 PD의 입이 단박에 귀에 걸렸다.

“이봐! 이거 입으로 따 먹는 게임이래! 하고 싶은 사람?”

“오우! 그래도 되는 거야?”

가뜩이나 재미있게 구경하던 동료들이다. 마치 순서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우르르 그라운드로 나왔다.

“정지우 선수! 동료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여기서부터 주장 데이빗!”

“안뇽하세요?”

영국인 특유의 발음으로 동료들을 소개했고, 다시 정지우가 게임 방식을 전해 주었다.

레믹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우리 편을 가르자고! 나, Lee, 데니, 꼼빠니 한 팀, 데이빗, Sang, 카알이 한 팀, 그리고 포백이 한 팀, 마지막으로 골키퍼 셋에 누구 없나?”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출연자들을 나누어 적당하게 팀을 정했고, 이어서 게임을 시작했다.

삐익!

동료들이 악착같이 달려들면서 해프닝이 그치지 않았고,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웃음이 지난 다음이었다.

“정지우 선수! 정말 월드컵에 안 나옵니까? 우리 지난번 사우디아라비아전 같은 경기를 보고 싶거든요!”

“나와 줘- 요오!”

마칠 순서가 되자 투정처럼 고정 출연자들이 정지우와 동료들에게 매달렸다.

정지우는 웃기만 했다.

그래서 중심을 잡아 주는 고정 출연자가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께 인사 부탁합니다.”

신준석부터 이정렬, 박상민의 순서로 응원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고, 마지막으로 정지우의 차례였다.

“응원해 주신 덕분에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경기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방송을 마쳤다.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자, 다 함께! 무리한! 도전!”

동료들까지 전부 나서서 함께 외쳤고, 박수로 마무리했다.

***

점심을 혼자 해결한 전은주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가지런하게 걸린 옷들을 헤치자 옷장 안쪽에 걸린 박용근의 국가대표 운동복이 보였다.

그녀는 팔을 뻗어 유니폼을 꺼냈다.

욕심? 여기서 더 뭘 바란다고?

전은주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유니폼을 매만졌다.

더 바라는 건 없다.

남편과 정지우, 제자들이 축구의 본고장이라는 영국에서 프리미어리그 선두 팀에 속해 있고,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환상적인 승리도 거두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정지우와 함께 사는 게 제일 좋았다.

남편 박용근은 어떨까?

더 바라는 것 없다고는 했었다.

그렇지만 김문호의 전화를 받고 뒤척인 것을 전은주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책임감 강한 남편, 한국 축구에 누구보다 큰 애정을 지닌 남자, 배웠던 것들과 가르쳤던 선수들로 세계에 한국 축구를 알리고 싶었던 축구인, 그게 박용근인 거다.

정지우가 했었던 질문, 그리고 이후에 그토록 싫어했던 방송에 나가겠다는 말을 들으며 전은주는 혹시나 싶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소파에 있을 때 박용근이 물끄러미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 시선이 마주쳤다.

“너, 무슨 생각으로 방송에 나간 거냐?”

“예?”

“내내 인터뷰도 도망 다니던 녀석이 느닷없이 오락 프로그램에 나가니까 그렇지?”

분명 전은주는 당부했던 대로 정지우의 질문을 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버지 같은 분이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분이다.

이런 분들의 속을 몰랐던 것이 미안하고, 무언가를 감춘다는 게 죄송했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함부로 입에 올리기도 어려웠다.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 때 들렀던 호프집이 자꾸 떠올랐어요. 그렇게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리고 매일 한국에서 오는 선물과 응원 편지들이 있는데 외면만 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서 나갔습니다.”

박용근이 잔잔한 미소로 정지우의 대답을 들었다.

“이 녀석이 이제 점점 속까지 깊어지네.”

그는 대견한 것처럼 정지우의 등을 다독였다.

박상민이 힐끔 눈치를 살폈다가,

‘어쩌려고 그래?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그랬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감독님 마음만 상하셔. 일단 장 기자님에게 맡겨 두자.’

정지우가 찔끔하는 것을 보고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