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손님이 찾아왔어. (2)
홍보실로 들어선 정지우는 얼굴에 커다랗게 웃음을 달았다.
“어쩐 일이세요? 집으로 오시죠?”
“빨리 만나 보고 싶었죠.”
장진모가 반갑게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긴 비행에 피곤한 얼굴인데도 정지우와 비슷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정지우가 들어설 때 홍보실에 3명이 함께 움직였다.
홍보실 스태프, 경호 요원, 그리고 클락이었다.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장진모의 시선을 받은 에이미가 어깨를 들썩였다. 이것이 현재 정지우가 지닌 위상이란 의미처럼 보였다.
“뭡니까? 정지우 선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거 같은데요?”
장진모는 정지우의 변화가 진심으로 기쁜 얼굴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느낀 듯 말을 건넸다.
“어쩐 일이세요?”
“기자가 하는 일 뻔하잖아요.”
“인터뷰인가요?”
한국말을 모르는 에이미가 ‘인터뷰’란 단어를 듣고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정지우의 표정을 살폈다.
“둘이서만 잠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정지우는 장진모를 믿는다. 그라면 둘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함부로 기사로 올리거나, 정지우가 한 말을 왜곡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라운드에 나갈까요? 밖이 좀 춥기는 한데요.”
“좋지요. 외투 안 입어도 되겠어요?”
“라커룸에 필드 코트가 있어요.”
홍보실을 나온 정지우는 라커룸에서 필드 코트를 입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집으로 오시죠. 그럼 편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저녁엔 어디서 지내실 거예요?”
“아직 결정 안 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박 감독님 안 계실 때 정지우 선수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구요.”
무슨 일인데 이러지?
정지우는 장진모와 함께 벤치 위쪽 관중석에 앉았다.
“후!”
장진모가 입김을 불며 손을 비볐다.
이 사람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나?
정지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볼 때였다.
“오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구단으로 먼저 왔습니다. 이건 기사로 나가지 않을 거고, 내가 좋아하는 정지우 선수와 존경하는 박 감독님을 위해 개인적으로 알려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장진모가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외국인 감독을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문호와 박용근의 통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외국인 감독들의 조건에 정지우 선수가 포함되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정지우 선수나 지금 함께 뛰는 동기들이 국가대표로 뛰지 않았을 때의 성적이 걱정되기도 하는 것 같구요.”
힐끔 시선을 주었던 장진모가 말을 이었다.
“내가 사회부로 옮긴 건 알죠? 지난 협회 횡령 사건 뒤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송인수 위원과 김문호 이사님을 만났습니다. 박용근 감독님이 말씀해 놓으셔서 이야기가 좀 더 쉬웠구요.”
월드컵에 나오라는 말을 하려는 거구나 싶을 때였다.
“외국인 감독이 두 번째로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박용근 감독님이랍니다. 박 감독님이 전에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승리한 데다, 프리미어리그 선두 팀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자꾸 비교될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초빙하려는 외국인 감독마다 두 번째 조건이 박용근 감독님을 코치로 선발하는 조건이랍니다. 그런데 김문호 감독님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소연하더군요.”
“감독님이 안 맡으실 것 때문에 그러신 거죠?”
“그런 게 아니더군요.”
장진모가 단호한 어투로 정지우의 말을 받았다.
“우리 축구계에서 물러난 박용근 감독님의 평소 꿈이 국가대표팀을 맡아서 월드컵에 나가는 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옷장에 아직 국가대표 유니폼을 간직하고 계신 거라구요.”
정말? 감독님이 진짜?
정지우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사모님도 아는 거라고. 지난 사우디아라비아전은 예선 마지막 게임이고 김문호 감독님과 함께라서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청했지만, 어떻게 본선에 코치진으로 참가해 달라고 하겠냐면서 한숨을 내쉬더군요.”
“정말 그러셨어요?”
“박 감독님께 넌지시 권유도 하셨었다고 하더군요. 국가대표를 은퇴한 제자를 팔아먹으면서까지 대표팀 감독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고, 두 번째는 정지우 선수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면서 그런 권유를 하겠느냐고 큰 소리까지 내셔서 더는 입도 떼지 못하셨답니다.”
“그게 언제쯤인지 아세요?”
“외국인 감독 후보들과 접촉할 때니까 한 두어 달 됐겠네요.”
정지우는 언젠가 경기 영상에 집중하지 못했던 박용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박상민의 질문을 놓칠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하던 무거운 표정의 박용근을 말이다.
박용근의 유니폼이 옷장에 있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것만이 아니라 국가대표 감독으로 월드컵에 나가고 싶어 하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은주도 알고 있다고 했다.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을 텐데 정지우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아예 꿈을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
정지우는 아팠다.
말을 못하고 꾹꾹 눌러 담았을 박용근과 그걸 지켜보며 아무 말 하지 못했을 전은주의 심정이 어땠을까?
“장 기자님, 확실한 거죠?”
“김문호 감독님과 한번 통화해 보시면 바로 알 겁니다. 그런데 사실 김문호 감독님도 정지우 선수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박용근 감독님이 아시면 감당할 자신 없으시다구요.”
동대문 2번 개인 김문호가 유일하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동대문 1번 개인 박용근이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요? 그것도 일부러 여기까지 오셔서요?”
“나는 사회부 기자였습니다. 물 먹고 스포츠부로 갈 때까지 우리나라의 온갖 더러운 꼴은 다 보고 다녔죠. 막말로 스포츠? 별로 관심 없었습니다.”
외투에 달린 지퍼를 끝까지 올린 장진모가 말을 이었다.
“정지우 선수와 박용근 감독님을 알게 되었고, 스포츠 취재하면서 알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전은 최고였죠. 난 정지우 선수와 박용근 감독님을 월드컵에서 보고 싶습니다. 희망과 위로가 된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답을 바라는 건 아닌 듯해서 정지우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회부는 썩은 부분을 보고 다닙니다. 그리고 취재가 끝났을 때 느낍니다. 우리나라는 묵묵하게 제 역할을 다하는 이들 덕분에 버틴다는 것을요. 그들에게 자부심과 희망, 자긍심을 선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지우 선수가 유니온 시티 관중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처럼요.”
“너무 거창한 거잖아요.”
“아니요. 작년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백 명에 정지우 선수가 들어갔습니다. 세계 최고의 팀들이 원하는 골키퍼가 우리나라 정지우 선수입니다. 변화된 위상을 받아들일 때도 됐습니다.”
어쩐지 너무 과장한 듯했고, 실감도 제대로 나지 않아서 정지우는 픽 하고 웃었다.
“정지우 선수가 골문 앞에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따라 상대 팀의 반응이 달라질 겁니다. 난 박용근 감독과 정지우 선수를 비롯한 박용근 키즈가 월드컵에 나와서 희망과 자부심을 선물해 주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말을 마친 장진모가 정지우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국가대표에 나올 마음이 생기면 전화나 좀 줍시다. 출장 이유가 정지우 선수 인터뷰라서요. 이번 출장 기사 내용은 걱정하지 마세요. 유니온 시티 식당에 나온 한식 메뉴 수준에서 적당히 적어 갈 겁니다.”
어떻게 해야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뻔뻔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아후! 속이 후련합니다! 나 진짜로 박용근 감독님 존경합니다! 나라면 못 그랬을 겁니다! 어린이 축구 교실에서 쫓겨나고도 정지우 선수를 그렇게까지 지키는 거.”
정지우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위로 들었다.
겨울답지 않게 파란 하늘에서 따스한 볕이 쏟아지는 오후였다.
장진모는 취재를 위해 오후를 보내다가 저녁 시간 전에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여전히 많이 먹었고, 넉살이 좋았다.
모처럼 저녁 식탁에 활기가 돌았는데, 그는 특히 한국 내에서의 정지우의 위상 변화에 대해 많이 떠들었다.
박용근과 전은주는 진심으로 반가운 얼굴과 눈빛으로 장진모의 이야기에 반응했다.
장진모의 말대로 정지우라면 저럴 수 있을까?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월드컵을 나가고 싶은데, 그것이 한평생 축구로 살아온 박용근의 마지막 꿈인데, 정지우가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아서, 국가대표 은퇴한 심정을 이해해서 내색조차 하지 않는 것을.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장진모의 말을 들으며 정지우는 슬쩍 박용근과 전은주를 살폈다.
저런 분이 김문호 감독을 도와 월드컵 예선을 치렀던 거다. 언제고 돌아가고 싶은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옷장에 넣어 두고서 말이다.
“지우야? 왜 그래? 어디 안 좋니? 방에 온도 좀 높일까?”
“아니에요. 장 기자님 말을 듣느라고 그런 거예요.”
저렇게 늘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래! 그랬던 거구나!
결심이 섰다.
그래서 정지우는 편안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정지우는 훈련이 없었는데 리저브 팀의 스케줄은 달랐다. 집을 나서는 박용근을 따라 장진모도 구단으로 움직였다.
잠시 뒤에 정지우는 이정렬의 집으로 향했다.
당연하게 박상민과 함께였고, 신준석도 불렀다.
“무슨 일인데? 미팅이라도 해 줄 생각이냐?”
신준석이 들어서며 던진 농담이었는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거실에 넷이 앉았다.
이정렬이 꺼내 준 비타민 음료를 앞에 둔 상태에서 정지우는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했다.
“흠.”
신준석이 나직하게 숨을 내쉰 것이 가장 먼저 나온 반응이었다.
“솔직히 우리도 월드컵 나가고 싶지.”
“그거 말린 적 없다.”
“오해하지 말고. 박 감독님과 너랑 나가고 싶었다는 거야.”
신준석은 모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감독님도 널 이해하셔서 국가대표팀 안 맡으신다는 거잖아. 널 놔두고는 불러 줘도 난 안 간다.”
정지우가 픽 웃자 ‘어? 내 진심을 무시해?’ 하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이 날아왔다.
“어쩔 생각인 거야?”
박상민이 신준석과 이정렬을 돌아본 뒤에 답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감독님이 진심으로 바라고 계신 건지 분명하게 알아봐야겠어. 혹시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전에 너희 의견을 들어 보고 싶었고.”
“난 네가 뭘 하든 따라간다.”
“하! 이 자식이? 상민아! 항상 형이 먼저라니까!”
“너는?”
“그런 걸 뭘 물어봐? 상처 한번 또 볼래?”
이정렬이 손을 들자 신준석이 ‘야! 너무 자주 써먹으면 감동이 없어!’ 하며 팔을 휘휘 저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박상민과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점심은 뭐예요?”
“왔니? 김밥 하려고. 잠깐만 기다려.”
재료 준비가 끝났는지 전은주는 식탁에 있던 그릇들을 한쪽으로 치웠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저도 도울게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정지우는 박상민과 함께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무슨 일은? 어제저녁에 보니까 입맛을 잃은 거 같아서 준비한 거야. 다 됐어! 괜히 손 버린다.”
“줘 보세요.”
정지우가 손을 뻗자 옆에 있던 박상민도 김을 가져갔다.
참기름으로 비벼 낸 밥을 얹고, 그 위에 준비된 재료들을 하나씩 올린 정지우가 천천히 김을 말았다.
어째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어머니? 감독님 국가대표 유니폼 보관하고 계세요?”
“응?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전은주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가 손에 묻은 밥풀을 입으로 가져갔다.
꾹꾹.
박상민이 눈치를 살피는 동안, 김밥 하나가 완성되었다.
조금 거칠어 보였고, 꽤나 두툼했다.
“어머니.”
“잘 만들었네! 그런데 좀 크다!”
전은주가 정지우와 박상민이 만든 김밥을 보며 웃은 다음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감독님, 국가대표팀 맡아서 월드컵 나가시는 거 아직 하고 싶으신 거예요?”
전은주가 멈칫한 뒤에 멍한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어머니는 솔직히 말씀해 주셨으면 싶어서요. 감독님께 여쭤보면 절대 답 안 해 주실 것 같아서요.”
“아니야.”
떨리는 음성, 아쉬움 남은 눈빛이 답이었다.
“예. 그렇게 알게요. 대신 감독님께는 이런 말씀 드렸던 거 비밀로 해 주세요.”
전은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색했던 분위기는 전은주의 노력과 정지우와 박상민이 만든 모양 별로인 김밥을 썰어 먹으며 풀렸다.
전은주는 어디서 들었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질문하거나 말이 길어지면 미련이 남았다는 것을 들킬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전은주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박용근의 눈만 봐도 대강 그의 생각이나 감정을 짐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국가대표팀 감독과 월드컵은 전혀 몰랐다.
그만큼 꽁꽁 싸매 둔 것이라 그랬을 거다.
아침을 먹고는 다 함께 집을 나섰다.
오전에 간단한 훈련을 마쳤고, 다음으로 근력 운동을 한 뒤에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은 다음이었다.
정지우는 홍보실로 들어가 에이미를 찾았다.
“잠시만 기다려요.”
홍보실 직원이 정말 급한 얼굴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