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경기였다. (3)
리버풀의 안필드 구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홈 관중들이 부르는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이 우렁차게 들렸다.
이미 경험했던 팀, 리버풀이다.
강하고 남자다운 축구를 구사하는 팀이었는데 이번 시즌에는 이상하게 맨유, 첼시와 함께 초반 성적이 좋지 않았다.
통로, 관중석, 심지어 안내판까지 모두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안필드의 녹색 그라운드에 나선 정지우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When you walk through the storm!”
네가 폭풍 속을 걸어갈 때,
“Hold your head up high!”
너의 머리를 높이 들어라!
반주 없이 부르는 우렁찬 응원가가 메아리처럼 안필드를 휩쓸고 그라운드로 뛰어와 선수들에게 달려들었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은 성난 듯한 관중들의 응원가에 기가 죽기도 한다. 실제로 리버풀 응원단의 거친 행동은 늘 관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정지우는 얀센과 함께 그라운드에 놓인 원뿔을 왕복하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안필드에서는 반드시 골을 먹을 거다!”
“우리 골대를 발로 건드리면 후회하게 될 거야!”
정지우를 향한 고함이 날아들었다.
이런 것이 바로 영국 축구인 거다.
얀센이 힐끔거리며 시선을 돌리는 것과 달리 정지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달리기를 마쳤다.
다음은 골대 앞에서 공을 주고받는 훈련이었다.
휘익! 터억! 휘익! 터억!
정지우의 훈련 모습을 리버풀 선수들이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리버풀 역시 4-5-1의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최근 유니온 시티를 상대하는 팀들이 계속해서 4-5-1 포메이션을 들고 나옵니다.』
『허리 싸움에서 밀리면 유니온 시티를 막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거죠. 박상민을 중심으로 이정렬, 레믹이 수시로 위치를 바꾸고, 꼼빠니와 카알이 좌우에서 흔들 때의 유니온 시티는 정말 막아 내기 어렵거든요.』
리버풀의 응원이 끝나자 유니온 시티의 원정 관중들이 양팔을 높다랗게 뻗치고서,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하는 특유의 응원가를 불렀다.
동료들의 컨디션은 분명 이전 경기와 달라 보였다.
그러나 중고등 학생이 아니라 프로 선수들이다.
보이는 모습만으로 경기 시작 전에 잔소리를 퍼붓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정지우는 얀센과 위치를 바꾸어 공을 던져 주었다.
몸을 풀고 난 정지우가 얀센과 함께 통로를 향해 걸어갈 때는 다시 리버풀 홈 관중들이 묵직하고 거센 응원가를 부르며 홈 팀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라커룸에 들어간 정지우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골키퍼 장갑에 시선을 두었다.
함께 몸을 풀던 꼼빠니가 라커룸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료들이 ‘무슨 일이지?’ 하는 얼굴로 그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는데 당장 입을 여는 선수는 없었다.
달칵.
잠시 뒤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꼼빠니가 아니라 마틴이었다.
“꼼빠니가 허벅지 통증으로 경기에 나서기 어렵다. 데니와 교체할 텐데, 카알! 자네가 꼼빠니의 자리를 맡아. 데니를 오른쪽 앞으로 넣겠다.”
말을 마친 마틴이 정지우를 묵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긴 정지우가 느낀 동료들의 모습을 그가 몰랐을 리는 없는 거다. 그러나 그는 선수들을 쭉 돌아본 뒤에 다른 말 없이 라커룸을 나섰다.
일단 지켜보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감독도 지켜보겠다는데 동료인 정지우가 굳이 나설 상황은 아닌 거다. 일단 지켜본다. 그리고 그라운드에 나가서 최선을 다한다.
막말로 꼼빠니가 부상당한 것도 일이 꼬이려니까 이렇게 된 거지, 크리스마스에 술 마신 탓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거다.
문제는 경기 전 라커룸의 분위기였다.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떨군 데이빗, 너스레를 떨며 골을 장담해야 할 레믹의 침묵, 골키퍼 장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지우까지.
어쩌면 정지우가 골대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쯤 해 주길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입을 열면 싫은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아서 정지우는 계속 장갑만 보고 있었다.
달칵.
꼼빠니를 대신해 들어온 데니가 어색한 분위기에 놀라 조용히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띠잉! 띠잉! 띠잉!
그라운드로 나설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잘 참았다.
공연히 싫은 소리 해서 동료들 기분 망치고, 마음 상한 채 경기에 나서는 것보다 백번 나은 거다.
정지우가 수건을 집어 들고 통로를 향해 움직이자 동기들이 바로 뒤따라 움직였다.
통로를 가득 메운 거센 응원가가 정신 차리라는 따끔한 충고처럼 들렸다.
자가락! 자가락!
리버풀 선수들이 ‘무슨 일이지?’ 하는 눈빛으로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을 살피는 앞이었다.
“아후! 분위기 죽여주네!”
신준석이 기죽기 싫다는 것처럼 농담을 던졌다.
꼼빠니를 대신할 선수는 원래 맥슨과 브라운이었다.
그런데도 마틴은 데니를 선택했다.
그나마 경기 감각이 살아 있는 데다, 최근 훈련했던 전술을 이해할 거란 아슬아슬한 희망을 붙잡은 교체였다.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유니온 시티의 응원가가 울려 퍼질 때, 스태프가 그라운드로 움직이라는 사인을 주었다.
자가락, 자가락.
초록빛 그라운드로 나서며 정지우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켰다.
우선 전반전이다.
전반에 완전히 망가져 버리면 라커룸에서 아무리 악을 써 봐야 후반을 기대하기 어렵다.
최선을 다해 전반전을 지켜 내고 후반을 노리자.
동료들의 몸 상태로 봐서 후반 정도는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했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이 경기를 통해 정신 차렸으면 싶었다.
저렇게 응원해 주는 관중들에게 승리를 선물하고자 악착같이 뛰던 동료들로 돌아와 주길 바랐다.
골을 먹는 거? 각오한 일이다.
물론 멍청하게 당할 마음은 없지만 말이다.
“와아아-!”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 네 명이 모두 선발이에요.』
『그렇습니다. 늦은 시간의 중계인데도 최근 시청률이 한일전을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양쪽으로 나뉜 선수들이 벤치를 향해 서 있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 적 없는 유니온 시티입니다. 영국 리그에서 무패 우승은 2003년과 2004년 시즌에 아스널이 세운 것이 유일한데요, 이제부터 유니온 시티는 한 경기, 한 경기가 모두 대기록을 향해 가는 고비가 되겠습니다.』
『마틴 감독의 표정이 무척 진지하네요. 경기 직전에 꼼빠니의 부상으로 데니가 급하게 들어갔는데, 이 점이 어떻게 작용할지 우선 전반을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
간단한 행사가 끝나고 동전을 던진 데이빗이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정지우는 오른손 엄지로 벤치를 바라보고 왼쪽 진영을 택했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가는 순간,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멋진 경기를 기대하는 양 팀 응원단이 일제히 박수를 보내 주었고, 이어서 ‘리버- 푸울! 리버- 푸울!’ 하는 홈 관중들의 함성이 안필드를 뒤덮었다.
정지우는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중요한 고비에서 패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후유증이 생긴다.
강팀이 어처구니없이 몇 경기를 내리 지는 경우가 그렇다.
정지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FA컵, 챔피언십에서의 경기는 지금보다도 훨씬 좋지 않았었다.
‘상민이, 정렬이, 준석이가 함께하는 FA컵 첫 출전이다.’
각오를 다진 정지우는 골포스트 왼쪽으로 걸었다.
최선을 다한다.
와라! 리버풀!
터엉!
“우리 골대를 모욕하지 말라고!”
리버풀 관중이 또다시 정지우에게 고함을 질렀다.
정지우는 묵묵하게 오른쪽 골포스트를 향해 걸었다.
터엉!
“하지 말라고!”
“후회할 거다!”
지금까지 이런 식의 항의는 없었다.
리버풀이 얼마나 승리를 갈망하는지 이토록 선명하게 알려 주는 일이 또 있을까?
골대 가운데로 걸어간 정지우가 크로스바를 향해 훌쩍 뛰었다.
“예에에에에에-!”
와라. 혼자 막아야 한다면 그렇게라도 상대해 주마.
그러나 내겐 동기 셋이 함께 있고, 박용근 감독과 스태프들, 함성을 질러 주는 관중들이 있다.
몸을 돌린 정지우의 눈빛이 무섭게 번들거렸다.
『정지우 선수! 굉장한 각오로 경기에 나선 모양입니다.』
『다섯 명의 미드필더를 내세운 리버풀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거든요. 거기에 경기 시작 전 최근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꼼빠니가 빠진 것에 대한 부담도 있을 거예요.』
『그동안의 경기를 보면 저렇게까지 부담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축구라는 게 한 명의 교체에 따라 리듬이 완전히 달라질 때가 있거든요. 공격의 한 축이 갑자기 바뀐 상황에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어떻게 경기를 풀어낼지가 관건이 될 것 같네요.』
삐이익!
“우와아아- 아!”
『경기 시작되었습니다. 보시기에 왼편이 유니온 시티, 오른쪽이 리버풀입니다. 오리지가 가볍게 건드린 공을 쿠티뉴가 잡습니다! 유니온 시티, 데니가 달려듭니다!』
투욱!
쿠티뉴가 엠레찬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공을 잡은 엠레찬! 중앙선을 넘어섰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의 유스 출신 선수죠. 피지컬은 굉장히 강한데 시야가 좁은 단점이 있어요. 언제고 굉장한 선수가 될 거라고 기대하는데요, 아직은 최고 선수라고 손꼽기에 아쉬운 면이 있어요.』
해설자가 엠레찬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공은 쿠티뉴의 반대편 앨런에게 넘어가 있었다.
『양 팀, 상대를 탐색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경기를 풀고 있습니다. 유니온 시티도 오늘은 무리하지 않겠다는 느낌입니다.』
『박상민과 이정렬, 데니의 움직임이 가장 눈에 띄는데요. 다른 선수들이 압박에 좀 더 가담해 주었으면 싶네요.』
정지우는 리버풀 선수들이 공을 패스할 때마다 그에 맞게 움직이며 위치를 조절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동료들은 45분 정도 경기를 마치고 나온 선수들처럼 보였다.
리버풀 선수들이 이런 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리버- 푸울! 리버- 푸울!”
홈 관중들이 서서히 경기를 장악해 가는 리버풀 선수들을 향해 응원 구호를 외쳤고, 유니온 시티 원정 관중들이 묵묵하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리버풀 선수들이 공을 돌리며 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한순간,
투우욱!
헨더슨이 유니온 시티의 왼쪽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우와- 아!”
모처럼의 공격에 함성이 울려 나왔고, 카알과 스웰던의 사이에서 공을 잡은 것은 앨런이었다.
박상민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앨런! 박상민을 피해 공을 뒤로 돌립니다!』
『박상민 선수가 역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섰는데요, 리버풀! 철저하게 공을 지키는 경기를 하고 있어요!』
『리버풀로서도 박상민이 부담스러운 모양입니다.』
『뛰는 거리로는 프리미어리그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이니까요. 거기에 힘도 있고, 무엇보다 몸싸움에 밀리지 않으니까 부담스러울 만할 거예요.』
뭐라고 해도 공을 소유한 건 리버풀이었다.
홈 관중들이 양팔을 높게 들고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며 선수들을 계속해서 응원해 주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몸이 무거워 보입니다! 아직까지 공을 제대로 뺏어 내지 못하고 있는데요.』
캐스터의 설명이 이어질 때였다.
투우욱!
이번에도 앨런에게 공이 날아갔고, 박상민이 달려들었다.
퍼어어엉!
그런데 앨런은 박상민이 다가오는 순간, 곧바로 대각선 방향으로 공을 날렸다.
라인을 올린 무둔바와 신준석의 중간이었다.
실력에 적당한 운이 달라붙은 멋진 패스였다.
와락!
쿠티뉴가 무둔바와 신준석의 중간에서 뛰어들어 공을 잡았고,
툭툭!
무둔바를 좌우로 흔든 뒤에 골대를 향해 달렸다.
정지우는 빠르게 오른쪽 골포스트 옆으로 움직였다.
오리지, 피르미노, 엠레찬이 골대 앞으로 달려드는 순간,
투우우욱!
쿠티뉴가 왼편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달려 나가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정지우는 빠르게 공을 따라 왼편으로 움직였다.
박상민은 수비에 치중했다.
녀석이 골대 왼편에서 오리지를 막아 준 덕분에 공은 그를 지나쳐 흘렀다.
와락! 와락!
스웰던과 피르미노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피르미노가 빨랐다. 아니, 스웰던이 늦었다.
정지우는 몸의 중심이 왼쪽으로 쏠리는 피르미노의 발끝을 악착같이 노려보았다.
퍼어어엉!
‘왼쪽!’
낮게 깔리는 슈팅이었다.
터어엉!
그런데 왼편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에 스웰던이 뻗은 발에 공이 걸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 오른 공이 슈팅보다 절묘하게 오른쪽 구석을 파고들고 있었다.
‘끄응!’
정지우가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공의 속도가 워낙 빨랐다.
늦었다. 솔직히 이건 늦은 거다.
정지우가 이를 악물며 몸을 던진 순간이었다.
휘이이익!
골대를 향해 달려오던 신준석이 높다랗게 뛰어올랐다.
터어엉!
『신준석! 신준석이 거의 들어간 공을 머리로 끄집어냅니다!』
“우-!”
리버풀 관중들의 탄식이 안필드를 꺼트릴 것처럼 터져 나왔을 때, 박상민이 오리지와 피르미노 사이에서 공을 잡아 멀찍이 걷어 냈다.
정지우가 벌떡 일어나 뻗은 손을 툭 하고 마주친 신준석이 빠르게 오른쪽 자리로 달렸다.
『박상민, 정지우, 신준석! 우리 선수들이 한 골을 지켜 냅니다!』
『이상할 정도로 오늘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움직임이 둔하네요. 유로파 리그 경기의 후유증도 아닐 텐데요. 혹시 감기가 돌아서 선수들 전체가 영향을 받은 건 아닌가 싶은데요.』
박상민이 걷어 낸 공을 헨더슨이 잡았다.
이정렬이 얼마나 악착같이 따라붙었는지 헨더슨은 아예 수비수 사코를 향해 길게 공을 넘겨주었다.
『이정렬 선수가 최근 경기에서 박상민만큼 뜁니다!』
『저렇게 앞에서 막아 주는 게 효과가 훨씬 큰데요. 유니온 시티, 정상 컨디션이 아닌 것처럼 보이네요.』
정지우는 경기장 전체를 훑어보았다.
이대로 나가면 어차피 한두 골 차이로 지는 경기다.
“상민아!”
정지우는 손을 입에 대고 커다랗게 박상민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