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경기였다. (2)
유니온 시티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었다.
새로운 전술에 자신이 생겼고,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선수들이 수시로 위치를 바꾸며 뛰었다.
12월 6일에 있었던 스완지와의 원정 경기에서 유니온 시티는 시종일관 스완지를 압도했고, 이정렬이 두 골, 레믹이 한 골을 넣어 3 대 0으로 또 한 번의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박용근의 승리하는 축구 전술>
<스트라이커 고민, 이정렬이 답이 될까?>
<영국을 흔든 한국 축구, 유럽이 경계한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연달아 포털 사이트 스포츠 칸에 올라왔다.
솔직히 박용근이나 이정렬과 제대로 인터뷰한 뒤에 올라온 기사는 없었는데, 그걸 또 뭐라 할 건 없었다.
기사마다 댓글이며 조회 반응이 워낙 좋았다.
<나이트에서 영국 축구의 중심으로>
<평택에 박상민 거리 생긴다.>
그래서인지 박상민을 주제로 한 글들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레알 마드리드, 네 명의 한국 선수 한꺼번에 노린다.>
<월드컵 본선 진출국, 한국과 마주치기 두렵다.>
<한국이 부러운 중국, 시기하는 일본>
전혀 신빙성 없는 기사들도 줄줄이 올라왔다.
12월 6일 스완지전에 이어 12월 11일은 유로파 리그 모나코와의 경기였다.
1.5군을 내세운 유니온 시티는 이 경기를 2 대 1로 패했는데, 감독부터 선수들, 관중들까지 크게 아쉬운 기색은 없었다.
『맨유전을 5 대 0으로 완벽하게 물리친 유니온 시티는 이어진 스완지와의 경기를 3 대 0으로 승리하면서 리그 선두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스포츠 뉴스 시간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유니온 시티의 소식이 전해졌다.
『만약 12월 박싱데이를 지나고도 유니온 시티가 계속 선두를 유지한다면 리그 우승의 8부 능선을 넘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행운을 잡은 홈 관중들의 이야기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자는 레드 블레이트의 광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보도를 전하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의 우승에 우리 돈 10만 원가량을 베팅한 홈 관중들은 지금 당장 우리 돈 2천만 원 이상에 판매할 수 있어서, 이미 200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린 이들도 많습니다.』
TV 화면에 양팔을 들고 환호하는 관중들의 모습이 나왔다.
『유니온 시티는 최근 엄청난 활약을 보이는 우리 선수들을 위해 메뉴에 한국 음식을 추가할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쏟고 있습니다. 이상 영국 유니온 시티, 레드 블레이트에서 전해 드렸습니다.』
경기가 없는 날의 뉴스는 이 정도였다.
유니온 시티의 홍보 담당 매니저 에이미는 직원 두 명을 더 고용했음에도 연일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지친 얼굴이었다.
“미스터 유! 제발 좀 도와줘요!”
그녀는 늘 유정호를 붙잡고 통사정했고, 정지우에게 신임을 얻고 있는 클락과 반트에게도 매달렸다.
한국 방송사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우리 선수들과의 인터뷰를 원했고, 일주일에 서너 편씩 레드 블레이트를 배경으로 한 예능 프로그램의 섭외가 쇄도했다.
에이미는 정지우에게 말도 꺼내지 못한다.
쥬피터의 아침 인사가 ‘Ji의 컨디션은? Lee나 Sang, Jun이 불편해하는 건 없나?’이다.
만약 정지우가 또 차가운 눈을 하고 ‘이적을 원하는 거냐?’ 하는 한마디를 날린 뒤, 구단에 대고 에이미 때문에 이적하겠다고 하면?
에이미는 물론이고 홍보실 전체가 단박에 날아가 버릴 거다.
어떻게 된 게 정지우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에 인터뷰에 응했었던 이정렬마저 에이미를 괴물 보듯 한다.
“미스터 유! 나중에 무조건 신세 갚을게요!”
한국에서 온 제작사가 하루 예능 프로그램을 찍고, 정지우를 비롯한 4명의 선수가 참여한다면 지원하겠다는 금액이 한화로 5억에서 10억이 넘는다.
10개만 찍어도 홍보팀의 실적과 인센티브가 어마어마한 거다.
“에이미, 지우에게 신청 들어온 광고만 다 찍어도 당장 천억이 넘어요. 그런데 나도 계약 하나 못했어요.”
“프로 선수잖아요!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프로 선수는 벌어들이는 금액이 자신의 수준을 증명한다.
에이미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아직 그런 것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네요. 지금은 좀 더 실력을 쌓아야 할 때라고.”
“말도 안 돼!”
에이미는 벽에 털썩 기댈 정도로 놀라고 실망한 얼굴이었다. 유정호의 답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면 인터뷰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괜히 실적을 생각하거나 안면 있는 영국 코디네이터들의 청을 들어주려다가 홍보실 전체를 날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12월 15일 화요일.
유니온 시티는 첼시와 레드 블레이트에서 리그 16라운드 경기를 가졌다.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유한 첼시는 유니온 시티에게 패하면 4연패가 될 정도로 최근 성적이 좋지 않았다.
첼시는 마치 0 대 0 무승부가 목표인 것처럼 처음부터 10명의 선수를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 묶어 두고 유니온 시티의 득점을 꽁꽁 묶으려 했다.
당연히 미드필더 진영에서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유니온 시티의 2 대 0 승리였다.
박상민의 멋진 크로스를 슈퍼맨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달려든 이정렬이 머리로 정확하게 골대 구석에 넣었고, 후반 막판 역습 찬스에서 레믹이 멋진 중거리 슈팅으로 추가골을 만들어 냈다.
첼시전 승리 이후, 유니온 시티의 베팅 권리 가격이 5천만 원으로 수직으로 상승했다.
12월 20일 에버턴전은 또다시 유니온 시티의 3 대 0 승리였다. 베팅 권리는 8천만 원까지 치솟았다.
한국의 기자들과 방송 매체들이 유니온 시티 주변에 상주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정지우는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에 이정렬, 박상민, 신준석 중 한 명이라도 나와 10분, 아니 5분만 대화를 나눠 준다면,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할 테니 운동하는 중간에 어떤 복장이어도 좋으니까 잠시 나와 악수만 해 준다면.
다음 경기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리버풀과의 원정 경기였다.
FA컵에서 붙었던 리버풀이다.
당시와 달리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리버풀의 감독과 선수들이 유니온 시티에게 절대 지지 않을 준비를 마쳤다고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었다.
정지우는 늘 같았다.
훈련, 경기, 훈련,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 데이지와의 데이트가 정지우 생활의 전부였다.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에 정지우는 병원으로 향했다.
어차피 데이지가 당직이고, 정지우는 26일에 경기가 있어서 다른 계획을 세우기도 어려웠다.
먼저 릴리의 병실에 들렀다.
“Ji!”
건강해진 릴리는 10센티미터쯤 머리카락이 자랐고, 덩치가 부쩍 커졌다.
“나 퇴원해!”
“이런! 스무고개를 해서 맞히게 하겠다면서?”
메기의 말에 릴리가 활짝 웃었다.
기쁜 소식을 감추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인데?”
릴리를 안아 준 정지우는 메기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마쳤다.
“이건 내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
정지우는 릴리에게 예쁜 리본으로 묶어 놓은 서양식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받은 릴리가 시선을 들었고, 메기가 궁금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퇴원하면 다녀와. 한국 여행 티켓이야.”
릴리와 메기가 비슷하게 멍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여행사에서 숙박과 차량, 가이드까지 준비할 거야. 몸만 다녀와서 한국이 어땠는지 들려줘. 그리고 건강하게 돌아와서 레드 블레이트를 지켜 주고.”
“Ji, 이건 너무 큰 선물이야.”
답을 하지 못하는 릴리를 대신해서 메기가 나섰다.
“릴리 덕분에 다시 축구 할 수 있었던 거잖아요. 릴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와 준 것에 비하면 그렇게 큰 건 아니에요.”
메기가 감격해서 그랬을까?
릴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정지우에게 안겼다.
“이젠 무거워! 한국에 다녀오면 이렇게 안기 어렵겠는데?”
“고마워- 어, Ji!”
“나도 고마워, 릴리. 잘 견뎠어.”
늘 안타깝던 릴리의 작은 몸이 오늘은 행복으로 다가왔다.
릴리가 준비한 선물은 정지우가 수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며칠을 이걸 그리느라 끙끙댔을 릴리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정성이 담뿍 담겨 있어서 무척이나 고마운 선물이었다.
정지우를 위한 메기의 선물은 손으로 뜬 스웨터였다.
고마웠다.
이 선물을 위해 몇 날을 애썼을 정성이.
병실을 나선 것은 30분쯤 뒤였다.
당직인 데이지가 얻은 시간도 30분이었다.
둘이서 병원 옥상에 있는 휴게실로 움직였는데, 스태프 두어 명이 있다가 정지우에게 악수를 청한 것 외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미안해요. 오늘 같은 날은 그때 갔었던 언덕에 함께 가고 싶었는데.”
둘이서 유니온 시티의 야경이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데이지가 의사 가운에 달린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붉은색 포장지를 뜯자 종이 상자가 나왔다.
뭐지?
정지우는 왼손에 올린 종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웃음이 나왔다.
목걸이라니, 그것도 ‘Daisy’라는 글자가 달린 목걸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받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당신 안 놓칠 거라는 의미니까.”
병원에서의 데이지는 늘 같은 머리 스타일에 블라우스, 검은 바지, 하얀 가운 아니면 파란 수술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함께 식사하러 나갔을 때, 지금처럼 병원에서 만날 때도 그녀의 눈빛 역시 늘 같았다.
“이거 목에 걸면 되는 거죠?”
“후회하지 않겠어요?”
“어쩐지 내가 해야 할 걸 뺏긴 느낌인데, 절대 놓치고 싶지는 않은데요?”
데이지가 손을 뻗어 정지우가 늘어트린 목걸이를 잡았다.
고리를 푼 그녀가 팔을 뻗어 정지우의 목을 감싸는 자세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데이지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녀의 숨결, 감촉이 차가운 밤기운 속에서 다가오는 봄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얼굴을 뗀 데이지가 반짝이는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아! 나도 선물이 있어요.”
정지우는 주머니에서 목걸이 상자와 비슷한 크기의 상자를 꺼내 데이지에게 건넸다.
“사실은 반지를 하고 싶었는데 당장은 좀 더 실용적인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구단에서 준 건데 내가 쓸 일도 없구요.”
“뭐예요? 그런 걸 그렇게 솔직하게 다 말하면 어떡해요?”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 데이지가 포장을 풀고는 상자를 열었다.
데이지가 놀란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싫은 건가요?”
“아니, 그보다는 좀 당황스러워서요. 이건 내게 너무 과한 거기도 하고.”
“그냥 세워 두는 거로 하죠.”
“Ji! 독일 차예요! 그것도 가격이 엄청난!”
“유지비가 나온다던데요?”
“그게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받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당신 안 놓칠 거라는 의미니까.”
데이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한 거였다.
기가 막힌 것처럼 웃는 데이지의 입술에 정지우가 가볍게 입술을 가져갔다.
“받아 줘요. 그리고 가끔 전에 갔던 그 나무에 데려다주고요. 당신이 조금 더 안전한 차를 탔으면 싶었어요.”
“후-!”
데이지는 마음의 준비가 아직 필요한 모양이었다.
25일에도 간단한 훈련이 있었다.
영국의 추위는 이상하게 뼈를 파고드는 느낌이어서 겨울에는 반드시 경기 전날 몸을 풀어 주는 게 좋았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경기 전날 훈련에서 허리나 무릎, 혹은 허벅지 근육을 다쳐 2주씩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나오곤 했다.
추운 날씨에서 제대로 풀리지 않은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무거운 얼굴을 하고 식당으로 움직였다.
지금까지 분위기는 최고였다.
그러나 오늘은 지나치게 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타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레믹과 데니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고, 몇몇 선수들 역시 얼굴이 좋지 못했다.
음식을 가져온 이정렬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이런 모습이었던 거지?”
동기들 역시 동료들의 변화를 알아챈 얼굴이었다.
“리버풀이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던데…….”
신준석의 말을 끝으로 더 다른 말은 없었다.
이런 건 완벽하게 개인적인 문제여서 경기를 망치지 않는 한, 미리 듣기 싫은 소리를 할 건 아니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점심을 먹은 정지우는 개인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국에서 맞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이 떠들썩한 날은 유독 외롭게 느껴진다.
경기 전날이긴 하지만, 저녁에는 유정호와 신윤희까지 다 함께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떡국이었다.
뜬금없긴 했는데 이게 또 나쁘지 않았다.
리버풀의 경기를 앞둔 전날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