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23화 (223/262)

제2장.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경기였다. (1)

TV 화면이 정지된 다음, 신준석이 움직였던 방향을 화살표로 그려 주었다. 그 뒤에 주변에 있는 유니온 시티와 맨유 선수들에게 동그라미를 쳐서 그들의 동선을 알려 주었다.

『마틴 감독의 완벽한 대비가 거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침몰시키고 있습니다!』

『아직 섣부른 감이 있지만, 지금까지만 놓고 본다면 유니온 시티, 오늘 경기를 제대로 준비했다고 볼 수 있네요! 이전 경기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고, 속도예요.』

박상민이 데 헤아를 피해 왼발로 공을 패스하는 모습이 나왔고, 이어서 레믹이 공을 욱여넣고 골대 안에 처박히는 모습이 다시 나왔다.

『신준석이 공을 가로채고 슈팅까지 5초 남짓 걸렸어요! 굉장합니다! 거기에 이번엔 레믹까지 멀티골을 기록했거든요! 박상민을 막았을지는 몰라도, 이정렬과 레믹을 이대로 둔다면 맨유는 추가 실점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화면이 유니온 시티 관중석을 보여 주었다.

어깨를 맞잡고 우렁차게 응원가를 부르는 홈 팬들의 모습이었다.

벤치 앞 테크니컬 지역에 당당하게 서 있는 마틴 감독과 대각선 뒤편 맨유 벤치에 침울하게 앉아 있는 반 할 감독의 모습도 나왔다.

후반 30분, 스코어는 5 대 0이었다.

짝. 짝. 짝. 짝. 짝.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우리는 최고의 팀)!”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로 응원 구호를 연신 불러 댔다.

반면에 맨유의 원정 팬들은 입술을 뜯거나, 양손을 머리에 올린 채 침울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삐이익!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헤이!”

데이빗이 양팔을 들어 동료들을 향해 눌러 보였다.

‘흥분하지 마! 아직 15분이나 남았어!’

그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동료들 모두 알아들었다.

맨유는 섣불리 나오지 않고 처음으로 자기 진영에서 공을 돌리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맨유! 공을 돌리며 흐름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승부를 뒤집기는 어려워 보이는데요, 그렇더라도 다음 경기를 위해 한 골이라도 만회할 필요는 있어요.』

『맨유라면 한 골 정도는 넣을 수 있지 않을까요?』

『충분히 가능한 팀이긴 한데 골키퍼가 정지우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대개 부상에서 돌아오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데 정지우 선수! 정말 굉장합니다!』

캐릭이 공을 잡았다.

“우와- 아!”

그런데 경기 초반과는 다르게 박상민이 악착같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이어서 레믹까지 가세하고 있어서 관중들이 기대에 찬 함성을 질러 댔다.

『캐릭이 박상민에게 제대로 묶여 버렸어요. 맨유는 캐릭이 공을 소유하고 공수를 조율해 줘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박상민에게 완전히 막혀 버린 모양새거든요.』

공은 맨유의 진영을 바쁘게 돌았다.

퍼어엉!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달려들 때마다 대각선 너머로 길게 빼 줄 때도 있었고,

투욱! 투우욱!

마타에게서 마시알로, 마시알에게서 슈바인슈타이거로 빠르게 움직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당장 유니온 시티 진영을 향해 넘어오지는 않았다.

선수들이 당황했다는 의미였다.

캐릭이 공을 잡을 때였다.

와락! 콰악! 콰다당!

박상민이 뛰어들었고, 캐릭이 옆으로 커다랗게 넘어졌다.

삐이이익!

주심은 박상민의 파울을 선언했다.

『박상민! 초반의 상황을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캐릭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습니다!』

『캐릭을 빼고 그 자리에 공중볼과 몸싸움에 능한 펠라이니를 넣는 게 어떨까 싶네요.』

삐이이익!

『유니온 시티! 선수 교체입니다!』

『이정렬을 빼 주네요! 오늘 이정렬 정말 많이 뛰었습니다! 교체해 주는 게 맞아요!』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이정렬이 벤치 방향으로 걷자 홈 관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그를 응원했다.

『홈 관중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 주고 있습니다!』

『이정렬! 오늘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한 실력을 보였어요! 굉장합니다! 박용근 키즈라고 불리던 우리 선수들! 오늘 가슴 벅찬 플레이를 펼쳐 줍니다!』

손을 들어 관중들에게 박수로 답한 이정렬이 데니와 손을 마주치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마틴이 오른손을 내밀어서 녀석이 맞잡았다.

꽈아악!

그런데 뜻밖에도 마틴은 이정렬을 끌어당겨서 안은 다음, 등을 서너 번 다독여 주었다.

감독이 교체 선수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멋진 모습이었다.

마틴을 향해 씨익 웃어 준 이정렬이 벤치로 움직였다.

놀라운 광경은 그 직후에 펼쳐졌다.

벤치 앞에 도착한 이정렬이 박용근을 향해 상체를 깊숙하게 숙이며 꾸벅 인사한 거였다.

영국 전역으로, 한국으로, 전 세계로 중계되는 경기다.

박용근의 볼이 씰룩이는 것을 정지우는 분명하게 보았다.

울컥한 감정을 표시 내지 않으려는 박용근의 노력이었는데, 벤치 위에서 지켜보던 전은주가 울먹이는 얼굴로 물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경기가 다시 진행되었다.

이정렬을 대신해 들어온 데니가 공을 쫓아 악착같이 달리며 맨유 선수들을 괴롭혔다.

숨이 뚫리기 전이다. 분명 들어오자마자 저렇게 달리는 것은 엄청나게 괴로울 거다.

그러나 동료들은 데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10여 분 남짓 남은 시간 동안, 동료들이 만들어 놓은 경기를 망치지 않겠다는, 조금이나마 도움 되는 플레이를 하겠다는 그의 각오가 확연하게 드러나 있어서였다.

『박상민! 또다시 왼쪽에서 데파이를 막아섭니다!』

『오른쪽 측면에서 공격을 도왔는데요, 언제 또 저기에 있는 건지, 박상민 선수!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런 선수가……. 이제라도 발견되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해설자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레믹, 박상민이 수시로 위치를 바꾸었고, 그에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데니가 그라운드에 풀어 놓은 미친개처럼 달렸다.

시간은 꾸준하게 흘렀다.

다급한 맨유 선수들이 뻥뻥 공을 내질렀는데 역시나 효과는 없었다.

『신준석! 데니에게 패스! 데니! 박상민에게!』

“와아- 아!”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단지 공을 받았을 뿐인데 관중들이 일어나 박상민의 플레이를 박수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경기 중에 나오기 어려운 장면이에요! 누군가 공을 받아 줘야 하는 장소에는 반드시 박상민이 있는 거구요, 그걸 관중들도 알고 있다는 의미네요!』

『골은 없지만, 오늘 박상민! 맨유를 상대로 다섯 골 이상의 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새로 이사한 집이었다.

박상민의 부친은 상체를 세운 침대에 기대 커다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1인용 소파에 두 손을 모은 모친도 있었다.

52인치 커다란 화면에서 아들 박상민이 공을 몰고 움직이고, 그 아들을 향해 영국의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 주고 있었다.

입을 삐죽인 박상민의 부친이 얼른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온도, 습도가 조절되는 방이다.

전기 요금, 수도 요금, 가스비까지, 이 집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자동 납부로 해결된다고 해서 고지서조차 오지 않는다.

창밖으로 펼쳐진 야트막한 숲을 보며 감정을 가라앉힌 부친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투우욱! 툭!

『박상민! 데니와 2 대 1 패스! 골대를 향해 달리는 박상민! 이제 막 들어온 데니만큼이나 달립니다!』

콰아아악! 콰다당!

삐이이익!

슈바인슈타이거의 거친 태클에 높다랗게 떴다가 떨어진 박상민이 그라운드에 처박혔다.

‘상민아!’

부친이 다리를 덮은 담요를 꽉 쥐었을 때였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박상민!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기립 박수입니다!』

『전에 인터뷰에서 박상민 선수가 아버지를 닮아 통뼈라고, 그래서 체력은 자신 있다고 한 적이 있거든요. 체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경기 운영 능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지금은 오히려 맨유의 파울을 유도한 것처럼 보이네요.』

『그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했었는데, 이유를 물어보니까 큰 교통사고를 이겨 내고 가족들을 지켜 준 것이라고도 했었습니다. 가족들이 보고 있을 텐데 정말 자랑스럽겠습니다.』

화면에 박상민의 얼굴이 커다랗게 나왔다.

데니에게 위치를 지정해 준 박상민이 정지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씨익!

아들의 웃음을 보는 순간, 부친은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왜 그런지는 잘 몰랐다.

대기심이 추가 시간 2분을 알리는 패널을 높다랗게 들었고, 레드 블레이트에 추가 시간을 안내하는 멘트가 퍼져 나왔다.

『유니온 시티! 천천히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맨유 선수들! 무리하지 않고 있네요! 벤치에서도 교체 안 한 것을 보면 오늘 경기는 이렇게 끝내겠다는 의도인 것 같아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충격이 심하겠어요.』

『신준석! 데이빗에게! 데이빗! 데니에게!』

투우욱!

데니가 박상민에게 공을 넘겼고, 그 공이 다시 꼼빠니에게 건너갔다.

『주심! 휘슬을 입에 물고 있습니다! 유니온 시티! 130년 역사에 오래 기억될 경기가 끝나 갑니다!』

투욱!

꼼빠니가 스웰던에게 공을 넘겼고, 달려드는 데파이를 피해 정지우에게 공이 넘어왔다.

터억!

정지우가 발로 공을 밟는 순간이었다.

삐익! 삐익! 삐이이익!

“예에에에에에에에에-!”

『경기 끝났습니다! 유니온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5 대 0의 완벽한 승리를 이뤄 냅니다!』

캐스터가 흥분한 음성으로 경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웃옷을 벗어 빙빙 돌리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벤치를 걸어 나온 스미스가 마틴과 얼싸안았고, 스태프와 서브 선수들, 얀센과 이정렬이 서로를 안고 등을 두드렸다.

정지우는 골대를 벗어났다.

무둔바, 라파엘, 신준석, 스웰던이 다가와서 손을 맞잡고 어깨를 부딪쳤으며, 이어서 데이빗과는 머리를 붙잡고 이마를 마주 댔다.

“Ji! 내가 지금까지 상상으로만 그려 왔던 경기였다! 이런 팀의 주장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데이빗이 느끼는 벅찬 감동이 정지우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근처에 있던 맨유 선수들과 적당하게 인사를 나누었을 때였다. 박상민과 레믹이 다가왔다.

“너, 나 몰래 뭐 먹냐?”

박상민은 완전히 지친 얼굴을 하고도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지우야! 상민아! 우리도 감독님께 인사하자! 정렬이, 저놈! 은근히 영악한 데가 있다니까!”

레믹의 뒤통수를 툭 쳐 준 정지우의 시선 앞에서 신준석이 짓궂게 웃고 있었고, 박상민은 ‘이거 진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동료들과 인사를 하는 동안 응원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아서 여전히 레드 블레이트를 뜨겁게 달궜다.

박수로 관중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벤치 앞으로 다가갔다.

마틴을 비롯한 스태프와 선수들 모두 감격하고 흥분한 얼굴이었다.

“Ji! 오늘 굉장했다!”

마틴과 가볍게 안고 등을 두드려 준 다음이었다.

신준석과 눈짓을 주고받은 정지우는 박상민까지 셋이서 박용근을 향해 섰다.

꾸벅!

셋이서 하는 인사다.

이런 축구를 가르쳐 준 것에, 영국의 프리미어리그에서 밀리지 않는 실력의 선수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감정을 감추려고 이를 악물 줄 알았던 박용근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셋이서 이렇게 인사할 것을 말이다.

박용근 역시 정지우의 표정과 눈을 통해 생각을 눈치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아침 뉴스의 가장 첫머리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경기 소식이었다.

『유니온 시티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5 대 0으로 이기고 리그 선두를 지켜 냈습니다. 이 경기에서 우리 선수 이정렬이 두 골을 넣었으며, 박상민이 두 개의 어시스트, 정지우가 여러 차례의 선방을 선보여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경기의 주요 장면이 연달아 나왔다.

『영국의 스포츠 매체들은 일제히 유니온 시티의 기록적인 대승을 보도하는 한편, 유니온 시티가 리그 선두 자격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벤치 앞에서 홈 관중들에게 손뼉을 치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이 나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은 이 경기가 끝난 직후, 반 할 아웃이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으며, 관계자들 사이에서 반 할의 경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상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뉴스는 이어서 호프집을 잠시 보여 주며 응원 열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인터넷 포털 매체는 더 엄청났다.

유니온 시티의 승리에 관한 기사마다 댓글이 수천 개씩 달렸고, 득점 장면과 선방 장면의 조회 수가 백만 단위를 단숨에 넘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