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22화 (222/262)

제1장. 최고였어! (2)

상황을 설명하는 캐스터는 어쩐지 재미있다는 투였는데, 항의한다고 판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그래도 이름값이 있어서인지 루니의 말을 들어 준 주심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삐익!

박상민은 주심의 휘슬과 동시에 스웰던에게 공을 차 주었다.

스웰던은 라파엘에게, 라파엘이 정지우에게 공을 돌리며 유니온 시티는 천천히 기회를 엿봤다.

신준석은 오른쪽에서 라파엘의 동선에 맞춰 앞으로 두 걸음을 나섰다.

축구 게임에서, 혹은 상상 속에서나 상대했던 맨유 선수들이 중앙선 저 너머에 있는 거다. 그런데도 그다지 크게 긴장되거나 떨리지 않았다.

신준석은 라파엘에게 패스하는 정지우를 힐끔 보았다.

유니온 시티의 동료들 역시 지금의 신준석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막말로 그라운드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사람이 동기이고, 한 팀 동료인 거다. 그게 아니라면 축구 게임을 하는데 게임 만든 사람이 골키퍼로 있거나, 뭐 그런 느낌이기도 했다.

“헤이! 라파엘!”

정지우의 고함과 손짓은 예전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투우욱!

공은 박상민에게 넘어갔다.

퍼어어엉!

그리고 박상민은 공을 잡자마자 곧바로 대각선 오른편에 있는 카알에게 넘겨주었다.

투욱!

카알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것처럼 이정렬에게 패스했다.

“우와- 아!”

이정렬이 공을 잡자 기대에 찬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휩쓸었다.

『이정렬! 또다시 맨유의 진영을 파고듭니다!』

『맨유 수비수들이 흔들리고 있어요! 이럴 때는 빠르게 넘겨줘야죠!』

캐릭이 달려들자 이정렬은 중앙에 있던 레믹에게 공을 찔러 주었다.

투욱!

레믹은 공을 받은 직후에 곧바로 골대를 향해 달리는 이정렬에게 다시 패스했다.

“우와아- 아!”

함성이 좀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이정렬은 왼편의 빈 곳으로 공을 툭 찔러 넣었다.

와락!

이번엔 꼼빠니였다.

악착같이 달려들어 공을 잡은 그는 엉뚱하게 뒤를 향해 공을 빼 주었다.

터억!

공은 박상민이 잡았다.

캐릭과 슈바인슈타이거가 박상민과 이정렬 사이에서 위치를 잡지 못할 때였다.

투우욱!

박상민이 맨유의 골대 오른쪽을 향해 빠르게 공을 넘겼다.

휘이이익!

한편인 정지우가 보기에도 소름 끼치도록 멋진 장면이었다.

박상민이 감아 찬 공을 노리고 레믹이 높다랗게 떠 있었다.

데 헤아가 자세를 잔뜩 낮췄고, 뒤늦게 스몰링과 블린트가 달려들었다.

터어엉!

레믹의 헤더는 날카로웠다. 이정렬의 두 골을 보고 나서 독이 잔뜩 오른 느낌이었다.

화아아아악!

데 헤아가 오른쪽 코너를 향해 몸을 날렸다.

터억!

그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공을 끝내 막아 냈다.

벌떡 일어났던 골대 뒤의 관중들이 뒤로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워낙 급해서 겨우 앞으로 쳐 낸 공을 레믹이 가슴으로 받았고, 발 앞으로 떨어진 공을 그대로 툭 차 넣었다.

휘이익! 콰아아악!

맨유의 수비수 맥네이가 몸을 날리며 허공에서 발을 휘둘렀고, 다르미안이 공을 막기 위해 그라운드로 몸을 던졌지만,

철렁!

또다시 맨유의 골망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예에에에에에-!”

『박상민의 어시스트! 레믹의 골! 유니온 시티! 후반 시작하자 반 할 감독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득점에 성공합니다!』

레믹이 곧바로 박상민에게 폴짝 뛰어들었고, 이정렬이 달려가 박상민과 레믹을 끌어안았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골키퍼 데 헤아다.

그런 그가 벌떡 일어나 골대 안의 공을 걷어차는 동안,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터치라인 옆에서 이마를 마주 대며 득점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이! 굿바이!”

후반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유니온 시티의 홈 관중들이 대놓고 맨유의 선수들과 관중들을 자극했다.

그동안 약팀이라고 감수해야 했던 수모를 털어 내는 것처럼 보였다.

호프집은 또다시 카운터와 소파에 손님들이 올라가 있었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으짜으짜! 으짜라라- 으짜!”

목이 터져라 다 같이 부르는 응원가였다.

“그 한마디였었네! 으짜으짜! 으짜라라- 으짜!”

영국 리그에 속한 유니온 시티의 경기다.

딱히 맨유에 감정이 있는 손님들도 없었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으짜으짜! 으짜라라- 으짜!”

그런데도 사장과 손님들, 심지어 말리던 직원들까지 목청껏 맨유를 약 올리는 응원가를 불러 대고 있었다.

사장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힐끔 돌아본 곳에 정지우가 준 유니폼 상의가 있었다.

등 번호가 새겨진 곳에 박상민, 이정렬, 신준석의 사인도 보였다.

그날 유니폼을 건네주던 정지우를 떠올린 사장은 갑자기 울컥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눈시울을 붉혔다.

“평생 당신을 응원할 겁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어디에 있든, 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사장의 고함이 호프집에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마타가 넘겨준 공을 잡은 루니가 무턱대고 밀고 내려오다 박상민과 다시 뒤엉켰다.

삐이이익!

박상민의 어깨를 사정없이 잡아챘던 루니가 파울이 선언되자 독이 잔뜩 오른 얼굴로 자기 진영으로 움직였다.

『어떻습니까? 맨유 벤치에서 교체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이네요. 박상민과 이정렬이 위치를 바꾸면서 캐릭과 슈바인슈타이거의 역할이 이상해졌어요. 조금 전 루니가 혼자 밀고 들어온 것도 동료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로 보였거든요.』

『이정렬! 오늘 정말 많이 뜁니다! 지금은 오히려 캐릭 선수가 이정렬에게 꽁꽁 묶여서 제 플레이를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리듬을 완전히 뺏겼어요. 이대로라면 대량 실점도 나오겠는데요? 맨유 벤치! 교체를 통해 분위기를 바꿔 줄 필요가 있어요.』

파울로 얻은 프리킥이었다.

주심이 휘슬을 불자 박상민은 바로 데이빗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정말이지 번쩍번쩍 뛰어다녔다.

박상민은 그러려니 해서 아예 놀랍지도 않다.

정지우가 보기에도 이정렬은 오늘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는 선수처럼 달리고 있었다.

분위기에 워낙 잘 휩쓸리는 레믹까지 박상민과 이정렬의 틈에서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해 대고 있어서, 세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맨유 수비진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이정렬과 박상민의 위치가 또 바뀌었습니다!』

『레믹 좀 보세요! 지금 수비수 앞까지 내려와서 이정렬의 빈자리를 메워 줬어요! 레믹! 이정렬! 그리고 최전방 스트라이커 자리에 박상민이 달립니다! 환상적인 움직임이네요!』

물론 맨유의 반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조직력이 완전히 무너진 맨유는 루니와 마시알, 마타의 개인 능력에 의존해 경기를 풀어 나가는 게 전부였다.

콰악!

루니와 박상민이 또 부딪쳤다.

어깨로 밀고, 손을 뻗어 상대의 유니폼을 잡아챘는데 이번엔 루니가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삐이이익!

급하게 달려온 주심이 박상민과 루니를 향해 양 손바닥을 아래로 눌러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주심은 맨유 진영을 가리켰다.

“예에-!”

『주심이 어쩐지 유니온 시티의 편을 들어 주는 느낌까지 듭니다!』

『박상민 선수! 저렇게 힘이 좋았나요? 거기에 노련해졌어요! 절대 먼저 안 잡거든요. 어깨를 먼저 넣고 밀어 버리니까 루니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거죠.』

『루니! 캐릭과 마타에게 거칠게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서 파울을 얻어 내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경기의 흐름은 더욱 유니온 시티로 넘어오고 있었다.

투욱!

박상민은 곧바로 라파엘에게 공을 넘겼다.

급할 것 없다는 신호였다.

천천히 풀어 나가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와락! 와락!

마시알과 마타가 달려오자 라파엘은 정지우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퍼어어어엉!

멀리 날아간 공이 맨유의 중앙에 떨어졌고, 슈바인슈타이거와 이정렬, 레믹이 동시에 몸을 띄웠다.

터엉!

공은 슈바인슈타이거가 따냈다.

터억!

그러나 슈바인슈타이거가 악착같이 머리로 걷어 낸 공을 잡은 건 박상민이었다.

『박상민! 어느새 오른쪽에서 공을 잡습니다!』

『그라운드에 박상민이 세 명쯤 있는 것 같네요!』

『박상민 왼쪽으로 환상적인 패스! 꼼빠니! 앞으로 밀고 들어가는 꼼빠니! 유니온 시티! 또다시 빠르게 맨유의 진영으로! 맥네이를 앞에 두고! 꼼빠니! 센터링!』

꼼빠니가 길게 보내 준 공이 맨유 골대의 오른쪽 포스트를 살짝 지나쳐 떨어졌다.

빠르게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데 헤아 앞에서 레믹, 이정렬이 달려들었고, 두 사람의 뒤에서 박상민이 나오는 공을 노렸다.

맨유의 중앙 수비수 스몰링과 오른쪽 수비수 블린트가 물론 더 빨랐다.

스몰링이 레믹을 막아섰고, 블린트가 떨어지는 공을 향해 발을 내밀었다.

터엉!

블린트의 발에 맞은 공이 엉뚱하게 튀었고,

철렁!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가 골 그물을 커다랗게 흔들었다.

“예에에에에에에-!”

『맨유, 이래서는 어렵겠습니다.』

『교체할 거예요. 이대로 계속 두면 4점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보세요. 맨유 선수들, 완전히 사기가 꺾여 버렸어요.』

『지금은 오히려 유니온 시티가 선두다운 경기를 보여 주고, 맨유는 아예 강등이 확정된 팀처럼 보입니다.』

삐이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를 교체합니다!』

『루니를 빼 주네요?』

해설자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투의 음성으로 놀라움을 전했다.

『10번 루니를 빼고 그 자리에 7번 데파이를 넣네요. 차라리 중원을 좀 더 단단하게 할 선수가 필요한 거 같은데요.』

『후반 67분! 반 할 감독은 루니를 빼고 교체로 7번 데파이를 넣었습니다.』

4 대 0의 스코어에서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저렇게 무너지던 팀이 만회골 하나에 낙지 먹은 소처럼 벌떡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다.

“라파엘!”

정지우는 맨유의 움직임에 따라 수비 라인을 조금씩 조절하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틴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팔짱을 낀 자세가 아니다.

세계적인 감독들이 강팀들을 이겨 내는 순간에 바지에 손을 넣고 있는 사진들을 볼 때마다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던 자세였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다.

이걸 아는 사람은 어차피 스미스밖에 없다.

70분이 넘었다.

남은 시간은 20분인 거다.

정지우가 골대를 지키고, 이정렬과 박상민, 레믹이 미친 선수들처럼 그라운드를 헤집고 있으며, 거기에 자극받은 다른 선수들이 말처럼 달린다.

그래도 축구란 모르는 거다.

슬쩍 몸을 돌린 마틴은 벤치를 바라보았다.

‘Lee가 너무 지친 게 아닐까요?’

‘괜찮을 겁니다. 살펴보다가 문제가 있어 보이면 따로 말하겠습니다.’

박용근과 의미 있게 시선을 교환한 마틴이 흐뭇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미칠 것 같다. 좋아서.

그는 골대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정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 저 동양인 선수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투욱!

다르미안이 중앙으로 보낸 공이 마타에게 연결됐고,

투욱!

곧바로 마시알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이었다.

터억!

신준석이 마시알과 부딪칠 것처럼 달려들어서는 단숨에 공을 가로챘다.

“예아아-!”

멋진 가로채기에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 나왔다.

툭!

신준석은 카알에게 공을 주고는 곧바로 앞을 향해 달렸다.

투욱!

공을 받은 카알은 바로 방향만 바꿔 죽어라 달리는 신준석의 앞으로 공을 흘려주었다.

『카알과 멋진 2 대 1 패스로 영을 제친 신준석! 중앙선을 단숨에 넘어갑니다!』

이정렬, 박상민, 꼼빠니가 신준석을 호위하는 것처럼 맨유의 골대를 향해 달리고, 레믹이 맨유 수비수들 틈에서 기회를 노렸다.

『신준석! 거침없이 달립니다! 신준석! 스몰링을 앞에 둔 신준석!』

투욱!

신준석은 왼쪽의 꼼빠니에게 공을 빼 주었다.

툭!

그 공을 꼼빠니가 바로 박상민에게 패스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이다.

박상민에게 공이 가자 캐릭과 중앙 수비수 스몰링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왼쪽으로 방향을 튼 박상민을 따라 캐릭과 스몰링이 자세를 바꾸는 순간,

투욱!

박상민이 발뒤꿈치로 공을 차 뒤로 보내 버렸다.

“우- 아!”

공은 그대로 신준석의 앞으로 흘러왔다.

박상민에게 집중하다가 급하게 방향을 틀어야 했던 스몰링이 중심을 잃고 그라운드에 엎어지는 순간에, 블린트와 영이 신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투욱!

신준석은 공을 잡지 않고 바로 맨유의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로 밀어 넣었다.

다시 박상민이었다.

퍼엉!

녀석은 뛰어나온 골키퍼 데 헤아를 피해 골대 정면을 향해 공을 날렸다.

데 헤아가 휘두른 팔 아래로 공이 빠져나갔다.

와락! 와라락! 와락!

신준석, 레믹, 이정렬, 스몰링, 데이빗, 블린트, 영이 동시에 공을 향해 뛰어들었고,

터억!

공은 레믹의 발에 걸렸다.

투박한 자세로 공에 발을 댄 레믹이 스몰링의 발에 걸려 골대 안으로 처박혔다. 그리고,

삐익!

주심이 중앙선을 손으로 가리켰다.

“예에에에에에에에-!

『골! 고오올! 레믹! 유니온 시티의 레믹이 맨유를 상대로 두 번째 골을 뽑아냅니다!』

캐스터의 목이 갈라져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와아- 아!”

“히이- 아아!”

관중석에서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괴성들이 터져 나오는 동안, 동료들이 달려가 레믹의 머리통을 아파 보이도록 두들겨 댔다.

『맨유를 상대로 두 명째 멀티골을 기록합니다! 박상민은 두 개의 어시스트! 130년, 유니온 시티의 오랜 소망을 모두 우리 선수들이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느린 그림이 한 번 나왔고, 이어서 물을 마신 뒤에 뒤통수를 쓸어내리는 맨유 반 할 감독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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