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정지우는 골키퍼다. (2)
박용근과 박상민이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였다.
한가해진 시간에 정지우는 서재로 움직였다.
“감독님.”
“어? 그래. 무슨 일이냐?”
자료에서 시선을 든 박용근이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정지우를 맞았다.
“엉뚱한 생각이 든 게 있어서 의논드려 볼까 하구요.”
“엉뚱한 생각?”
“예. 지난번 아스널전 이후로 맨유나 첼시, 리버풀, 토트넘의 경기들을 보며 생각난 게 있어서요. 그냥 어떠신지 알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거니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얼른 설명부터 해 봐.”
박용근이 넉넉한 태도로 정지우의 설명을 기다렸다.
전술지를 한 장 펼친 정지우는 그 위에 선수 이름을 적고 대략 20분에 걸쳐 움직임을 설명했다.
“흠.”
박용근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이걸 한번 볼래?”
그러면서 그는 왼쪽에 놓인 서류 위쪽에서 전술지 한 장을 꺼내 정지우 앞에 놓아 주었다.
“어? 감독님?”
놀랐다. 박용근이 이런 것을 준비해 놓았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었다.
“포지션 구성에서 네가 좀 더 파격적이긴 한데, 나 역시 이런 전술을 고민하고는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약점이 드러난 상황인 데다, 선수층이 얇으니까.”
“저는 감독님께서 가르쳐 주신 역습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다가 생각해 낸 겁니다.”
“녀석, 한국에 다녀오며 사실은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꼭 그랬던 건 아닙니다.”
잔잔한 감동이 떠다녔다.
“마틴 감독에게 말해 볼 만은 하겠구나. 언제 할래?”
“제가요?”
이런 건 박용근이 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네가 구상한 전술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는 것을 너도 계산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박용근의 말뜻을 정지우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적어도 팀을 완벽하게 지켜 줄 골키퍼가 있어야 하지. 네가 없다면 이 전술은 무모하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아. 그런데 정말 이런 전술을 감당할 자신은 있는 거냐?”
“이기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갸웃한 박용근을 보며 정지우는 설명을 이었다.
“골키퍼의 한계를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챔피언십에서도, 프리미어리그 승격 후에도 지지 않는 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무언가 알겠다는 것처럼 박용근은 정지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실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팀이 득점한 점수만큼은 지켜 낼 자신이 있습니다. 이겨 보고 싶습니다, 감독님. 세계적인 강팀을 상대로 최선의 목표가 무승부라는 게 싫었습니다.”
“녀석.”
박용근의 눈 끝에 애잔한 미소가 달렸다.
“마틴 감독에게 솔직하게 말해 봐. 그 역시 비슷한 구상을 생각하고는 있을 거다. 그리고 그분의 가장 큰 장점이 스태프와 선수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감독님.”
“밑도 끝도 없이 뭐가 고마워? 하긴, 나도 너에게 이렇게 성장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둘이서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다음 날, 정지우는 박상민, 신준석과 함께 레드 블레이트로 향했다.
반갑게 맞아 주는 동료들과 한바탕 인사를 나눈 뒤에 정지우는 마틴의 사무실로 갔다.
“자네를 보니 마음이 다 가벼워지는군.”
양 손바닥으로 가슴을 짚어 보인 마틴이 반갑게 정지우를 맞았다.
“여행은 어땠나? 인터뷰 기사는 나도 봤다.”
“좋았습니다.”
“눈을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군. 앉지.”
책상 앞에 앉은 정지우에게 마틴이 홍차를 놓아 주었다.
“마셔 봐. 나이가 드니까 깊은 맛이 좋아지더군.”
정지우는 마틴의 권유대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여행 소감을 들려주기 위해서 나를 찾은 건 아닐 거고?”
“생각했던 전술이 있어서 어제 박 감독님과 상의했었습니다.”
마틴은 어서 계속해 보라는 투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술지가 있으면 싶습니다.”
“아! 그런가?”
마틴이 얼른 전술지와 연필을 건네주었다.
“아스널을 상대하면서 답답하게 느껴졌던 점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점들을 고민하다가 떠오른 전술입니다.”
정지우는 어제 박용근에게 했던 것처럼 선수 명단을 먼저 적고, 그들이 움직일 동선을 설명했다.
어젯밤과 비슷하게 20분쯤의 시간이 흘렀다.
“흐흠.”
마틴이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전술지를 노려보았다.
“자네의 능력을 완벽하게 신뢰해야 가능한 전술이군.”
“죄송하지만, 이런 전술에서는 무실점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렇더라도 우리가 넣는 골보다는 적은 실점을 하겠다는 자신이 있으니까 이런 전술을 들고 나온 게 아닌가?”
매번 박용근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틴은 이런 날카로운 눈을 지니고 있는 거였다.
질문을 던진 마틴이 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박 감독은 뭐라고 하던가?”
“선수 기용을 좀 다르게 해서 비슷한 전술을 생각하고 계셨었습니다.”
정지우는 박용근이 구상했던 명단을 전술지 위에 다시 적어 넣었다.
“이건 그나마 안정적이긴 하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정지우는 마틴을 보며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Lee를 이렇게 기용하는 것이 그에 대한 자네의 의리인가, 아니면 정말 우리 팀을 위해서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인가?”
“리저브 팀에서 정렬이의 역할을 대신할 선수가 있다면 누굴 기용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일들이 있어서 저는 정렬이가 그 누구보다 팀에 헌신적인 플레이를 펼칠 거라 확신합니다.”
마틴이 무언가 결심이 필요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11월 29일이 맨유와 홈경기다. 그때까지 이 전술을 익혀야 하는데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리그 경기가 주말마다 있는데?”
“그동안 실점이 늘어날 텐데, 그 부분은 아무래도 감독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정말 다이나믹한 리그를 경험하게 하는군.”
어쩌면 불만스러움을 표출한 말처럼 들렸는데, 실제 마틴의 표정은 충분히 우호적이었다.
“내게 시간이 필요해.”
“코치.”
정지우는 마틴을 부르고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선수가 전술과 선수 기용에 관해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도를 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코치를 무시하거나, 권한을 침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Ji.”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번엔 마틴이 정지우를 불렀다.
“우리가 챔피언십에서 프리미어리그로 다 함께 올라오는데 자네의 계약 조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역시나 자네의 활약에 힘입어 선두를 유지하고 있고.”
전술지에 시선을 주었던 마틴이 다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그라운드의 지배자가 되라고 했던 것이 나의 팀 운영 방식이다. 선수 선발과 운영을 박 감독에게 맡겨 둔 것 역시 같은 이유이고. 팀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라면 나는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 상관없다.”
마틴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차가 다 식었군.”
“단숨에 마시기 좋겠군요.”
마틴이 픽 웃었고, 정지우가 비슷한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그런데 정말 무실점 기록을 이렇게 포기할 수 있겠나?”
박용근과 마찬가지로 마틴 역시 이 전술의 약점을 이미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제도 박 감독님이 비슷한 질문을 했었습니다. 골키퍼의 한계가 무승부라면 난 이기는 경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무실점 무승부보다, 승리한 경기의 실점이 내겐 더 소중합니다.”
“그렇군.”
마틴이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대꾸해 주었다.
***
쥬피터는 두 명의 남자와 벽난로 앞의 탁자에 마주하고 있었다.
“Ji가 홈팬들과 개인적으로 모인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유니온 시티의 고문 변호사가 고용한 사설탐정 후크였다. 그가 변호사를 힐끔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돌아간 팬들이 모두 철강 노동자였는데, Ji의 무실점 선방과 유니온 시티의 승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던 모양입니다.”
아직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쥬피터가 눈을 찌푸리자 고문 변호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간단합니다. 그때 모였던 회사 직원들이 단체로 유니온 시티의 리그 우승에 베팅했습니다. 그 외에 성 마테오 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겠나?”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당시에 거의 모든 노동자와 성 마테오 병원의 직원들이 단체로 베팅한 금액이 대략 60파운드(한화 10만 원 상당)이었습니다.”
설마?
쥬피터의 표정을 본 변호사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유니온 시티가 우승하게 되면 그들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이 30만6천 파운드(한화 5억 원 상당)가량 됩니다.”
“그건 아직 먼 이야기가 아닌가?”
“12월에도 유니온 시티가 선두를 유지하면 우승 확률이 70퍼센트로 높아집니다. 당장 60파운드짜리 베팅 증서가 600파운드(한화 100만 원 상당)에 거래되고 있으니까요.”
“흐흠.”
쥬피터의 심정이 그가 내쉰 한숨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MENI은 세계적인 베팅 기업이 BET586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아스널, 첼시, 토트넘에 엄청난 베팅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제야 윤곽이 잡히는군.”
“통상 유니온 시티와 같이 새롭게 승격한 팀의 우승에 베팅하는 숫자는 20명 내외입니다. 그런데 Ji로 인해서 성 마테오 병원에서만 무려 80명이 넘는 인원이 베팅했습니다.”
“80? 80명이나?”
그렇다면 우승 배당금이?
쥬피터가 멈춰 버린 머리를 억지로 굴려 배당금을 계산하려 할 때였다.
“놀라기는 이릅니다. 베팅한 철강 노동자들의 숫자는 1,350명에 이릅니다.”
“커흠!”
툭 튀어나온 기침을 쥬피터가 억지로 삼켰다.
“우승의 가능성이 짙어지기 전에 MENI은 무언가를 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번 투자 건은 그런 이유에서 진행된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쥬피터가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시선을 들었다.
“이보게, 투자는 우리가 승격한 이후로 곧바로 시작되었어. 물론 경기가 진행될수록 좀 더 적극적이 되기는 했지만 말일세.”
“베팅한 인원수를 보고 예방 차원에서 접근했을 수도 있고, Ji를 손에 넣기 위해 행동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놀랍긴 하지만 이건 진정한 이유가 아닐 걸세. 베팅 업체야 어차피 다른 팀들에 배당된 금액을 기준으로 배당금을 결정하지 않나. 그러니 그들이 파산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숫자가 워낙 많습니다. 게다가 MENI는 아스널, 첼시, 토트넘에 무리하게 베팅해서 유니온 시티의 배당이 필요 이상으로 높아졌습니다.”
도대체 왜? 그따위 짓을 하지 않아도 수천억의 돈을 굴리는 회사가?
“정상적인 베팅이라 위법은 아닙니다. 다만, 가능성 있는 세 개의 팀에 엄청나게 베팅함으로써 돌려줄 배당금을 줄이는 위험한 방식을 택했을 뿐이지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내 듣고만 있던 사립탐정 후크가 밥값을 하겠다는 양 입을 열었다.
“Ji의 활약으로 그들이 투자한 선수들, 특히 골키퍼의 몸값이 이전과 다르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최근 MENI에 대한 스포츠 업체의 평가가 부정적이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쥬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배당금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어느 정도 윤곽은 나온 것 같군. 그렇지만 좀 더 조사해 봐 주게. 사소한 것 하나가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계속 조사해 보겠습니다.”
후크가 답했고, 변호사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오전 전술 훈련을 끝낸 마틴은 이례적으로 선수들 전체를 회의실로 불렀다.
“팀을 맡고 있는 감독으로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오른팔을 탁자에 걸치고 비스듬하게 선 마틴이 선수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뜻을 전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성과를 이루었지. 이 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다들 편안한 자세로 마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지난 아스널전은 우리가 앞으로 도전해야 할 과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 경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렵지만, 새로운 전술을 익힐까 한다.”
말을 듣던 선수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시즌 중에 새로운 전술을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였다.
“Ji, 설명을 부탁할까?”
전술판을 직접 옮겨 준 마틴이 정지우를 기다렸다.
앞으로 걸어가는 정지우를 따라 동료들의 고개가 일정하게 움직였다.
“보다시피 내 손이 이렇게 됐고, 나 없이 계속해서 승리를 이루고 있는 게 약 올라서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해 줄까 고민했었거든.”
정지우의 말에 픽 하는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아스널전을 겪고 나서 내가 느꼈던 점들은 이래.”
정지우는 박용근에게, 그리고 마틴에게 의논했었던 전술을 다시 한 번 전술판을 이용해 설명했다.
확실히 깔끔하고 선명해진 느낌으로 설명이 끝났는데 시간은 역시나 20분쯤 걸렸다.
“우-!”
데이빗과 카알, 스웰던이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말대로라면 수비 쪽 부담이 너무 커지는 게 아닐까?”
“실점에 대한 부담이라면 잊어도 좋아. 나든, 얀센이든 우리가 넣는 골보다는 적게 먹도록 최선을 다해 골대를 지킬 거니까.”
동료들의 시선이 얀센을 살핀 후에 다시 정지우에게 돌아왔다.
“Ji, 실점을 각오할 정도로 극단적인 전술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어?”
데이빗의 질문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나는 골키퍼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승부인 걸 넘어 보고 싶어. 프리미어리그의 강자들을 반드시 꺾어 보고 싶고.”
마틴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앞이었다.
“실점을 감당하면서까지? 너의 몸값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도?”
“데이빗, 나에게도 몸값은 중요하지. 그러나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우승한 팀의 골키퍼가 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내가 왜 실점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동료들의 표정이 몹시도 복잡해 보였다.
“나는 유니온 시티다운 경기를 통해 우승하고 싶다. 강팀들을 침몰시키고, FA컵에서처럼 강하게 달려가고 싶고. 우리에겐 그 어떤 팀의 스트라이커에도 뒤지지 않는 레믹이란 동료가 있잖아.”
“그렇지!”
기대하지 않았던 레믹의 반응이 터져 나온 직후였다.
“우리 동료 중에 괴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을 테고.”
데이빗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선수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떻게 할까? 괴물이 앞서서 저러니 우리 모두 그에게 전염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주장이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동료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다.
“코치, 그래서 전술 훈련은 언제부터 합니까?”
레믹의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