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13화 (213/262)

제6장. 좀 더 완벽한 골키퍼가 되고 싶다. (3)

빌의 학교를 방문해 훈련 과정을 지켜보고 싶다고 무작정 찾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지우는 클락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먼저 물었다.

[Ji!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뭘?”

[유니온 시티에서 Ji가 가진 명성과 인기를 받아들일 때도 됐잖아. 학교에 방문이 문제가 아니라 기자들을 어느 선까지 통제할 건지가 더 큰 문제일 거야.]

“조용하게 다녀오는 게 아니라면 거절하고 싶어.”

[하아!]

정말 어려운 일을 부탁받았다는 것처럼 클락이 장난기 묻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5분만 기다려 줘.]

전화를 끊고 나서 정말 5분 만에 벨이 울렸다.

[학교에서 따로 준비할 것이 있느냐고 묻는데? 필요한 게 있어? 예를 들어 전교생 강연 같은 거?]

“축구 훈련을 지켜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전했지. 그런데 그곳의 교장께서 Ji의 열렬한 팬이어서 일이 자꾸 커지는 거지. 아! 혹시 목청 커다란 관중 알아? 유니온 시티에서는 유명한 관중인데?]

이건 뭐, 듣는 순간에 웃음이 커다랗게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알고 있었구나! 바로 그분이 플랭클린 프렙 스쿨의 교장이시거든. Ji가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서 얼마나 흥분하던지, 지금도 귀가 얼얼해.]

클락의 말에 과장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2시에 픽업하러 갈게. 절대 비밀, 그리고 혹시 눈치챈 기자들이 있다면 완벽하게 통제하는 조건으로 교장과의 면담을 약속했어.]

학교를 방문하는 건데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준이었다.

“그럼 시간에 맞춰 준비하고 있을게.”

[Ji! 30분쯤 먼저 도착해도 될까? 이쪽에 선물이 워낙 많이 와서 이것도 아예 가져가려고. 그리고 ‘정지우 타임’이 뭐야?]

“응? 그건 또 뭐야? 나는 모르는 건데?”

[박스에 커다랗게 ‘정지우 타임’이라고 적혀 있어서. 아무튼, 이거 다 가지고 갈게.]

전화를 끊고 난 정지우는 소파에서 영상을 틀었다.

아스널의 경기였다.

톱니바퀴가 빠르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짜임새 있는 플레이였다.

선수들의 개인 능력이 워낙 뛰어난 데다, 그들의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질 때의 아스널은 정말 무섭다.

상대 팀은 공을 쫓아 뛰어다니며 지쳐 가고 있었다.

대각선으로 길게 넘어가는 패스 한 방에 수비진이 흔들렸고, 다시 짧게 이어지는 패스에 골키퍼는 중심을 잃었다.

슈팅 역시 바로 하지 않았다.

잘게 자르는 패스로 완벽한 찬스를 만든 뒤에 깔끔한 슈팅으로 마무리 지었다.

정지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영상에 집중했다.

경기가 끝났을 때였다.

“지우야, 이거 간 좀 봐줄래?”

작은 접시를 받친 전은주가 비빔국수를 오른손으로 들고 다가왔다.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를 맡자 단박에 입에 침이 돌았다.

그녀가 넣어 준 국수가 입안 가득히 들어왔다.

“음!”

“짜지 않아?”

“아뇨! 최고예요! 다 하셨어요?”

“반찬 몇 가지 꺼내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럴 게 뭐 있어요?”

정지우는 ‘얘가?’ 하는 전은주의 어깨를 안고 식탁으로 움직였다.

식탁에 놓인 포크를 들어서 국수를 둘둘 말아 서서 입에 넣었다.

“앉아서 먹어. 여기 물!”

“어머니, 이거요.”

포크로 둘둘 만 국수를 전은주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정지우가 먹던 포크다.

그런데도 전은주는 웃으며 정지우가 권한 국수를 입에 넣었다.

고맙다. 눈물이 날 만큼.

그렇지만 이럴 때 가슴 저 안쪽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지우는 얼른 주먹만큼 국수를 말아서 입에 넣었다.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전은주에게 붉어진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 마셔.”

애써 시선을 피했는데도 전은주는 이해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이서 그렇게 서서 제법 많은 양의 국수를 다 먹었다.

“약 먹자.”

이어서 보약, 그리고 홍삼 봉지를 입에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그 손으로? 얼른 저리 가 있어.”

그릇을 치우며 전은주는 행복한 느낌의 미소를 보여 주었다.

“어머니.”

“응?”

“혹시 감독님 뒷바라지하시면서 서운한 적 없으셨어요? 멀리 떨어져 계신 날도 많고, 전지훈련도 그렇구요.”

행복한 전은주의 얼굴을 보며 문득 생각난 질문이었다. 이렇게 함께 있기 전이라면 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저랑 감독님 때문에 영국에 오셨고, 집에만 계신 거잖아요. 매일 식사 준비에 청소에, 그리고 이렇게 혼자 뒷정리하시다 보면 답답하거나 속상하지 않으세요?”

식탁의 의자에 손을 걸치고 선 정지우의 질문이었다.

“속상할 때 있지.”

바쁘지 않은 동작으로 그릇들을 치우며 전은주가 답을 꺼냈다.

“그렇지만 내가 맡은 역할이 싫었던 적은 없었어.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달릴 때 뒤에서 지원하는 스태프들처럼 나는 내 몫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감독님도 그렇고, 지우 너도 내가 하는 일을 무시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고.”

그릇이라고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정리를 끝낸 전은주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정지우에게 몸을 돌렸다.

“지난번 사우디전에서 감독님을 빛나게 해 줘서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는지 몰라.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빛날 수 있다면, 난 이런 일 얼마든지 기쁘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속 깊은 대답이 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베풀어 준 것이 얼마나 깊은 애정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정지우는 웃는 얼굴로 전은주를 부드럽게 안았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독님 명예도 네가 세워 주었고, 우리 이렇게 풍요롭게 지내고 있고, 상민이, 준석이도 있고, 이제 내가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어.”

“그게 뭐예요?”

정지우는 전은주에게 벗어나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차든, 집이든 선물하고 싶었다. 바라는 게 하나인 게 아쉬운 심정이었다.

“행복해하는 너를 보는 거, 기쁘고 즐겁게 축구 하는 거.”

“전 지금도 행복해요.”

“전보다는 정말 좋아졌지. 이 정도면 충분할 정도로.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너무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아도 돼.”

전은주가 정지우의 깁스한 손가락에 시선을 주었다.

“우리 부천의 작은 집에서 지내도 행복한 건 변함없잖아. 좋아하는 축구 하면서 함께 지내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예.”

전은주가 웃으며 다가와 정지우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영상을 한 편 더 보고 났을 때 클락이 도착했다.

그는 우체국 표시가 찍힌 상자들을 연달아 거실에 쌓았다.

당장은 뜯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깔끔한 복장을 한 정지우가 클락과 함께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유니온 시티에서 흔히 보는 철강 노동자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덩치와 굵은 목, 두꺼운 손가락까지, 플랭클린 프렙 스쿨의 커그 교장은 백년 전쟁에서 갑옷을 벗고 튀어나와 양복을 걸친 딱 그런 느낌이었다.

“어서 와요!”

그는 점잖게 정지우를 맞았고, 클락과 인사를 나눴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요! 우선 차 한잔해도 되겠지요?”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교장실로 들어갔고, 그의 책상 앞에 앉았다.

차는 커그 교장이 직접 준비해 주었다.

“유니온 시티가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해서 선두에 있는 것이 내 평생소원이었습니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에서 그 소원을 빼놓은 적은 없었을 정도죠.”

정지우를 만난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가 그의 얼굴에 빼곡하게 드러나 있었다.

“Ji, 당신의 축구는 감동이 있어요. 공을 막을 때 짜릿하게 전해 오는 무언가가 나를 늘 일깨워 주곤 했지요.”

“응원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떤 분인지 한 번쯤 보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교장실이 쩌렁 울리는 웃음이었다.

“난 유니온 시티 축구팀을 정말 사랑합니다. 내가 가진 재능이 바로 이거라서.”

커그가 손으로 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걸로라도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지요.”

10분쯤에 걸쳐서 그가 지닌 팀에 대한 애정을 들었고, 또다시 10분쯤 더 걸려서 그가 모아 둔 여러 가지 소장품들을 보았다.

“Ji, 사진과 사인을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한 장쯤 찍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랍에서 카메라를 꺼낸 커그는 클락을 시켜 대략 20장 정도의 사진을 교장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찍었다.

손가락에 깁스를 한 덕분에 ‘친애하는 커그에게’로 시작해 ‘당신을 존중하는 Ji가’로 끝나는 사인은 세 번으로 끝났다.

시간을 제법 보냈음에도 아쉬운 표정으로 커그가 교장실에서 일어섰다.

“가 봅시다. 이제 훈련을 위해 우리 선수들이 모여 있을 시간이니까요.”

“직접 가시게요?”

“이런 기회가 어디 쉽게 옵니까? 당연히 옆에 있어야지요.”

정지우는 커그가 열어 주는 문을 통해 복도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와 본관 건물 뒤편으로 걷는 동안, 건물 사이에서 그라운드의 풍경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스터드 끈을 묶거나 가볍게 몸을 풀며 훈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정지우를 발견한 아이들의 눈에 놀라움이 서릴 때, 중년 남자와 20대로 보이는 남자 셋이 다가왔다.

“인사하시죠.”

커그가 세 사람의 코치들을 소개해 주었고, 정지우는 그들과 가볍게 손을 맞대는 수준에서 인사를 마쳤다.

“Ji!”

뒤늦게 나왔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빌이 달려왔다.

“잘 지냈어? 한번 들르기로 했던 약속이 생각났어.”

자세를 낮추고 인사를 건네는 정지우를 골키퍼 장갑을 낀 빌이 끌어안았다.

이어서 선수들과 인사를 마쳤고, 평소 하던 대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정지우는 커그 교장, 클락과 함께 네 줄뿐인 관중석 중간에 앉아 어린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멋진 플레이다!”

“방향을 좀 더 확실하게 꺾을 수 있다면 막을 사람이 없겠는데!”

코치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훈련을 지켜본 10분 만에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펑!

엉뚱한 슈팅이 나와도 타이밍에 문제만 없다면 코치들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칭찬해 주었다.

정지우는 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재능이 보이는 동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의 움직임에 따라 부지런히 위치를 바꾸고, 상대의 동작을 진지하게 노려보는 모습만큼은 나무랄 곳이 없었다.

그리고 한순간,

빌이 정지우의 모습을 흉내 낸 것처럼 팔을 어깨 위로 들고 허리를 잔뜩 낮췄다.

퍼어엉! 화아아악! 철렁!

골을 먹은 빌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지우를 힐끔 보았다.

‘멋진 동작이었어!’

정지우는 빌을 향해 엄지를 치켜 주었다.

기본적인 동작을 연습한 뒤에 바로 진행된 연습 경기였다.

“20분씩 4쿼터를 뜁니다. 이후로 연습을 원하는 선수가 있으면 코치들이 그들의 요구에 맞는 훈련법을 알려 주지요.”

커그가 선수들을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이 중에 앞으로 유니온 시티를 빛낼 선수가 반드시 나올 거라 믿습니다.”

커그가 계속 말을 건네는 동안에도 정지우는 그라운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설픈 동작, 자꾸만 잘리는 패스, 그리고 부족한 체력.

그런데 아이들의 동작과 패스에는 정지우가 깜짝 놀랄 만한 창의적인 모습이 있었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뛰는 아이, 욕심이 가득 올라온 아이, 그리고 재능은 없지만 이쪽에서 저쪽까지 공을 쫓아 볼이 시뻘겋도록 달리는 아이.

만약 저 팀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면 당장 어떤 것이 필요할까? 저 수준이 현재의 유니온 시티인데, 아스널 같은 팀을 상대하려면 무엇을 가장 먼저 바꾸어야 하지?

솔직히 막막하기만 할 뿐, 답을 알 수는 없었다.

투욱!

아직 수비 라인을 유지하는 법이 몸에 익지 않아서 툭하면 수비수 사이를 뚫는 패스가 나왔다.

오프사이드를 한 번에 무너트리는 멋진 패스였다.

그리고 그런 패스는 꼭 슈팅으로 이어졌다.

투욱!

정지우가 생각하지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패스가 날아갈 때도 많았다. 픽 하고 웃음이 나왔고, 대개 그런 패스는 외롭게 굴러가 아웃되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조금만 알려 주면 확실한 득점 루트를 익힐 수 있을 텐데, 코치들은 전혀 그런 점을 지적하거나 지도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쉽게 질문할 내용은 아니었다.

휴식 시간 10분을 포함해 대략 1시간가량, 정지우는 꼼짝하지 않고 아이들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가끔 커그와 클락이 이게 정말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볼 경기인가 하는 표정으로 힐끔거렸는데, 정지우는 묵묵하게 경기에 시선을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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