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좀 더 완벽한 골키퍼가 되고 싶다. (2)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통증이 좀 더 심했다.
그렇더라도 씻는 것이 불편해서 그렇지, 옷을 갈아입는 정도는 별 지장 없었다.
“편히 주무셨어요?”
문제는 아침 식탁에 있었다.
젓가락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포크로 반찬을 집어 먹어야 했다.
“지우야, 이거.”
전은주가 찍기 편하게 김치를 놓아 주었는데, 박용근과 박상민은 적당히 못 본 척해 주었다.
“오늘은 집에 있는 거지?”
“예. 부기가 빠지면 깁스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이틀 정도는 쉬라고 들었습니다.”
“다른 생각할 것 없다. 이럴 때 푹 쉬고, 다시 활약하면 되는 거야.”
“예, 감독님.”
아침을 먹은 뒤에 셋이서 소파에 앉아 홍삼 봉지를 입에 물었고, 박용근과 박상민이 집을 나섰다.
짧은 부상에 이어 다시 긴 부상이 찾아왔다.
눈에 든 멍 때문에 열흘을 쉬는 것과 손가락뼈에 금이 가서 한 달 반을 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정지우는 방으로 들어가 구단에 전화를 걸었다.
[Ji! 좀 어때?]
“클락, 미안한데 아스널 경기 중에서 맨유나 첼시, 리버풀과 한 경기, 혹은 챔피언스 리그에서 강팀들과 붙었던 경기 영상이 있으면 좀 챙겨 줘.”
[잠시만.]
클락이 메모하는 것처럼 시간을 끌었다.
“가능하다면 맨유나 첼시의 경기 중에서도 그런 경기들, 특히 잘한 경기, 아니면 완전히 망친 경기들을 챙겨 주면 더 좋고.”
[오! 일이 많은데?]
그러면서도 클락은 정지우의 요구를 분명하게 메모한 뒤에 다시 확인했다.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줄게.]
“부탁해.”
통화를 마친 정지우가 전화기를 내려놓은 직후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기다렸다는 것처럼 벨이 울렸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전화기를 든 정지우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예요. 어제 병원에 왔었다면서요? 손은 좀 어때요?]
“부기 빠지면 깁스하기로 했어요.”
[외부에 알려질까 봐 담당 의사가 전혀 말을 하지 않아서 좀 놀랐어요. 괜찮아요?]
“부상은 괜찮은데 마음이 편치 않네요.”
이렇게 솔직하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오늘 특별히 할 일 있어요?]
“아뇨. 집에 있으라고 해서 구단에 경기 부탁한 게 전부예요. 갑자기 축구를 뺏긴 기분이기도 하구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 한 시간 뒤에. 괜찮죠?]
“물론이죠.”
영어로 나눈 대화라 전은주는 어떤 내용인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또 굳이 감출 이유도 없었다.
“어머니, 데이지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
“집으로 온다는 거니? 그럼 잠깐 들어오라고 해서 차라도 한 잔 마시게 해.”
전은주의 권유가 나쁘지 않았다.
정지우는 여유 있는 시간이었고, 전은주는 깨끗한 집을 또 치운다고 부산하게 보낸 한 시간이었다.
띵동! 띵동!
데이지가 벨을 눌렀고, 정지우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으며, 셋이서 소파에 앉았다.
간단한 영어 인사쯤 전은주도 한다.
청바지, 셔츠, 그리고 깔끔한 점퍼를 입고 있어서 데이지는 오래 공부한 대학원생처럼 보였다.
관중석에서 만났을 때보다 차분했고, 좀 더 편안하게 인사를 나눴는데 전은주는 데이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얼굴이었다.
20분쯤 차를 마신 뒤에 정지우와 전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그래. 이왕 나가는 거, 다른 생각 하지 말고 편안하게 있다 와. 5시 30분까지 안 오면 우리끼리 저녁 먹을게.”
현관을 나서기 전에 데이지가 전은주를 안아 주었다.
“예쁘다, 데이지.”
전은주가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며 한 말이었다.
데이지의 작은 차를 타고 출발했다.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직하게 틀어 놓은 음악을 들으며 영국 가을 길을 느긋하게 달렸다.
20분쯤 달리자 차선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2차선 국도가 나왔다. 도로의 양쪽으로 나무들이 있고, 그 너머로 잔디와 풀이 우거진 전형적인 영국 시골의 풍광이었다.
가끔 낮은 울타리를 두른 2층 주택이 하나씩 있는 정도가 전부였다. 이런 곳을 지나친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목적 없이 달린 적은 없었다.
옅은 색으로 대지와 맞닿아 있는 하늘이 깊어지는 바다처럼 위로 올라갈수록 짙은 파란색을 뿜어냈고, 군데군데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괜찮죠?”
“좋네요.”
진심이었다.
한적한 시골 풍경이 주는 여유로움이 악착같이 매달려 왔던 최근 몇 달을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덜컹! 끼익! 끼이익! 덜컹!
시골 길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데이지의 차를 새것으로 바꿀 필요는 있어 보였다.
“좀 오래되긴 했어요. 그나마 중고로 산 거라서.”
정지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데이지가 웃으며 대꾸했다.
한 시간쯤을 달린 데이지가 언덕을 높이 올라가서는 내리막이 나오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내가 추천하는 오늘의 장소예요.”
고갯짓을 한 데이지가 차에서 내렸고, 정지우가 그녀를 따라 조수석에서 내려섰다.
멋진 장소였다.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초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쩐지 소박한 드레스에 앞치마를 두른 소녀가 뛰어나와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네에 올라앉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끼이익!
정지우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데이지가 차의 트렁크에서 커다란 피크닉 가방과 매트를 꺼냈다.
“누군가 좋은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정지우가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는데, 데이지는 매트만 왼손에 들려 주었다.
나무 그늘 주변에 매트를 깔았고, 피크닉 가방을 두었으며, 그 위에 둘이 앉았다.
가방을 연 데이지가 포도 주스와 물병을 꺼내 정지우 앞에 놓아 주었다.
“잔을 따로 가져오진 않았어요. 어차피 술을 마실 수도 없고, 괜히 엎지르면 불편하니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피크닉 가방 한쪽에 넣어 놓았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냥 시간을 즐기는 거예요. 쫓기지 말구요, 경쟁할 필요 없구요, 여기선 꼭 막아 내야 할 것도 없어요. 여기, 이리 와 봐요.”
데이지는 정지우를 불러 눕게 한 다음, 점퍼와 매트를 말아서 베개처럼 목 뒤에 넣어 주었다.
“어때요?”
팔을 세워 머리를 받친 데이지가 정지우를 향해 옆으로 누운 채 던진 질문이었다.
“역할이 좀 바뀐 것 같은데요?”
대답을 들은 데이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가끔 불안했었어요. 당신이 골대 앞에 있을 때면 늘 릴리를 지키겠다고 할 때의 모습이었거든요.”
정지우의 앞머리를 쓸어 주며 데이지가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난 당신이 좀 더 축구를 즐길 수 있었으면 싶어요. 승리를 위해 절박하게 하는 축구가 아니라, 상대의 슈팅을 막는 것이 기쁘고 행복해서 더 잘하고 싶은 축구.”
정지우가 힐끔 시선을 주자 ‘기분 상한 건 아니죠?’ 하고 질문을 던졌다.
기분 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악착같이,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
이겼을 때, 누군가에게 승리를 전했을 때 행복하고 기뻤지만, 정작 데이지 말대로 축구 자체가 숨 막히게 재미있었던 적은?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힐끔 고개를 돌렸을 때 데이지는 여전히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팔을 뻗어 데이지의 머리를 받쳐 주었고, 몸을 돌려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파란 하늘만큼 상큼하고, 잔디만큼 진한 데이지 꽃 향기가 정지우의 코를 간질였다.
멀리서 달려온 바람이 잔디 위를 물결처럼 달리고, 파란 하늘이 온 세상을 비추는 초가을의 한낮이었다.
이틀 뒤에 병원에서 깁스를 했고, 구단은 정식으로 정지우를 6주 부상자 명단에 올렸다.
6주 동안 상대할 팀은 노리치, 사우샘프턴, 크리스탈 팰리스,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 왓포드의 순이었다.
4강에 들 만한 강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느 팀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 프리미어리그였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클락은 정지우가 원했던 영상들을 전해 주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정지우는 소파에 앉아 박용근, 전은주, 박상민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축구를 천천히 돌아볼 생각입니다.”
이틀 동안 정리해 왔던 생각이었다.
“마침 빌이 학교에서 골키퍼를 하고 있다니까, 그쪽부터 방문해 볼까 하구요.”
전은주와 박상민은 무슨 뜻인가 하는 얼굴이었는데, 박용근만은 대강 정지우의 뜻을 짐작하는 눈빛이었다.
“축구가 전부였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 승부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넓게 못 보고 자꾸만 시야가 좁아졌던 것 같기도 하구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박용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지우의 뜻을 받아 주었다.
“넌 늘 한계를 뛰어넘는 선방을 펼쳤다. 지난번 부상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골키퍼치고 부상이 잦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텐데, 앞으로 마주쳐야 할 강팀들을 계속 그런 식으로 상대하기는 어려울 거다.”
전은주와 박상민을 돌아본 박용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우야.”
“예, 감독님.”
“네 덕분에 나나 상민이가 다시 축구를 할 수 있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박용근이 넉넉한 미소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네 마음을 왜 모르겠니? 나도, 이 사람도, 그리고 상민이도, 네게 고마움을 모른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감독님.”
전은주가 안쓰럽고 미안한 얼굴로 정지우를 보듬어 주는 앞에서 박용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너를 위한 축구를 해 봐. 여기 있는 우리나 릴리, 동료들을 지켜 내기 위해서 힘겹게 싸우는 축구 말고 네가 행복하고 즐거운 축구.”
정말이지 박용근은 정지우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한계에 도달해서 지쳐 가는 모습이었는데 좌절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아낸 것도 그렇고. 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해해 준 것이 고마워서 한 인사였는데, 이것 역시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박용근밖에 없는 눈치였다.
“시간이 있을 때 처음부터 둘러봐. 가능하다면 한국에도 조용하게 한번 다녀오고.”
“저 혼자서요?”
“아니면 데이지란 아가씨와 가든가.”
“예?”
정지우의 당황한 얼굴을 본 박용근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6주다. 어차피 2주 정도는 기본 훈련만 소화하면 되니까, 이참에 여유를 가지고 네가 축구를 시작했던 지난 순간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알겠습니다.”
6주 동안 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결정되는 느낌이었다.
“영상들은 받았지?”
“예. 지난번 아스널전에서 당황했었던 것 같아서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마주치니까 예상했던 것과 달랐거든요. 천천히 아스널이나 맨유, 그리고 토트넘, 리버풀 같은 팀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박용근은 이것 또한 편안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급할 것 없다. 천천히, 하나씩 해 봐.”
“예.”
이제 겨우 해 보고 싶었던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조금은 여유가 생긴 것 같고, 또 축구를 담을 그릇이 전보다 커진 느낌이었다.
“감독님,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박용근의 시선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널전에서 왜 선수 교체를 하지 않으신 건가요?”
“상민이 말이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상민이가 있는 곳에서 말씀드리는 이유도 그거구요. 전체적으로 리듬이 흔들렸는데 교체를 전혀 안 하시는 게 궁금했었거든요.”
“상민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박용근의 질문을 받은 박상민이 먼저 뒤통수를 만졌다.
“마크를 당한 건 알겠는데,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전혀 모른 채로 뛰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지우가 골대 앞으로 불러 준 덕분에 기회가 왔던 걸 제외하면 전혀 제 경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박상민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날의 느낌이었다.
“그날은 누굴 집어넣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이끌 리더가 없었으니까. 벤치에서 대기하던 선수 중에 그 역할을 대신할 만한 선수도 없었고.”
박용근은 뜻밖의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동안 유니온 시티를 지휘해 오던 네가 그날만큼은 골키퍼란 포지션의 한계를 스스로 느끼고 있었지. 수비도, 미드필더도 지휘자를 잃고 허둥대고 있었으니까.”
정지우는 막막하게 느끼고 있던 것의 실체를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감독님, 그럴 때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건가요?”
정말 궁금했던 일이다.
지금 던진 질문의 답을 듣는다면 분명 한 단계는 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골키퍼가 지닌 한계를 느꼈었다.
그걸 이겨 낼 방법이 있을까?
“지금부터 6주 동안 네가 그걸 알아내야지.”
반짝이는 정지우의 눈을 향해 박용근이 건넨 답이었다.
“포지션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골키퍼. 6주 뒤에 내가 보고 싶은 너의 모습이 바로 그런 골키퍼다.”
바람을 전하는 박용근의 눈이 정지우 이상으로 빛나고 있었다.